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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Mar 23. 2016

사역자를 나쁘게 말하면 안되죠.

그놈의 역겨운 동업자의식

전화벨이 울렸다.


010-0000-0191


0191?

영원구원.


나름 신앙있다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핸드폰 뒷자리 번호다. 어차피 모르는 번호라 내버려두었더니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통화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제가 지금 전화받기가 곤란한데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신거죠」


그리고는 물어볼 것이 있어 통화하고 싶다는 말.

이때 이 전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나이먹고 아직도 이런 어리숙한 실수를 저지른다.



「나쁜 방법으로 알고 연락한건 아니니 괜찮아요」

「괜찮은 건 제가 판단할 일이지 그렇게 말씀하실게 아닌것 같은데요」

어쨌든 다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번호를 알았냐는 질문에 계속 돌려말한다. 나쁜 방법으로 알게 된 것은 아니니 괜찮다는 중년 여성. 왜 내가 판단할 괜찮음을 자신이 괜찮다고 할까. 


결국 알아낸 내 전화번호의 출처는 교회 사무실이었다. 게시글의 일자와 찬양사역자의 스케줄을 대조하고 다녀온 교회의 교사 중에서 내 이름을 걸러낸 것이다. 처음엔 그럴 수도 있으려니 했는데 생각해보니 꽤나 집요한 방법이었고 개인의 사생활을 무심하게 생각한 교회 사무실의 천박한 수준이 이 불쾌한 상황을 야기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집요한 발상이다. 



일전에 올린 K 찬양 사역자에 대한 글을 내려달라는게 이 여자 목의 목적이었다. 1시간이나 이어진 실랑이. 




자신을 직접 다정다감하고 친절한 여자 목사라고 했다. 

자신은 남의 이야기를 싫어하고 K 찬양사역자의 사역을 비난하는 것, 사역자를 비난하는 것은 나쁘다는 말은 부드러워 봤자 네 글이 나쁘다라는 말이었다. 




당시 우리 교회 교사들은 K의 집회가 끝나고 그를 부른 것을 후회했다. 자신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둥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예시로 드는 등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꽤나 많았다. 누군가 묻는다면 K는 부르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회 공동체가 사례금을 지불하면서까지 들은 말치고는 꽤나 몰상식한 수준이었다. 그날 헌금을 그렇게 사용한 것에 대한 죄책감마저 들었다. 



「사례금을 말씀 하시는데 돈을 받지 않고 집회를 했다면 괜찮다는 말인가요?」

이 여자목사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례금을 받지 않는 교회 교사들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한 겁니다. 사례금을 받고 사역하는 사람이라면 그보다 나은 발언을 해야죠.」



얼마 전 교회에 왔던 K를 통해 자신은 은혜를 받았으며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있는 여자목사의 말. 남 이야기는 싫어하며 옹기장이라는 그룹과 K를 비교하는 것은 나쁘다고 말했다. 그를 비난하는 것은 찬양사역자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고 그가 전하는 예수님이 손해일거라는 논리. 고난주간이니 예수님을 생각해서 감싸주고 용서해야 하지 않겠냐며 글을 내려달라고 했다.


「좋은게 좋은건데 5개월이나 지난 일인데 앞으로 더 잘하라는 의미에서 내려주세요」


내가 알기로 그는 십년 넘게 사역을 했다. 한시간 넘는 통화 중에 계속 글을 내려달라는 이유는 K에 대한 그녀의 애정뿐이었다. 


「모든 찬양사역자가 그와 같지 않음을 적시하려고 옹기장이를 예로 든 것이고 그에 대한 의견이 전적으로 제 생각임을 밝혔습니다. 인터넷 카페나 게시판도 아닌 개인의 공간에 개인의 의견을 올린겁니다. 그 글을 내릴 생각이 없습니다.」

「사역자를 깎아내리는 건 나쁜일이에요」


대화의 말미에 그녀가 던진 말은 일상적이면서도 의외로 충격적이었다.

사역자를 이유없이 비난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내가 올린 글은 들은 것도 아니요 내가 직접 겪은 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교사 공동체가 헛헛할 정도로 공통의 감상을 공유했다. 우리가 그를 왜 불렀을까.


교회의 집회가 있던 그 날 저녁 K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K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여자목사는 내게 강요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감동을 느끼게 한 그를 향한 비난이 불편했던 것이다. 


예수님 생각해서 글을 내려달라는 말이 통하지 않자, 옹기장이와 비교하는 것은 나쁘다고 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찬양사역자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 있는 글이라며. 옹기장이를 말한 것은 그렇지 않은 사역자들도 있다는 걸 말해주기 위함이었다. 


성도들이 힘들게 낸 헌금으로 이뤄진 사례금이 아까울 정도였다고 하니 사례금을 받지 않으면 괜찮은거냐고 물었다. 사례금을 받지 않고 봉사하는 교사들도 학생들에게 차마 하지 않은 말을 그가 했다고 말했다. 사례금이 있기 때문에 더 한심한 일이었다. 


사역자를 비난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했다. 거짓을 올린것도 아니였고 사역자 초빙 행사의 양면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K를 통해서 뼈저리게 느꼈을 뿐이다. 심지어 K는 실수를 남기고 갔다. 




나에 대해 쥐잡듯이 탐구한 이 여자목사는 끝까지 자신의 이름과 교회를 말하지 않았다.


내 정보를 동의없이 이 여자목사에게 알려준 교회의 천박한 수준은 짜증을 넘어 소름돋게 하는 무지의 소치였다. 인터넷도, 남 이야기를 올리는 것도 싫다는 이 여자목사의 집요함에 집에 오는 길에 더한 추위를 느꼈다. 심지어 최근 더 돋아나는 이석증을 거론할 때는... 아... 정말.


이 여자목사는 미친여자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집요하게 전화번호까지 알아내고는

자신은 다정한 사람이고 예의바른 사람이라 자칭하거니와

자신의 이름과 신상은 밝히지도 않은채 

한시간이나 K에 대한 글을 내려달라고 징징댄다


아... 인터넷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신상을 파서 사람의 연락처를 알아내고 집요하게 강요하면서 자신의 부드러운 말투는 부탁이지 강요가 아니라고 한 이 미친여자. 아 실로 환멸을 느끼게 한다.


아 미친여자였다.

글이 불편하다고 집요하게 전화번호까지 알아내서 집요하게 지워달라고 하다니...


아 실로 대단한 미친여자... 소름돋기까지 한다. 








뭘해도 사역자를 비난하는건 나쁘다는 몰상식, 목회자에 대한 지나친 존경이 교회안에 팽배해 있으니 목회자가 수십억 횡령하고 학력을 위조하고 변태짓을 하고 멍멍이 소리를 해도 목사'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아나 니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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