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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Apr 02. 2017

꾹꾹 눌러 쓴 글, 두드려 쓴 글

365

어제 마친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다음으로 읽고 있는 책은 <빨간 수첩의 여자>다.


일부러 그리한건 아니지만 두 소설 모두 프랑스 소설인 것을 지금 발견했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는 서른의 젊은 신부의 일기 형식의 글로

날짜가 적히지 않았으니 일기라기 보다는 수상록(Essais)같은 느낌이다.

<빨간 수첩의 여자>는 강도를 당한 여성의 버려진 핸드백 속 수첩의 내용들이 그려진다.




손으로 쓴 글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소설 속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글들의 어떤 곳은 지워지고 어떤 곳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줄이 그어져 있다.


지워지고 없어진 글들은 하나의 흔적이다. 손으로 쓴 글은 지워짐 자체도 후회나 변심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걸 수도 잠깐의 변덕이나 심술로 쓴 글이라 후회가 되어 그렇게 되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생각해보니 바로 전에 읽은 <교수와 광인>의
머리 교수와 마이너 간 주고받은 서신에서도 이런 매력적인 뉘앙스들이 나타났었다.

글의 내용에 따라 간격을 달리 하고
흘려쓰고 크기를 달리 하고
글자에 나타난 미묘한 깊이와 잉크의 농도를 보고
글을 쓴 이가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졌을 지를
작가는 짐작하여 독자를 설득한다.





노트북으로 두드려 쓰고 있는 이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지웠다 다시 쓰는지
어떤 부분을 명쾌하게 직진하는지

지금 이 순간의 나도 잘 모르는데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어찌 알까




<빨간 수첩의 여자>에서 버려진 핸드백을 주운 서점 주인 로랑은
건너편 테이블에서 전자책을 읽는 여성을 보며
책의 미래를 우려하기도 하는데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 몇번째 권인가 보면
지금으로부터 몇 천년 후
인간이 은하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시대에도
종이는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종이나 종이책이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것 같다. 내 생각에는.


더 나은 종이가 계속 나타나지 않을까




p.s.

이를테면,

종이와 펜을 암시장에서 힘겹게 구해 적어 남긴

<안네의 일기>를 전자책으로 읽는 것과

손으로 한장 한장 넘기며

소녀의 조곤조곤한 이야기를

읽는 것,


이건 '어떤 게 좋을까'를 넘어

'어떤 게 옳은 지'를 골라야 하는 사안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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