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일기 4 :
엄마

엄마의 하루가 줄었다.

by 뿡빵삥뽕



친가와 외가는 모두 전남 나주로 서로 5km 거리에 있다.

아버지는 7남매의 셋째, 어머니는 6남매의 다섯째.


어머니의 6남매는 5남 1녀다. 그래서 명절 외가에 갈 때면 늘 할머니, 할아버지만 계셨다. 어릴 땐 북적이던 친가에서 외가로 넘어가는 게 싫었다. 함께 놀 사촌도 없을뿐더러, 외할아버지는 둘째 셨던 터라 외가의 집은 큰집이던 친가보다 작았다.



우리 엄마는 1년에 겨우 두 번인 명절에야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으니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었을 거다. 거리가 가까우니 친가 할머니는 '점심 먹고 가거라, 저녁 먹고 가거라'라는 지금 생각하면 이기적인 말씀을 늘 하셨다.



엄마는 시어머니의 말에 대꾸하지 안 하셨지만 분명 속사 하셨을 거다.

그러는 중에 외가는 재미없어서 가기 싫다는 내 말에 얼마나 또 속상하셨을까.


"너희도 이모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래도 엄마는 외가를 재미없어하는 누나와 나를 혼내지 않고 이해해주려고 하셨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알고 언니처럼 따르는 작은 고모가 그래도 외가에 빨리 가라며 재촉해주어 엄마는 그나마의 위로를 받았을지 모른다.




7남매의 친가는 큰집으로 시골 동네의 가장 깊은 곳에 터를 잡고 있는 나름 동네 유지 격인 집이었다. 그런 집의 셋째, 아들로는 둘째에게 어머니는 시집 가셨다. 그리고 사연이 있던 큰아버지와 시댁을 싫어하는 큰어머니는 명절에 잘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동생들은 줄줄이 결혼을 늦게 했다. 내 바로 아래 친척동생이 나와 7살 터울이다.



손님 많은 큰집의 명절일을 엄마는 꽤나 오랫동안 도맡아서 해야 했다. 1990년대의 명절에 서울에서 나주까지 내려가려면 열댓 시간이 걸렸다. 지금이야 서울-부산 8시간도 정체라지만, 멀미를 하던 나는 그 당시에 서울에서 광주까지 10시간 안으로만 도착하길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10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려 내려가면 아버지는 잠을 자고, 어머니는 부엌일을 했다. 미어터지는 명절 손님에 누나와 나는 자리를 비켜줘야 했고 손님의 식사와 다과상은 계속 이어졌다. 명절에 손으로 찾아가려거든 밥 때는 피하는 게 최소한의 염치와 예의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어쨌든 누나와 나는 마당으로 내쫓겼는데 추석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설에는 추위에 떨어야 했다. 우리가 마당에서 비벼대고 있는 동안 엄마는 구식 부엌에서 내내 일했고, 손님이 많아 일거리가 부엌을 차지하면 설거지는 마당에서 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처녀, 총각이던 작은 고모와 삼촌들이 설거지는 거들었다.




엄마는 늦은 시간까지 부엌일을 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제사상을 차렸다. 그리고 추석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외가를 찾았다. 외가에서 하룻밤 자는 동안 엄마는 외할머니와 베갯머리를 맞대고 늦은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명절 마지막 올라오는 날이면 엄마는 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꼐 큰절을 했다. 그리고 늘 눈물을 흘렸다. 엄마, 아빠와 헤어지니 엄마도 슬플 거라고 생각했고 그땐 나도 슬퍼서 외가 마당을 괜히 한바퀴 돌았다.





내가 이모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엄마도 여자 형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명절 끄트머리에 친정에서 만나 시댁 이야기도 하고 누나와 나는 명절 외가를 덜 따분하게 생각했을 거다. 아버지도 이모부와 시간을 보내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도 조금은 더 북적이는 명절 마무리를 하셨을 거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중3 때, 외할머니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외할머니는 말미를 치매로 보내시느라 명절 시골 방문은 친가에서 끝마치게 되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모두 돌아가신 지금,

엄마와 외삼촌들은 명절에 찾아갈 엄마-아빠가 없다.

엄마의 명절은 그렇게 하루가 줄었다.





누나가 엄마를 만나러 매형과 아가를 데리고 왔다.


엄마는 명절에 딸로서의 하루를 잃는 대신 할머니로서의 하루를 얻었다.


엄마는 조카를 예뻐하고, 조카도 우리 가족 중 누구보다도 엄마를 좋아한다.

조카는 엄마에게 더 많은 뽀뽀를 해준다.



오늘따라 그게 참 고맙고 다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