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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Apr 18. 2017

낡아가는 방식

391 시간의 세례




오늘 아침 옷을 입는데

셔츠 사이에 자리한 청남방에 눈길이 갔다
칼라 끝부분이 약간 하얗게 새었더라




구멍이 나거나 올이 빠지지 않고
몸에 맞게 낡았고
나름 세월의 맛이랄만큼 색이 바랬다.



이 청남방... 
5년 전인가 6년 전에 샀던 옷이다.

당시에는 약간 끼는 듯한 옷이었고
그래서 괜히 산건 아닌가 노려보던 옷이었는데
지금은 적당하게 편안하다
편안하게 낡았다



이웃 분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에 나온 
'시간의 세례'라는 표현을 남겨놓으신 걸 읽었다. 
책장에 걸린 하루키의 책 두 권은 어찌된 건지 모르게 
그의 책은 아직 한권도 읽지 못했는데 
'시간의 세례'라는 표현은 직관적으로 너무 멋졌달까.



이 청남방은 나에게 맞는 편안한 모습으로 그 '시간의 세례'를 받은것 같다. 
결코 보기 좋지 않은 내 몸에 걸려 그 시간을 잘 견뎌주었다.



대학생때인 10년도 더 전에 샀던 『피터 드러커 자서전』은 양장본임에도 불구하고 책 안쪽이 튿어지고 실밥이 나와있다. 형광펜으로 표시해둔 여기저기도 보이고... 그렇게 꽤나 여러번 읽었다. 이 책을 읽고 서평으로 상금도 받았었다. 물론 그 이후로는 읽은 일이 없었던것 같지만. 

어쩌면 볼품없게 나이든 책이지만
이 책에는 내 책이라는 흔적이 담겨있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작곡한 <미션>의 사운드트랙은 내가 처음 산 OST다. 

<미션>을 시작으로 
모리꼬네의 다른 작품들과 알란 멘켄의 디즈니 뮤지컬 OST, 반젤리스와 존 윌리암스, 히사이시 조의 음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음반의 어떤 케이스는 깨지고 어떤 CD는 기스가 생겼고 
누군가에게 빌려줬다가 실종된 음반도 더러 있다.




적당하게 의미가 있는 물건들이 의미있게 낡은 것을 적었지만, 
사실 그 시간의 세례를 모두가 의미있게 받지는 않는다.


어느 하나 빠짐없이 흐르는 시간을 지나지만
지난 달인가에 헌옷 수거함에 던져진 옷들도 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중고서점에 팔아버린 책들도 있다
공짜로 받고 선물로 받은 CD도 많이 갖다 버렸다

그외에도 블라블라블라블라...



이 글을 적고 있는 노트북을 통해
내려받고 삭제했던 무형의 
수천 수만가지 파일들

노트북을 두번 바꾸는 동안에도
살아남은 그대들의 사진들
음악 파일들과 악보들

지금은 그 가치가 전혀 없지만
남아있는 대학생의 과제물들



눈과 손에 잡히고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도
그렇지 않고 클릭과 두들기는 타자에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들도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특별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어떻게든 각자의 가치를 갖고
낡아가고 있다는 것이 
오늘 왠지 모르게

나만 알고 생각하는 어떤 비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다시 청남방을 입고 나갔을 때
이 옷이 5 ~ 6년 되었다는 사실을 나만 안다는 것

덜 오래된 옷보다 더 내 옷 같은 기분

같은 옷을 산 다른 사람들도 많겠지만
시간의 세례를 나와 함께 받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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