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나를 기억한다면

누군가의 노을 속에, 나의 온도가 머물기를

by 진서

재잘대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해가 완전히 숨어서 창 밖은 깜깜해졌다. 방문 사이로 빛이 스며 나왔다. 거실에 온기가 느껴진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과일을 깎아 먹는 소리가 들린다. 배가 고팠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내 눈을 다시 감았다.

지영이는 대학생이었다. 빨리 졸업을 하고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평일에는 오전 오후로 수업을 채워 두었다. 평일 저녁과 주말에는 빵집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기 중에 생기는 과제는 대충이라도 해보는데 학기마다 찾아오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행히 집에서 학교로 가는 지하철에서는 늘 앉아서 갈 수 있었다. 꽉 찬 지하철 안에서 자리에 앉아 시험공부를 했다. 책을 펴고 정신없이 공부를 하다 보면 고3 때도 이만큼 열정적이었는지 궁금했다. 분명 지영이는 치열했다. 잘하고 싶었다. 인정에 굶주렸다.

“야!!! 일어나서 과일 먹어!!!!” 거실에서 엄마가 소리쳤다.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일어났다. 먹다 남은 과일이 있었다. 엄마와 아빠, 동생은 배가 불렀는지 포크를 내려놓았다. 포크를 가져와 과일 앞에 앉았다. 지영이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매번 남았을 때만 부르더라..” 남은 과일을 무슨 생각인지 싹 비워냈다.

빵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주말 알바를 구했다. 편의점에서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하는 자리였다. 밤새 지친 야간 아르바이트생과 교대를 해주면 되었다. 키도 크고 덩치가 좋은 남학생이었다.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바뀌어도 늘 남학생이었다. 야간은 남자가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말 알바는 대학생들에게 정말 좋은 자리었다. 지영이에게도 아주 소중했다. 최저 시급을 잘 맞춰주는 몇 없는 곳이기도 했다. 사장님은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 김밥을 먹게 해 주셨다. 2개는 먹어야 배가 불렀지만 괜히 눈치가 보여서 1개만 먹었다. 하루가 지난 것도 아니고 한 시간만 지나도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삼각 김밥이 고마웠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생긴 게 왜 태어났니.

집으로 가는 길에 혼자 흥얼거리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어디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한 존재. 왜 태어나서 다 괴롭게 하는 걸까. 없어지고 싶다. 아무도 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도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 달님, 별님, 제발요.

눈물이 푹 젖어들어 집으로 갔다. “다녀왔습니다.”라고 힘없이 인사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서 씻기 시작했다.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푹 숙이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몸을 닦았다. 왠지 모르게 몸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울어서 눈이 좀 이상해졌다 고 생각했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밝은 아침처럼 마음도 밝아진 기분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아보자고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화장실로 가서 얼굴을 먼저 보는데 지영이는 너무 놀라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지영이의 얼굴 뒤에 있는 화장실 벽면이 얼굴과 함께 보였다. 옷을 홀딱 벗어보았다. 어제 봤던 빛이 통하는 느낌이 생각났다.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이 되었던 것은 어제보다 더 투명해졌다는 것이다. 지영이의 몸이 투명해진 만큼 기억도 또렷하지 않았다.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지영이의 몸이 투명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옷을 입고 화장실을 나왔다. 가족들은 모두 각자의 아침을 준비하느라 지영이를 보지 못했다. 지영이는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지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빠르게 머리를 써보려고 했지만 감정만 더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없어져도 아무도 슬프지 않겠지. 아마도 주말에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내가 없어진걸 제일 먼저 알지 않을까. 편의점 사장님이 신고라도 해주시려나. 엄마, 아빠와 동생이 슬퍼하기는 할까. 내 동기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놀라기는 할까.

지영이는 무서웠다. 이불속에 숨었다. 이불속에서도 점점 투명해지는 몸의 변화를 계속 볼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사라지더라도 이불속에서 사라져야 할까. 그게 내 마지막이라면 내 영혼은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일까. 내가 완전히 투명해져서 사라지는 것이 내 마지막이라면 달님과 별님은 보고 사라지고 싶다. 이상하게 배도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다.

빌라 사람들이 출근하고 등교하러 나가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도 지영이가 홀로 이불속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도 지영이는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끔찍하게 보일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일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힘이 없었다. 동기들에게 부재중 전화와 문자 몇 통이 와있었다. 핸드폰을 집어 들기위해 손을 뻗는 순간, 지영이는 너무 깜짝 놀랐다. 몸의 형체만 약간 보일뿐, 입은 옷이 아니었으면 내 몸이 어딘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투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지영이는 조용히 옷을 모두 벗었다. 속옷까지 모조리.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코와 입으로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온몸으로 호흡했고 공기가 더욱 예민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나갔다. 방문을 열어서 거실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천천히 옥상으로 걸어 올라갔다. 옥상 문을 열어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지영이가 좋아하는 붉은 노을이었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물은 바닥에 똑똑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사라졌다. 까만 밤을 꼭 만나고 싶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장을 보고 두 손 가득 비닐봉지를 들고 오는 소리, 친구와 통화를 하며 들어오는 목소리, 주차하는 소리, 화장실이 가고 싶은지 뛰어들어오는 소리. 웃음이 났다. 소리를 듣다 보니 밤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밥 짓는 소리가 들려왔고 하하 호호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영이는 생각했다. 내가 원래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내일도 변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문득, 노을빛이 지영이의 손끝에 닿아 있었다. 그 빛이 따뜻했다. 누군가는 오늘 저녁 그 노을을 바라보겠지. 누군가는 달님을, 별님을 올려다보겠지. 그들의 눈에도 이 빛이 닿는다면, 그건 내가 아주 조금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달님, 별님, 고마워요.” 지영이는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세상은 잠시 조용했고, 그 조용한 공기 속에서 지영이의 이름을 품고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