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45)
[일러두기] 이 글에서 '다'처럼 붉고 굵게 쓴 글자는 아래아(•)를 홀소리로 썼음을 나타낸다.
서기 660년 7월에 신라군은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과 황산벌에서 마주한다. 이때 신라군 좌장군인 품일은 열여섯 난 아들 관창에게 오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본보기가 되라고 한다. 이에 관창은 홀로 말을 몰아 적진에 달려들어 싸우다 곧 백제군에게 사로잡힌다. 계백은 어린 소년임을 알고 놓아주지만 곧장 백제군에게 다시 달려들자 목을 베어 돌려 보낸다. ≪삼국사기≫ <관창>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치열한 역사의 현장이 바로 ‘황산벌’이다. 누를 황(黃), 뫼 산(山)으로 쓰고, 5천 백제군과 5만 신라군이 맞선 전쟁터이니 온통 황토빛으로 붉은 벌이나 누런 빛으로 물든 들로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연산현’ 편에서 “황산은 일명 ‘천호산’이라고 하는데, 현 동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썼다. 다시 말해 황산은 계룡산 줄기가 느릿하게 뻗어 나온 끝자락인 ‘천호산’을 가리키는 산 이름이다. 그리고 황산벌은 황산 끝자락에 있는 벌판이라서 붙은 이름인 셈이다. 오늘날 연산면 연산리와 관동리 일대다.
≪삼국사기≫에, “황산군(黃山郡)은 본래 백제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연산현(連山縣)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때 ‘황등야산=황산=연산’과 같은 대응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황등야산’은 본디 배달말로 뭐라고 했을까.
황(黃)과 산(山)은 내남없이 아는 말이니 두고, ‘등야(等也)’를 먼저 보자. 옛 땅이름에서 등(等)은 ‘달’로 읽고, 야(也)는 ‘ㅏ’를 적을 요량으로 붙인 홀소리로 보면 ‘등야’는 ‘다라’나 ‘달(달)’로 뒤쳐볼 수 있다. ‘달’은 ‘산’를 가리키고 ‘산’의 옛말은 ‘뫼’다. 이렇게 보면 ‘황등야’는 ‘누르달(누르뫼), 눌달(눌뫼), 늘달(늘뫼), 느르달(느르뫼), 는달(는뫼)’을 적은 셈이다. 그리고 그 땅이 산임을 온전히 드러내려고 ‘산(山)’을 덧붙여 ‘황등야산’이 된다. <조선지형도>(1917)을 보면 천호산(=황산)은 해발고도 352미터로 야트막한 산으로 산줄기라 길게 늘어지면서 들에 닿는 끝자락이다. 자연스런 귀결로 늘어진 뫼(산)로 보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황산은 고려 때에 이르러 연산(連山)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늘어진 산’을 ‘이어진 산’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줄기가 ‘늘어졌다’는 말은 산줄기가 죽 ‘이어졌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연산’은 ‘논산’이 된다. 논산은 ‘논미’에서 온 말로 말밑을 거슬러 가면 ‘늘뫼’가 ‘늘미, 는미, 논미’처럼 바뀌왔음을 누구라도 어렵잖게 알 수 있다.
길게 말했지만, 정선 땅에도 ‘늘어진 땅’으로 보고 지어낸 땅이름들이 적지 않다. 느랏, 느티골, 늦둔(너툰이재/느툰이재), 늘목이(는목), 늑평, 늑등산이 모두 ‘늘어진’ 땅 모양으로 해서 생겨났다.
느랏은 임계면 반천리 산성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골지천이 크게 휘돌면서 마을 지형이 북서에서 남동으로 길게 늘어진 형태다. ≪조선지지자료≫(1911)에는 ‘於田里 느랏’으로 나오며, <조선지형도>에도 늘 어(於) 자, 밭 전(田) 자를 써서 ‘어전리’라고 했다. ≪정선 임계면 지명유래≫(임계면, 2011, 327쪽)에, “‘느랏’은 지형으로 볼 때 ‘넓거나 길게 늘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나온다.
‘느티골’은 정선읍 귤암리 새덕골 어귀에서 달개골 쪽으로 올라가다가 왼쪽 웃만지산으로 난 긴 골짜기를 말한다. ≪정선읍 지명유래≫(정선읍, 2012, 338쪽)에 “‘늦둔골’에서 온 말로 ‘완만하게 늘어져 안쪽으로 들어간 골짜기’라는 뜻이다. ‘느티’는 ‘늦둔’이 변한 말로 ‘늦’은 ‘늘’이 ‘느르’로 변해 생긴 말”이라고 풀어놨다. 다만 ‘티’는 “‘둠’이 ‘둔’, ‘툰’으로 변해 생긴 말”로 보았지만 고개를 뜻하는 ‘티’에서 온 말로 보아 ‘늘티’나 ‘늦티’가 ‘느티’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느티골은 느티로 오르는 골로 볼 수 있다.
‘너툰이재’는 정선읍 북실리 샛말에서 남면 광덕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정선읍 지명유래≫(정선읍, 2012, 112쪽)엔 “산 위쪽에 완만하게 늘어진 곳”이라고 해서 ‘늦둔’이라고 했고, ‘늦두이→ 느투이→ 너투이’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때 ‘투이’는 ‘둠’이 ‘둔’, ‘툰’으로 바뀐 말로 보았다.
‘늘목이’는 ‘는목’이라고도 하며, 임계면 임계리 명소동 북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정선 임계면 지명유래≫(임계면, 2011, 155쪽)엔 “산자락이 길게 늘어진 곳의 목이 진 곳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느르’나 ‘늘’이 ‘늑’으로 소리 바꿈하여 나타나기도 하는데, 정선읍 회동리 납덕골 서쪽에 ‘늑평’ 마을은 “골짜기 안의 산 능선이 넓게 펼쳐져 ‘느평’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변해 ‘늑평’이 되었다. ‘느’는 ‘늘어진’을 뜻하는 ‘느르’에서 온 말”(정선읍 지명유래, 정선읍, 2012, 246쪽)을 보았다. 다만 “늑평을 ‘굴안’, ‘구릉’이라고 했는데, 이 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勒坪’이라 하기도 한다.”는 뒷말에서 보듯 ‘늘어진 들’로 볼지 ‘골짜기’로 볼지 의견이 엇갈리기도 한다. ‘늑평’의 본디 이름은 ‘구단’인데, ‘구단’은 굴짜기 안을 뜻하는 ‘굴안’에서 온 말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
느랏에서 느티골, 너툰이재, 늑평에 이르기까지 이 글에서 살핀 여러 땅이름은 ‘늘어진’ 땅을 이름에 담고자 한 옛사람 마음이 느껴진다. 산줄기가 길게 늘어지고, 골짜기와 들이 느릿하게 이어지는 모양새를 ‘늘, 느르, 늦, 늑, 넉, 너’와 같은 말소리로 적었다. 한자로 쓴 땅이름에 가려졌지만, 땅을 먼저 읽어 낸 밑바탕에는 언제나 배달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