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8)
[일러두기] 이 글에서 밑금 그은 붉은 글자는 옛 배달말 적기에서 쓰던 아래아(.)가 든 글자다.
땅이름을 비롯한 땅이름에는 그 지역 사람들 삶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표준어로는 나타낼 수 없는 지역 특성과 살아온 역사와 문화, 감정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내가 학교 다닐 적에 지역 땅이름과 관련지어 석회암 지대 특성을 알려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저 석회석이 흔한 곳이라서 시멘트산업이 발달했다고만 배웠지 돌리네나 우발라, 폴리에, 라피에, 테라로사, 건천, 용천(물내기) 같은 지리 용어와 땅이름과 관련지어 말해주는 교사가 없었다는 건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고 다르진 않다. 말로는 지역교육과정을 말하지만 지역 말과 문화와 역사와 삶을 배반하는 교육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난다.
다음은 ≪역주 석보상절≫제21(1446)의 한 부분이다.
오늘날 말로 뒤치면 “수미산 아래 바다 가운데 눈 하나인 거북이와 구멍이 하나 있는 나무가 있으니 그 거북이가 나무의 구멍을 얻어야 잠기지 않지만 그 나무가 수미산을 흘러 감돌아 삼천년에야 한 번을 만나니라. 한 눈으로 한 구멍에 가는 것이 지극히 어려우니 부처 법 만나는 일의 어려움이 이와 같다 하니"처럼 되려나. 암튼 여기서 ‘구무, 구ᇚ(굼글), 굼긔’는 구멍을 뜻하는 옛말이다. 동해․삼척 말에는 구녕, 귀녕, 궁기, 궁게이, 구미, 구녁, 궁겡이 따위로 나타난다. 땅이름에서 흔히 보는 ‘굼’도 ‘구ᇚ’을 뿌리말로 볼 수 있다. 갈밭굼, 달밭굼, 묵밭굼, 삼밭굼, 잿밭굼, 항게피밭굼, 부친논굼, 억철이묘굼, 절터굼, 산딸나무굼, 갈나무굼, 사시나무굼, 대숲굼, 고래굼, 고레장굼, 괴굼, 통사리굼, 틀집굼, 검은굼……. ‘굼’은 동해 지역 땅이름 곳곳에 나타난다. 굼만 아니라 파수굼이, 가매굼이, 구슬구미, 쇠구미, 꾀꾸미, 닥바꿈, 뼁꿈(뼝꿈) 같은 꼴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배달말사전에선 뜻을 찾을 수 없고 <우리말샘>에서 “‘구멍’의 방언(경남)”으로 아주 성의 없이 말해놓았다.
땅 생김새로 보면 '굼'은 둘레보다 우묵하니 꺼진 땅이나 골 사이로 쑥 들어간 자리, 굴 따위를 가리킨다. 무엇보다 동해나 삼척 지역이 석회암 지대라서 석회암이 녹으면서 땅이 둥그렇게 꺼지는데 크기도 깊이도 제각각이다. 이런 데를 학교 교육에서는 ‘돌리네(doline)’라고 가르치고 배우지만, 지역 사람들은 ‘굼, 구미, 웅덩이, 구덩이, 구데이, 구디이, 구덕’이라고 했다. 그리고 ‘굼’(구무)에서 ‘ㄱ’이 떨어지면 ‘움’이 되는데, 움을 파고 지은 집이 바로 움집이다.
석회암 지대에서 독특하게 생겨나는 땅 생김새를 가리켜 카르스트(karst) 지형이라고 한다. 크로아티아 카르스트 지역 이름에서 따왔다. 석회(탄산칼슘)가 빗물에 씻겨 녹는 반면 철, 알루미늄, 규산, 점토 따위는 녹지 않고 남아 흙빛이 시뻘건데 이런 흙을 ‘테라로사’라고 한다. 테라로사가 빗물에 잘 씻겨 흘러 내린 비탈에서는 석회암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평평한 땅에서는 테라로사가 두껍게 쌓인다. 석회암이 많은 땅은 거칠다고 오해하는데 테라로사가 많은 땅에서는 오히려 어떤 풀이고 나무고 잘 자란다. 테라로사 사이로 빗물이나 지하수에 녹은 석회암이 그대로 땅거죽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을 ‘라피에(lapiė)’라고 한다. 테라로사 아래에 있는 석회암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보다 빨리 녹는데 바닷가 마을인 추암에 가면 라피에가 잘 보인다. 바닷물이 들이치면서 테라로사가 씻겨나가면서 바위가 그대로 드러난다.
카르스트 지형에서 가장 흔한 게 ‘돌리네’다. 석회암이 녹으면서 둥그렇게 깔대기 모양으로 땅이 우묵하게 꺼지는데 크기도 깊이도 다 다르다. 돌리네는 빗물을 모아 땅 밑으로 흘려보내는 구실을 한다. 돌리네는 우리 눈에는 굼이다. 굼 한가운데는 둘레에서 쓸려 내려온 흙이 두껍게 쌓여 보이지 않지만 땅속으로 물길이 나 있다. 그래서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물이 땅에 고이지 않고 흔적 없이 쑥 빠진다. 이렇게 땅속으로 스며든 물은 땅속에 있는 석회암을 녹여 동굴을 키운다. 삼척 대이리 동굴, 영월 고씨굴, 삼척 초당굴, 평창 백룡굴이 모두 석회동굴이며, 동해시 도심에 있는 천곡동굴도 석회동굴이다. 천곡동굴은 1991년 아파트를 짓고 4차선 도로를 내면서 우연히 발견했다. 굴 어귀가 좁고 어두워 보잘것없다고 여겼는데 들어갈수록 넓고 깊었다. 1400미터에 이르는 수평동굴로 천장에 난 물길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길다. 천곡동굴이 있는 산등에 오르면 돌리네가 다섯 군데나 있다. 석회동굴은 물이 흐르면서 자꾸 커진다. 이런 곳에서는 물이 내를 이루어 흐르지 않고 뜬금없이 샘으로 솟아나기도 한다. 찬물내기나 약물내기 같은 땅이름은 이렇게 생겨났다. 다만 샘으로 솟아나는 자리를 '~내기'라고 한다면 거꾸로 물이 감쪽같이 스며드는 자리를 가리키는 말도 분명 있을 텐데 아직 찾지 못했다.
동해시 곳곳에 '돌리네'라고 할 만한 굼들이 동해시 곳곳에 있다. 당장에 천곡황금박쥐동굴이 있는 산등선(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동굴로 50)에 오르면 돌리네를 쉽게 볼 수 있다. 동굴과 돌리네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매우 희귀한 보기다. ≪조선지형도≫(1907~1919)에도 굼이라고 할 돌리네가 보인다.
어디 그뿐이랴. 땅이름들도 동해시가 석회암 지대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가매굼’(가매구미)은 시청 뒤편 천곡성당이 있는 자리. 석회암 지대라서 움푹 파인 웅덩이가 “가마처럼 둥그렇게”(동해시 지명지, 120쪽)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고래굼’은 감추 남쪽에 있는 깊은 소다. 고래가 자주 나타나기도 해서 ‘고래굼’이라고 한다. ‘뱃굼’은 용정동 무당바위 아래쪽 바닷가에 있는 포구를 말한다.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하고 수심이 깊은 곳”(313쪽)이다. 달밭굼은 비천동 뒷골 위쪽에 있는 우묵한 터를 가리킨다. ≪동해시 지명지≫ 147쪽에서 “산딸기가 많이 나서 생긴 이름”으로도 보았지만 ‘달밭’은 산딸기를 뜻하는 ‘딸’이 아니라 산을 뜻하는 ‘달’로 봐야 한다. 달밭은 달리 말하면 높은 데 있는 산밭이다. 한편 ≪동해시사≫에 구호동에 있는 ‘달밭굼’을 “작은 요과골에서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산줄기로 이곳에 억새처럼 생긴 ‘달’이라는 풀이 많아서 생긴 이름”(535쪽)으로 설명한 대목이 있는데 썩 믿을 만한 말이 못 된다. 볏과에 드는 풀로 억새와 닮은 달이라는 풀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산등성이에 우묵하니 꺼진 땅이라고 해서 ‘달밭굼’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내기 석회암 지대에서는 멀쩡히 흐르던 물길이 갑자기 산자락이나 바위 아래, 밭 가운데서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하고 뜬금없는 자리에서 물이 문득 솟기도 한다. 이렇게 물이 솟아난다고 해서 배운 사람들은 ‘용천’이라고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물내기’라고 한다.
굼 석회암 지대에서 우묵하게 꺼진 땅인 돌리네를 가리켜 ‘굼’이라고 하지만, 지역에 따라 쓰는 말이 조금씩 다르다. 평창에서는 ‘구단’, 삼척에서는 ‘움밭’(溝田), 충북 단양에서는 ‘못밭’(池田)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