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무게, 영화 후기
말들이 범람하는 시대. 영상, 음원, 텍스트 등 온갖 컨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단어들은 곧잘 원래보다 가벼운 무게로 다가옵니다. 사랑 노래는 한없이 흔해지고 영화 속 죽음들은 종이에 벤 생채기처럼 무감해졌습니다. 물론 희망도 예외는 아니라, 광고를 듣고 있자면 희망이란 것이 금방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당도 할 것처럼 가까이 느껴지곤 하죠. 하지만 본디 희망이란 원래 무겁고 비싸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멀리서도 반짝이는 빛을 끈질기게 발하는 것이고요.
영화는 195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합니다. 두 번의 전쟁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전쟁이 남긴 혼란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으러 헤매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오래전 역사를 답습하여 왕정을 되찾고자 하고, 다른 이들은 그 모든 것이 지나갔다 말하며, 어떤 이들은 발언권도 갖지 못한채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델리아도 입이 막힌 중년의 여성입니다. 전쟁이 끝났으나 집안에는 아직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거든요. 손버릇 나쁜 남편이 두 번의 출전을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죠. 어느 정도로 나쁘냐 하면, 아내가 자신보다 늦게 눈을 뜨는 것이 기분나빠 뺨을 올려 붙이고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니까요.
영화는 시종일관 답답하고 암담합니다. 밤낮없이 아들 둘과 시아버지, 고약한 남편의 시중을 들고 없는 살림을 꾸려가는 것도 힘든데. 장녀인 마르첼라가 무사히 애인과 결혼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자신을 꼭 빼닮아 아름답고 똑똑하지만 중학교에 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마르첼라는 진작부터 세탁소에 나가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멸시하는 아버지와 고마움을 모르는 남동생들을 겨우 참아내며, 집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인 결혼만을 바라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델리아는 없는 살림에도 마르첼라의 웨딩드레스 만큼은 새것으로 맞추어 주고 싶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아침엔 수선집에 가 소일거리를 받아오고, 그 뒤엔 환자들을 방문해 주사를 놓아주며, 오후엔 부잣집 빨래를 하거나 우산 수리점에 가 고장난 우산들을 고쳐줍니다. 변변찮은 직업도 없이 도굴을 일이랍시고 일삼는 남편이 당연하다는 듯 돈을 몽땅 빼앗아 가기 전에, 야금야금 떼어다 돈을 모으지요.
간절한 마음이 통한걸까요. 마르첼라는 부자인 남자친구에게 프로포즈 받는데 성공합니다. 이탈리아 전통에 따라 당장 다음 주말에는 그 집 식구들과 집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데요. 동생들은 욕을 하며 뛰어 다니고, 할아버지는 제 시중을 제대로 들지 않는다고 고함을 지르며, 아빠는 익숙한 모습으로 델리아를 종처럼 부리는. 이 망할 놈의 집구석에서 무사히 상견례를 치를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마르첼라의 결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대단하고 벅차오르죠. 사실 이 모든 여정은 델리아 이름으로 도착한 편지 한통에서 시작합니다. “내게 편지가 올 일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편지가 왔단 말이에요?” 라며 펼쳐본 종이에는 놀라운 소식이 적혀있습니다. 델리아는 건물 관리인에게 ‘남편에겐 비밀로 해달라’하고는 몇 번이고 그 종이를 접었다 펴길 반복하죠. ‘아니야, 말도 안돼.’ 라고 생각하며 접어두었던 종이는 작은 불씨가 되어 델리아의 가슴 안에 번져나가고, 밝은 불길이 되어 많은 것을 바꾸는 데 성공합니다.
(여기서부터 스포!)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델리아가 이룬 게 무엇이냐’고요.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델리아가 바꾸어 낸 것은 혁명도, 도망도, 복수도 아닙니다. 작고 힘없는 중년 여성의 작은 발버둥일 뿐이죠. 실제로 델리아가 이룬 일의 목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구멍난 블라우스 대신 새 옷을 산 것
2. 벌써부터 제 딸의 화장과 행실을 운운하던 남자친구네 사업(카페)을 박살내버린 것
(이건 사실 좀 대단하죠!)
3. 마침내 투표를 하는데 성공한 것
4. 웨딩드레스 값으로 모아놨던 돈을 마르첼라에게 전해주며 ‘이 돈으로 학교에 가’라는 쪽지를 남긴 것
이중 4번은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바람인지도 불투명하건만. 우리는 그럼에도 내일을 기대하게 됩니다. 3번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힘겨운 것인지를 알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여러 장치를 사용해 관객들을 보기 좋게 속여 넘깁니다. 미국 군인을 우연히 도와주게 되었을 때는 ‘나중에 저 사람이 이 지독한 폭력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나’ 싶고, 옛 소꿉친구가 너와 결혼하고 싶었다고 말할 때에는 ‘남편 대신 저 사람과 여길 떠나려나 보다’ 싶고, 갑작스러운 시아버지의 죽음에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렇게 사랑의 도피는 글렀으니, 홀로 떠나려나 보다’ 기대하게 만들죠.
하지만 주인공은 보란 듯이 다른 선택을 보여줍니다. 남편 몰래 거듭해서 확인해보던 종이란 ‘함께 북쪽으로 떠나자’는 소꿉친구의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델리아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임을 알려주는 통지서였죠. 시아버지의 죽음을 못본채 하고서라도 가야 하는 곳, 새옷을 챙겨 입고 아주 오랜만에 립스틱을 꺼내어 바르게 만드는 곳. 어떻게 해서든, 거짓말을 이어붙여 가면서라도 도착해야 하는 곳. 목소리 없는 자들이 입을 벌리지 않고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게 하는 장소. 수많은 여성들이 손꼽아 기다린 오늘. 이탈리아 여성들의 첫 투표일.
이 모든 일들은 딸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벌어집니다.
전쟁에 예민해진 탓이라며 습관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제 며느리의 엉덩이를 더듬고 ‘아내는 가끔 때려야 버릇이 잘 든다’는 시아버지, 그런 어른들을 꼭 닮아 입이 걸고 제멋대로 구는 아들들. 델리아는 정말 잘못된 결혼 때문에 이런 결과를 얻었을까요? 딱잘라 말하기엔 시대가 잔인합니다. 폭력은 가족 안의 일일 뿐 나서려 하는 이가 없고, 딸들을 중학교에 보내는 부잣집에서도 여성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터부시 됩니다. 정도와 깊이의 차이일뿐, 사회는 구조적으로 여성의 삶을 남성들을 존속시키는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델리아는 현실에서 도망치거나 외부의 힘을 빌려와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냅니다. 다른 남자를 선택하는 대신 투표용지를 들었죠. 당연히 종이가 남자의 쪽지일거라 생각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속아넘어갔음을, 아직도 제 안에 ‘외부의 구원자 남성이 손내밀어 여성을 구해주는’서사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델리아를 도와주고 이해해주는, 진실로 손을 내밀고 공명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임을 지켜봤음에도 말이에요.
델리아가 마르첼라에게 보여준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최선입니다. 우리에겐 아직 내일이 있다고, 너와 나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고 전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동입니다. 싫은 말을 들을 걸 알면서도 시아버지의 말에 대꾸를 하고, 충분하지 않을지라도 최선을 다해 상견레 자리에 필요한 음식을 마련하고, 돈을 갈취하는 남편을 피해 웨딩드레스 값을 모으던 모든 시간과 노력을 '오늘'이 아닌 ‘내일’의 몫으로 남기는 순간부터 가능해졌죠.
연인의 터무니 없는 질투 때문에 립스틱을 지우는 대신, 투표용지에 침을 바르기 위해 립스틱을 지울 수 있다고. 새로운 내일을 그릴 때에 새 연인을 찾아 도망가는 대신, 이곳에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투표할 수 있다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마르첼라에게 건낸 돈은 웨딩드레스가 아닌 학비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시대에는 한계가 있고, 개인은 결코 시대를 넘어 설 수 없으며, 역사는 거듭해서 시대를 다시 평가하고 창조해 낼 겁니다. 우리는 비록 힘없는 개인이며 낡고 지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 자꾸 맥없이 지쳐버리고 맙니다만, 그 시절과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과연 사람들입니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가끔 ‘채식주의자’를 두고 볼멘소리를 해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충분히 재미있고 의미있는 소설이나, 불필요한 성적묘사가 많고 한계도 느껴진다고요. 저는 그저 기쁘고 벅차올라 ‘다들 즐기기나 했으면’하는 상태였고 그래서 판단을 유보중이었는데. 우연히 얼마 뒤에 50대 여성 작가님과 대화를 나누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상 가능한 말입니다만,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이해하려면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새롭지도, 낯설지도 않은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이 그 당시에 가졌던 무게가 얼마나 크고 파괴력이 있었는지. 한강 작가님이 데뷔했던 90년대와 소설이 발표된 2007년을 이해해야 그 의미가 와닿는다는 거죠. 강화길, 최은영, 김금희, 김애란, 정세랑, 김숨…. 오늘날에는 활발하게 쓰이는 이야기가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 여성이 여성을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시절을 겪은 사람들이 받은 충격과 지금의 독자가 받는 감상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고. 사실 요즘 독자들은 그렇게 느끼는 게 맞다는 설명에 얼떨떨해져서 한참을 그 대화 속에 멈춰있었습니다.
호주제가 당연하며, 낙태는 여성의 죄이고, 성폭력을 당해도 피해자가 고소해야만 처벌할 수 있었던 시절. 저도 그 시대를 살았고 그것이 그다지 먼 과거가 아님을 잠시 떠올려봅니다.
당시의 최선과 희망이 오늘에 닿았기에, 독자들은 여성들의 서사를 마음껏 탐독하고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도 아쉬움을 느낍니다. 관객들은 델리아가 이루어낸 성과를 보고서도 고작 저것을 이루어 낸 것일까 궁리합니다. 아직 도망을 치는데 성공한 것도 아니고, 남편에게 통쾌하게 복수하지도 못했으며, 딸을 확실히 학교에 입학시킨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요. 멀게만 느껴졌던 바람이 이제 와 햇살이나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서 만들어 냈던 과거가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거대한 진실이.
델리아가 투표함에 넣은 용지는 고작 한표이나 의미는 겨우 그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그르친 것 같던 순간 ‘아니야. 우리한테는 아직 내일이 있어’라고 말하며 빛내던 눈. 매일 같이 좌절하고, 누구보다 시대에 휘말리며, 수없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결코 꺼뜨리지 않은 희망. 이 모든 일들에 끝이 있을까 지치는 날들에, 어리석은 다툼과 소모되는 매일에 내가 휙 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내일’을 외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강력한 목소리가 되어 울림을 가집니다. 특히 저처럼 지쳐있던 직장인에게는. 모든게 피곤하고 힘겨워서 다 잊어버리고 내 삶이나 살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는 소시민에게는 더 그랬습니다.
희망은 원래 어깨가 휘청일만큼 무거우며, 결코 만만찮은 값을 치러야 함을. 그러나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임을. 그동안 깜빡했던 사실들을 다시 일깨워주는 시간이었습니다. ‘내일’이 델리아의 입을 통해 나오던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도 행복하게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춰지던 마지막까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을 등불 삼아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봐야겠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우리의 시대와 지금의 희망을 ‘겨우 저 정도’라고 평가할 수 있도록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