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크림파스타
결혼 10년 차에 유럽으로 한 달간 여행을 다녀왔다. 두 아들은 여동생네 맡기고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다녀온 것이다.
성인이 된 아들은, 어떻게 어린 자식들을 두고 엄마아빠만 여행을 갈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부모가 되어보니 자식을 위해 해외여행을 함께 가고 싶단다. 그런데 그 좋은 기회에 왜 자식을 데려가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여행을 위해 500만 원 대출받았어. 그리고 5년을 갚았다. 너희를 무슨 수로 데려가겠니?
그건 우리의 늦은 신혼여행이었어.
우리를 데려갔으면 1000만 원을 대출받아야 했겠네요.
아들은 급히 수긍했다. 아들도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늘 체험하며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은 그 후로 그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남편이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끝내고 영국으로 학비와 기숙사비 그리고 용돈까지 주는 장학금으로 1년간 유학을 갔다.
유학으로 인해 우리는 결혼 이후 처음 떨어져 살게 된 것이다. 남편은 이 별거를 힘들어했다. 매일 전화해서 보고 싶다면서 하루 일과를 보고했다.
1995년 당시는 국제전화요금이 비쌌다. 지금은 카카오톡으로 무료전화를 하지만, 그땐 돈을 많이 지불해야 했다. 카카오톡이 당시에 있었다면 나는 매일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가죽 가방을 샀는데 잘못 산거 같다. 얼마를 주고 샀는데, 아무래도 값이 싼 것을 샀더니 어디가 어떻다.
끊을 줄 모르는 전화를 듣고 있던 나의 막내 여동생이 큰소리로 말했다.
전화 걸 돈으로 새로 사라 그래!
없는 살림에 전화요금이 10만 원이 더 나갔다.
남편은 매일 밤 9시에 전화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비용은 다 내가 내야 한다. 목소리라도 듣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단다.
나는 영국의 대학교 기숙사 메뉴까지 들어야 했고,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과 교수님들의 습관까지 들었다.
집에서 가져간 여윳돈과 대학에서 주는 몇 달치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겨울방학에 맞춰 유럽 9개국 여행상품 티켓을 두 장 끊었다고 신나서 또 전화를 했다. 싼 것이라 전세버스, 배 등의 이동과 호텔, 입장료, 조식만 포함되었다. 저녁은 가끔 준다. 점심과 저녁을 대부분 우리가 해결해야 하니 돈을 좀 가져오라고 했다. 그래서 왕복비행기표와 여행비용을 위해 대출까지 한 것이다.
영국 여행사에서 진행하는 패키지여행은 이태리 출신 가이드가 영어로 진행했다. 나는 한국에서 우리가 갈 여행국들 여행안내서를 모두 사갔다. 영국, 벨기에, 로마, 이태리, 독일,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오스트리아를 여행했고 책은 6권 정도 주요 방문지만 샀다.
주요 도시인 파리, 베네치아 등은 자유여행이었다. 지도를 보면서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하고, 하루 종일 걷는 여행이었다. 7살 10살 아들을 데리고 다니기엔 너무 힘든 일정이다. 남편과 한국인 여행객들의 가이드는 한국어 여행안내서를 읽으며 내가 맡았다. 다국적 여행객 30여 명이 함께 다녔는데. 그중 한국인은 우리 포함 9명이었다.
옵션으로 하는 여행지가 많았는데 비용이 높았다. 우리는 거의 빠졌다. 그래서 버스 주변을 여행하거나, 안내자 없이 모험하며 자유여행을 했다. 폼페이도 옵션이었는데, 둘이서 자유여행을 한 덕분에 더 기억에 남는다. 다만 그들이 보여줄 주요 지역은 찾지 못해 아쉬웠다.
나는 7년 차 교사의 박봉으로 집 대출금과 생활비, 교육비까지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시댁이나 친정의 경조사와 명절, 생신선물은 큰돈이 아니라도 우리에겐 버거웠다.
그러니 아이들을 데려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또 너무 어려서 가는 유럽 여행은 도움이 안 된다고 변명했다.
같은 여행팀에 7살 아들을 데리고 온 부부가 있었는데, 늘 비슷한 성당과, 박물관만 돌아다니니 아이는 참으로 힘들어했다. 아이는 잠시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계룡산으로 갔다.
평생 처음 모텔을 가봤다. 당시에 난 호텔과 모텔을 구분하지 못했다. 2만 원을 주고 하루만 묵었다. 나중에 보니 내가 잔 곳은 호텔이 아니었다.
구두를 신고 계룡사로 가는데 새 구두에 흠집이 날까 조심해야 했다. 운동화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가볍게 산책하고 신혼여행은 끝이었다.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신혼여행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고,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물어볼 지인이 없었다.
빈민가의 장남과 장녀의 대학생 결혼은 그럴 수밖에 없다.
남편이 도저히 1년을 참을 수 없다면서 영국으로 오라고 하고, 여행을 하자고 하여서 나는 진짜 신혼여행을 하는구나 했다.
유럽 9개국, 16일 패키지여행을 하고, 또 영국의 남편 기숙사에 묵으면서 스코틀랜드 등을 다니며 30일을 채웠다. 난 유럽 10개국 해외여행을 한 것이다.
기숙사에선 더블침대가 있는 방으로 배려해 주었다. 조식은 기숙사에서 해결했고. 가끔 저녁도 먹었다. 피시 앤 칩을 먹었다. 남편은 영국음식이 정말 맛이 없다고 했었는데, 정말 맛있는 음식을 한 번도 먹지 못 했다.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이라는 셰익스피어 도시에서 먹은 수프만 맛있는 음식으로 기억되었다.
런던에서 마지막 밤을 지냈는데 런던 교외의 어떤 교회를 버스와 기차를 타고 찾아갔다. 기숙사 같은 게스트하우스였는데, 교실처럼 큰 홀에 2층 침대가 아주 여러 개가 있었다. 청소년 단체 여행에 쓰이는 곳 같았고, 우린 하루 6불을 주고 묵었다.
런던에서도 우리나라 분식점 같은 식당만 갔다. 음식이 몹시 짰는데, 허름한 영국 노동자는 음식에 소금을 한참 뿌렸다. 그 짠 음식에 소금을 치는 모습을 보며 내 인상은 찡그려졌다.
음식을 제외하고 모든 여행은 너무 좋았다. 유럽의 유명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대부분 갔고, 교과서에 나오는 명화를 다 본 것 같았다. 고흐 미술관은 늦은 시각에 방문하여 문이 닫혔다. 아쉬웠다.
교과서에 나오는 노년기 지형, 단층 등의 유럽의 지리적 특징을 확인하는 것도 좋았다. 경이로웠다.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들은 유럽의 중세사회를 짐작하게 했고, 난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 건축가에 감탄했지만, 이 성당을 짓느라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예술은 결국 그렇게 완성되고 이렇게 남아, 후손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남기는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이 나라들 주요 수입은 관광수입일 테니...
결혼식 후 10년이 지났지만, 알찬 신혼여행이었고 내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
보고 싶다면서 애써 만난 부부는 여행하는 동안에도 싸웠다.
늘 돈이 문제였다. 여행하는 동안 우린 거의 햄버거로 점심을 때웠다. 어쩌다 마트를 만나면 식빵과 땅콩버터, 과일을 샀다. 이렇게 산 것들로 점심 도시락을 종종 싸서 다녔다.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Dolomites) 산맥 한가운데 있는 최고 스키촌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에 들렀다. 2026년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다.
우리가 내린 곳은 작은 마을이었는데 점심을 먹기 위해 온 동네를 다녔다. 남편은 식당마다 들러서 메뉴판을 보고 나왔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있었지만 우린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짜증이 났다.
여긴 맥도널드 같은데 없어!
그냥 아무거나 먹으면 안 돼?
느닷없는 큰소리에 남편도 화를 냈다.
누가 맥도널드 찾는다고 그래?
그렇게 배고픈 부부는 거리에서 부부싸움을 했고, 어느 파스타집에 들어갔다.
크림파스타 1인분을 시켜서 둘이 먹었다.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파스타 중 단연 최고였다.
우리가 최고의 맛집을 찾은 것일까,
아마 눈물이 양념이 되어 그랬을 것이다. 다음 날 리아토 다리에서 먹은 파스타는 값이 싸서 각자 1인분을 먹었는데 정말 맛이 없었다.
아들이 우린 왜 안 데려갔느냐고 하는 순간,
나는 이때를 생각했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둘이 함께 먹은 1인분 크림파스타...
너희와 함께 이 슬픈 여행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단다.
그래도 미안하고 부채가 되어 자꾸 지금이라도 보상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재촉한다.
나에게 항의하던 아들은 지금 해외에 산다. 두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고 한다.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결핍들을 아들은 스스로 채우고 치유하며 좋은 부모가 되려고 최선을 다한다.
우린 각자의 수준에서 상처와 결핍을 경험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며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보통 사람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가 되겠지만,
아들의 친구들처럼 해외여행도 함께 못하고, 유학도 시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들, 며느리를 위해 유학비를 조금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