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1

바르셀로나로 떠난 가족들

by 파도타기

나이가 드니 자꾸 자식들의 말 한마디에도 눈치를 보고 뜻을 파악하려 든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들째네에 갔는데 우리 가족은 함께 여행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안 따라왔잖아. 나가자고 하면 '두 분이 다녀오세요, ' 했지.


왜 그랬어요?

며느리가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했다.


컴퓨터 게임을 할 절호의 찬스였거든. 아빠가 하루 종일 컴퓨터를 차지하고 있으니, 아빠가 나갈 기회만 엿본 거야. 그때 둘이 게임을 신나게 하는 것이지.


나는 알고 있었다. 둘째가 말하는 것은 외출이 아니라 여행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며느리 앞에서 가족여행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둘째네가 여행을 가자고 했다.

스페인으로 자유여행을 가자고 한다. 영어영문과 출신 며느리다. 패키지여행만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아들 며느리를 믿고 언어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다.

유럽 여행할 때도 하루 온전한 자유여행들만 기억에 남았다. 대단한 문화나 자연이 아니다.


파리에서는 길을 못 찾아 헤매다가 어느 노부부를 만났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남편대신 내가 '버스 스탑'을 반복하여 외쳤다. 노부부는 웃으면서 우리를 버스정류장으로 데려다주었고, 버스표도 주었다. 그 여유로운 표정과 따스함이 낯선 땅에서의 추위를 녹였다.

베네치아에서도 지도가 있는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그 좁은 길을 다녔고, 우연히 가죽시장을 만나 가방도 샀다.


여행에서 남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연히 만나는 행운 같은 것이 물에 잠기는 캐슬보다 오래 남는다.


우리는 겨울방학을 이용하고 아들네는 1년 휴가를 한꺼번에 사용해서 드디어 스페인을 간다.

회사에 입사한 지 몇 년 동안 휴가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은 일에 빠졌고 회사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밤 2시에 퇴근하기 일쑤였다.

아들내외도 처음 갖는 휴가요, 사적 여행이다.


나는 가우디 작품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보던 각진 건축이 아니다. 채도 낮은 거룩한 건물도 아닌 울퉁불퉁한 곡선으로 지은 화려한 공원과 건축물들은 충격이었다. 자유로운 선이 나에게 해방감을 선사했다. 나는 가우디에 반해서 둘째를 건축과에 보내고 싶었다.


드디어 가우디를 보러 간다는 설렘은 가슴을 마구 흔들었다. 일정을 조율하고 비행기표 4장을 내가 끊었다. 우리가 왕복 비행기표를 끊었으니 며느리는 숙박과 기타 비용을 대겠다고 했다.

바르셀로나 (Barcelona), 가우디의 도시, 스페인 여행의 절대 강자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로 선택하는 도시이다. 우리가 가는 곳도 바로 바르셀로나였다.


숙소는 우리의 패턴을 벗어났다. 우린 늘 가성비가 선택의 1 순 고려대상이다. 우리 같으면 시의 외곽에 저렴한 숙소를 잡았을 것이다. 네 사람의 8일간의 숙박비는 계산이 안된다. 2020년 1월 5일 비행기를 탔다


우리의 숙소는

카사밀라 바로 대각선 사거리 아래쪽, 일본의 유명 건축가 Toyo Ito가 물결처럼 디자인한 스테인리스 파사드의 Suites Avenue이다. 거기서 7박 8일을 보냈다. 건물이 좁아서 층마다 객실이 거의 독립적이었고, 루프탑에 올라서면 La Pedrera의 그 동화 굴뚝들이 한눈에 들어와서 매일 감탄하며 사진 찍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가우디의 세계가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3층인 것 같았고 아들네는 7층에 숙소를 얻었다. 여기서 8일간 머문다. 기적 같은 일이다. 근사한 여행이 될 것이다.

사진:by 파도타기<숙소 옥상에서 보는 카사밀라 야간전경>

그냥 바르셀로나 일주일 살기를 하는 것이다. 본전을 빼려고 관광지를 부지런히 찾아다니는 조급함도 없고. 여기 시민들처럼 산책을 하고 맛집을 찾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느릿느릿 살면 된다. 내가 꿈꾸던 여행이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해외여행 기회가 많았다. 교직원들과 주로 중국과 대만에 방학을 이용하여 갔다.

또 교장연수로 호주와 뉴질랜드도 다녀왔다. 남편도 대학에서 교직원들과 금강산도 가고 중국 등지를 다녀왔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간 해외여행은 없었다. 아들들은 자신들이 소외된 해외여행의 서운함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방어만 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남편의 해외여행은 초기 유럽 여행을 제외하고 대부분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미국여행도 연구소 프로젝트로 출장 간 김에 내 돈을 합쳐서 여행을 늘여서 했다.


온 가족이 함께 가는 해외여행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남편이 드디어 교수가 되었고 그때까지 경제는 내 몫이었다. 남편의 수입이 조금만 확보되면 아파트를 늘려서 갔고, 대출금과 아이들 교육비 외에 쓸 돈이 없었다. 그러한 정에서 오는 스트레스인지 늘 편두통에 시달렸다. 나는 잠깐이라도 행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를 핑계로 해외여행을 다녔다.


아이들은 상처를 키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국내여행이라도 좀 더 갔으면 좋았을 텐데... 남편도 나도 참 이기적 삶을 살았다.


이렇게 가족여행의 물꼬를 터주니 고맙고 미안한 마음 가득하지만, 나는 소녀 같은 감성으로 텐션을 높이고 환호하고 감격하며 아들 내외와 좋은 추억을 만들 것이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