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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터 May 07. 2024

PM 부트캠프, 파도를 견디는 일

우리를 키우는 건 8할이 멘붕이다


사수도 선배도 없는 첫 프로젝트, 울 시간도 없어 그냥 했습니다


어언 4~5년 전의 이야기. 오프라인 서비스 기반의 회사가 성장하며 드디어(?) 웹/앱 서비스가 필요해졌다. MVP니 LEAN이니 애자일이니 하는 멋들어진 관점과 방법론은 고사하고 당장 웹과 앱의 차이조차 알려줄 사람 하나 없이 담당자로 투입되었다.


문자 그대로 상사도 사수도 선배도 없는 주니어. 거기에 조직과 동료 등 여러 이해관계자의 수요와 요구사항은 어찌나 많고 또 자세한지. 그렇게 화면 설계부터 IA 설계, 주요 DB 검토, 각종 로직과 정책, 약관, QA, 일정 설계와 관리 등 낯설고 험난한 세계로 내던져졌다.


원래도 야근과 주말 업무가 잦던 조직이었기에 하루 최소 12시간 정도의 근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로 시간보다 어려웠던 건 "나도 도저히 모르겠는 일"을 결정하고 조율하고 제안하며 근거를 대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결제 플로우는 왜 이래야 하는가? 왜 이러이러한 정책이 꼭 있어야만 하는가? 이런 경우엔 이런 예외사항이 생기는데 이때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동료가 때론 깐깐한 고객이자 엄격한 심판 같았다.


알려줄 사람도 대신 결정해 줄 사람도 없지만 쏟아져오는 문의와 요청, 그리고 다가오는 배포일. "나보고 어쩌라고!"하며 소리라도 지르거나 왈칵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하는 것뿐이었다. 울 시간도 아까웠으니까.


누구도 당신에게 완벽함을 바라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값진 경험이었다. 퇴사한 지 3년이 되어감에도 그때 합을 맞춘 백엔드 개발자분과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MVP는커녕 괴물 같은 스펙으로 만들어본 제품은 비록 포트폴리오가 되진 못하지만, 반면교사의 깨달음을 주었으니까. 신입이 얻기 어려운 복합다단한 서비스 설계의 경험은 덤이었다.


그러나 굳이 그만큼의 부담감이나 압박감을 느꼈어야만 했을까 싶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내게 완벽한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말로는 어떨지언정, 프로젝트를 통으로 맡긴 대표도 기능이나 정책을 요청한 동료도 속으론 알고 있었을 거다. 어떤 건 안될 거고, 어떤 건 보기만 멀쩡 할 테고, 어떤 건 늦어질 거란 걸. 완벽을 기대한 건, 압박감과 좌절감을 자초한 건 어쩌면 나 자신이었다.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은 게 강한 거니까


아는 것도 없이 시작한 프로젝트. 욕심 혹은 기대와 달리 엉성했던 결과물. 그럼에도 나는 그 경험을 계기로 지금은 이미 n년차 프로덕트 매니저가 되었다. (지금은 사내 직무가 조금 달라졌지만)


과정 혹은  결과가 완벽하거나 뛰어난 덕이 아니다. 그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매니저든 프로덕트 매니저든 혹은 오너든, 필연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과정을 모두 겪어보았고 그 경험을 어떻게든 모두 완주한 것.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그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회고하고, 반추하고, 학습한 것. 이제 막 이 일을 시작한 주니어에게,  프로젝트의 과실은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뛰어나거나 강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고, 한 번 살아남았다면 다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그 가능성의 증명이 공식적으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할 수 있게 한 계기였다.


우리를 키우는 건 8할이 '멘붕'이니까


어느덧 햇수로 3년째 부트캠프 수강생들에게 멘토링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기업의 요구사항을 프로젝트를 통해 해결하는 과정에서 수강생들의 문제 발굴 및 정의, 솔루션 도출 과정을 피드백하고 있다. 일정 설계부터 문제 정의, 지표 정의와 정책 등 프로젝트의 크고 작은 요소를 두고 수강생들의 걱정 섞인 물음은 끊이지 않는다. 잘하고 싶고 아무 문제 없이 완료하고 싶으니까.


아쉽게도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결코 잘할 수도, 아무 문제 없이 통과할 수도 없을 테다. 결과 역시 허술할 거다. 처음 해본 일을 처음 만나본 사람들과 하는데 과정이 순탄하고 결과가 아름다울 리 없다. 멋지게 마무리하여 크고 높은 성과를 얻었다 주장하더라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으니까. 면접관은 알고 있다. 본인 역시 그때 그즈음엔 허술했고, 엉성했고, 그럼에도 그렇지 않은 척을 하며 지금의 기회를 얻었으니까.


대신 가능성을 볼 뿐이다. 늘 새롭고 벅차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과제와 프로젝트 앞에서 지원자는 과연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그럴만한 의지를 갖고 있을까. 세차게 들이치는 파도 앞에서 물에 빠져 머리며 옷이며 흠뻑 젖어보고, 허우적거려 보기도 하고, 숨을 쉬려 고개를 내밀다가 짠물도 왈칵 들이키지만 끝내 살아남는가.


그러니 부트캠프 과정에서 스스로와 포트폴리오 프로벡트에 너무 큰 기대나 부담이 있다면 조금은 내려놓고 그냥 덤덤히 마주하고 헤쳐가보자. 우리를 키우는 건 대개 완벽한 준비나 노하우가 아닌, 멘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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