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나는 정말 행복한가?'라는 질문이 내 마음속에 비눗방울처럼 살포시 떠올랐다.
당연히 나는 행복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행복하지 않은 것도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행복은 우리가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단어일 뿐이며 그 안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그저 그것은 다른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다.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깊게 생각하는 동안 질문이 바뀌었고 문득 궁금해졌다. '이때까지 지내 오면서 나는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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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기억들이 끝없이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햇살이 내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얼마나 많은 강물들이 내 몸을 식혀 주고, 얼마나 많은 길들이 나를 인도해 주고, 얼마나 많은 시냇물이 내 곁을 흘러갔던가! 나는 파란 하늘을 얼마나 자주 올려다보았고,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만큼 얼마나 생동감이 넘쳤으며,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눈망울을 얼마나 자주 보아왔던가! 또 얼마나 많은 동물들을 사랑해 왔었나! 그런 순간들을 되새겨 보면 그것들은 다른 어느 순간보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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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다! 나는 계속 꿈을 꾼다. 아, 저 기억의 바다에서 다른 그림들이 솟구친다. 고통의 시간, 슬픔의 나날, 부끄러움과 후회로 얼룩진 기억, 실패를 경험한 순간, 죽음을 느꼈던 공포의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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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꾸듯 내게 찾아왔던 수많은 기억의 순간들을 떠올려 본다. 그렇게 많은 낮, 그렇게 많은 저녁, 그렇게 많은 시간들, 그렇게 많은 밤. 그 모든 것들은 내 인생에 10분의 1도 채우지 못한다. 다른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수천의 낮, 수천의 저녁, 수백만의 순간들은 내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다시 기억으로 돌아오지 않은 채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두 다 가 버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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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렇듯 이미 지나가 버린 날들의 쾌락을 되새기는 것은 그 맛을 다시 곱씹는 일일뿐만 아니라 행복의 모습, 그리움의 기억, 천상의 모습으로 승격한 추억들을 항상 새롭게 즐길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삶에 대한 놀라운 열정과 따스한 온기, 그리고 눈부신 햇살이 그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이 표현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날에 주어지는 선물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받아들이려고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아픔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 아무리 큰 시련이 닥쳐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할 것이다. 암울했던 날에 대한 기억도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억의 한 토막이 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 / 삶을 견디는 기쁨 중)
살아가다 보면 기억해야 하는 일을 영영 잊어 답답하거나, 잊고 싶은 일은 굳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여 괴로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살아오며 겪은 수많은 기억을 내 안에 모두 저장해 두었지만 스스로 꺼내고 보고 싶은 기억들만 골라서 꺼내볼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기억 중엔 원복 하고 싶은 흐린 기억도, 휴지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어 삭제하고 싶은 기억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의 주인이 바로 '나'임에도 마음대로 살리고, 죽일 권한이 제겐 없습니다.
아마도,
"다 지났으니 이젠 웃으며 말할 수 있네." 라며 꺼내는 기억들이 대부분 있을 것입니다. 당시엔 너무나 고통스러워 내 삶 전체를 뒤흔들었던 고통의 순간들. 하지만 지나고 나니 기뻤던 순간이 기억으로 남은 것처럼, 고통의 순간들도 이젠 그저 하나의 기억에 불과하단 걸 깨닫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때의 아픈 감각이 슬며시 함께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아픈 맛이 기억의 파도에 함께 휩쓸려 오더라도 이젠 오롯이 아프고 두렵지만은 않습니다. 끝이 없을 것 같이 영원할 것 같던 고통도 결국 끝이 났고, 그 고통은 제게 꼭 아픔만을 기억에 남기진 않았습니다. 결코 기쁨으론 얻을 수 없는 견고한 성장과 깨달음도, 헛헛한 아픔의 맛과 함께 기억 속 잔상으로 남아 저장됐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게 남아 꺼내어지는 기억들은 지극히 평범한 기억과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좋았거나, 조금이라도 더 안 좋았거나 또는 아주 행복했거나 아주 불행했던 기억들이 대부분 사라지지 않고 남은 것 같습니다.
행복했던 기억은 행복해서 좋았고,
불행했던 기억엔 성장통의 감각이 남아 있기에 더 애틋합니다.
우린 다가올 행복과 불행이 그저 다
하나의 기억으로 남을 것을 이미 압니다.
그래서 지금 아픈 것, 지금 괴로운 것들
우린 다 괜찮을 거라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