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
작년 12월, 마침내 샤넬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 이하 CD)가 정해졌다. 바로 마티유 블라지! 마티유 블라지는 라프 시몬스와 메종 마르지엘라에서 활동한 디자이너다. 2014년에는 피비 파일로 아래서 셀린느의 시니어 디자이너로 활동한 이력도 있다. CD로서 큰 명성을 쌓은 것은 다니엘 리의 뒤를 이어 보테가 베네타를 맡게 되면서 이다. 보테가 베네타 특유의 장인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브랜드에 젊음을 불어넣는 데에 성공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샤넬의 CD 자리는 약 6개월 동안 공석이었고 줄곧 누가 다음 그 자리를 이어받을지 귀추가 주목되었다. 패션지들과 유명 에디터들의 글들을 보면 패션계 유명 헤드헌터들이 '지구상의 모든 디자이너를 만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고, 그만큼 샤넬이 신중의 시중을 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한 패션 브랜드의 CD 가 그만두었다, 교체되었다는 것이 패션지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큰 이슈인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원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용어는 광고 분야에서 사용하던 개념으로 패션업계에는 1990년대에 처음 등장했다. 이전에는 CD와 유사한 역할을 하던 직책으로 아티스틱 디렉터(이하 AD)가 있었다. 대부분 패션 디자이너 출신들로 제품의 디자인이나 패션쇼 연출 방식을 결정하던 것이 주요 역할이었다. 그런데 점점 AD에게 다양한 역할이 요구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품 기획, 디자인은 물론 커뮤니케이션 방식, 심지어 모델이나 엠베서더의 선정까지. 패션 브랜드의 비주얼과 관련된 모든 것을 총괄하는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이렇듯, 오늘날의 패션 하우스 CD란 단순히 패션 아이템들을 디자인하는 수석 디자이너와 달리 패션 브랜드 고유의 감성을 기획하고 이를 상품화하는 과정까지 담당한다.
이러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업무 기틀을 잡은 것으로 알려진 것이 가장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하나로 알려진 톰 포드(Tom Ford)이다. 1994년 구찌의 디렉터 위치에 오른 톰 포드는 패션 디자인뿐 아니라 잡지에 실릴 화보 이미지까지 직접 촬영하고 오프라인 매장의 비주얼과 광고까지 총 지휘하며, 예스러운 이탈리아 브랜드로 여겨져 소위 망해가던 구찌를 젊고 겨냥한 섹시한 브랜드로 재정립하는 데에 성공했다. 톰 포드는 ‘X세대들에게는 에로티시즘이 팔린다’라며 섹시코드를 전면에 내세워 이후 10년 간 구찌 매출을 13배 넘게 끌어올렸다. 명품은 우아하고 기품 있어야 한다는 편견을 깨뜨리고 도발적이고 섹시하고 관능적이고 트렌디한 브랜드로 구찌를 리포지셔닝 한 결과였다. 이후 2006년부터 2014년까지 프리다 지아니니(Frida Giannini)가 CD를 맡아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한 구찌를 이끌었지만 매출 성장세는 지지부진했다. 그러다 알렉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가 2016년부터 구찌를 이끌면서 4-5조 원대에 머물던 매출이 13조 원까지 급상승했다. 톰포드가 X 세대를 겨낭했다면, 미켈레는 MZ 세대를 겨냥해 다시 한번 브랜드를 키우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 외에도 현재 가장 핫한 CD 중 한 명으로 다니엘 리(Daniel Lee)를 꼽을 수 있다. 원래 피비 파일로 밑에 있던 디자이너였는데 2018년 보테가 베네타 CD 자리에 올랐다. ‘보테가 그린’ 색상을 제안하고, ‘인트레치아노’ 페턴을 과감하게 확대해 장인정신과 전통을 내세우던 브랜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2021년에는 버버리 CD로 임명되었는데, 약간의 자기 복제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인트레치아노 대신 버버리의 체크를 확대하고 보테가 그린 대신 나이트 블루(Knight Blue)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인지 버버리에서의 성적은 아직까지 기대 이하이다. (더현대에서 매장 없어졌다..ㅠㅠ)
이제 패션 브랜드에서 CD의 역할은 한 브랜드의 생존에 직결될 만큼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이제 다시 샤넬로 돌아가 보자. 샤넬은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이후로 지난 40년 간 주요 직급에 해당되는 디자이너를 새롭게 고용한 적이 없었다. 그럼 칼 라거펠트의 사망 이후 지난 6월까지 CD 역할을 했던 비아드 버지니아는 뭐였나? 버지니아는 약간 권한대행 정도의 느낌이었다. 칼 라거펠트가 갑자기 사망을 했기 때문에 칼 라거펠트의 오랜 오른팔이었던 비아드가 바로 CD 자리를 이어받은 상황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5년 정도 권한 대행하다가 사실상 해고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샤넬 매출이 14조에서 20조까지 성장했기 때문에 단순히 재무 실적만 보면 그녀를 왜 잘랐을까 싶긴 하다.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샤넬을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혁신할 만한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버지니아 비아드는 칼 라거펠트의 오른팔로서 그녀의 디자이너 커리어 대부분의 시간을 칼의 스케치와 아이디어들을 보조하는 역할만을 해왔다. 그래서 그녀가 독립적인 디자이너로서 높게 평가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실제로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정리하자면, 샤넬이 버지니아를 해고하긴 했는데 40년 간 CD를 새롭게 고용해 본 적이 없으니, 두 번의 패션쇼를 CD 가 공석인 채로 진행할 만큼 굉장히 신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CD 가 공석인 채로 패션쇼가 진행됐다는 지점에서도 새로운 CD 고용이 왜 어려웠는지 엿볼 수 있다. 샤넬은 루이뷔통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패션 브랜드이고 워낙 ‘온고지신’ 브랜드라서 CD 없이도 패션쇼가 가능했던 측면이 있었을 것 같다. 칼 라거펠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샤넬을 디자인하는 것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것과 비슷하다. You just rearranged the signature tweeds, double CCs, and pearls every season" 다시 말해, 샤넬의 그 시그니처들과 실루엣들이 있는데 그것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칼은 지난 40년 동안 창의적인 변주를 통해 새로움을 보여줬다. Legacy를 지키면서도 뭔가 새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샤넬은 규모가 매우 크다. 주식회사가 아니라 정확한 재무정보를 공개하고 있진 않지만, 대략 매출이 20조 이상으로 루이뷔통 다음으로 전 세계에서 2번째로 큰 패션 브랜드다. 이러한 이유들로 몇몇 디자이너들은 CD 자리를 고사했다는 썰도 있을 정도다. 전통을 워낙 중시하고 패션 브랜드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까 이해관계자들도 많아서 젊은 디자이너들이 본인의 끼를 마음껏 발산하기 어려운 하우스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 같다.
대외적인 이미지로는 칼 라거펠트가 샤넬의 주인장 같은 느낌이었지만, 알랭 베르트하이머, 제라드 베르트하이머라는 샤넬의 공동 소유주가 있고 실무는 브루노 파블로브스키가 맞고 있는 구조다. 개인적으로 제일 인상 깊었던 인물은 샤넬 패션부문의 사장, 브루노 파블로브스키이다. 1990년부터 샤넬에서 근무했고, 2000년부터 현재까지 샤넬 패션부문의 사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실상 '샤넬 킹'이다. 두 오너의 비위를 맞추랴, 칼 라거펠트 같이 까질 한 디자이너의 요구 사항도 조율하랴, 샤넬의 실적도 끌어올리랴,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월급쟁이에게 감정이입하는 편) 모쪼록 우리 브루노 파블로브스키 아저씨가 베르트하이머 형제에게 조인트 까이지 않게, 마티유가 샤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