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34), 대약진 대실패(2)
인민공사(人民公社) 바람은 1959년 8월 상순에 마오쩌동이 허베이, 허난, 산동 등의 일부 농촌을 시찰하면서 시작되었다. 8월 9일, 마오가 산동성 당지 책임자와 대규모 합작사(大社)를 건립·운영하는 문제에 관해 논하면서, “역시 인민공사를 운영하는 게 좋다. 그것의 좋은 점은 공업, 농업, 상업, 교육, 군대를 하나로 통합해 지도하기에 편리한 것이다”라고 말했고, 이 말이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신문 매체에 보도된 후에 중국 전국에서 향(鄕)과 사(社)를 병합해 공사(公社)로 전환하는 운동이 추진되었다.
대약진 추진의 또 다른 배경에는, 마오쩌동이 당시 사회주의 진영 내, 특히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주도권 경쟁을 의식하면서 이들 국가들에게 중국식 사회주의 이행 및 발전이 소련보다 빠르게 진행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 점도 있다.
공업 분야에서도 연간 철강 생산량 지표(1070만 톤)를 실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수천만 명의 인구를 동원해 ‘전민 강철 대제련운동(全民大炼钢铁运动)’을 추진했고, 교통·체신·교육·문화·위생 등의 산업 분야에서도 대규모로 인민을 조직 동원했다.
가장 심각한 현상은 과장하고 떠벌이며 허위 보고하는 소위 ‘위성 발사’ 풍토였다. 즉, 한 생산대가 1무에서 1만 근의 식량을 생산했다고 과장 선전 위성을 발사하면, 곧 이어서 다른 생산대에서도 앞다투듯 한 단계 더 높이고 부풀려서 발표(위성 발사)했다.
농촌 출신이고 실사구시(实事求是)를 강조해 온 마오쩌동이 현지 시찰을 다니면서 이같이 황당한 허위과장 보고를 듣고도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흥분하고 기뻐하면서 관련자와 지방 간부들을 독려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정말로 믿었던 걸까, 아니면 믿고 싶었던 걸까? 그해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가 지적했듯이 “머리가 뜨거워지고 망상에 사로잡혀서”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안 된다.
허난 시핑(西平)현 핑농업사(平農業社)가 평년 평균 벼 생산량으로 1무당 2000~3000근인 밀 생산량을 7320근 생산했다고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후베이 마청(麻城)현 건국농업1사(建國農業一社)가 무당 3만 6956근, 또 광시(廣西) 환강(环江)현 홍기공사(红旗公社)가 13만 434여 근을 생산했다고 과장 보고를 하고, 기만 연출을 위한 전시용 경작지를 만들고 선전하는 식의 행태가 만연했다.
심지어는 “무우 하나의 무게가 1000근(500kg)이 넘어서 나귀 두 마리로도 끌지 못한다”, “배추 키가 어린아이 키보다 크다”라는 식의 허풍을 공공연하게 발표·선전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대표적 관변 매체인 ≪인민일보≫가 이 같은 허풍 과장 보고를 장단 맞추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는 점이다.
당시의 중국 과학계에서도 이 같은 허위과장 보고에 ‘과학적 근거’를 제공해 주는 ‘위성 논문’을 발사했다. 대표적 인물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즉 양탄(兩彈) 개발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여 ‘인민영웅 과학자’ 지위와 명성을 누리던 저명한 핵물리학자 첸쉐썬(錢學森)이다. 그가 1958년 6월 12일 자 ≪중국청년보(中国青年报)≫에 발표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토지가 인간에게 공급할 수 있는 식량 생산량이 최고점에 도달했는가? 과학적으로 계산한다면 아직도 멀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농업생산의 한계는 매년 단위 경지면적당 태양광에너지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이 태양광에너지를 농산품으로 환산한다면 현재의 생산량보다 훨씬 많이 생산할 수 있다. 당장 이 자리에서 계산해 봐도 1무의 토지에 매년 내리쬐는 태양광에너지 중 30%가 식물을 위해 이용되는 부분이다. 식물은 이러한 태양광에너지를 이용하여 공기 속의 이산화탄소와 수분을 자신의 영양분으로 만들어 공급하면서 발육·생장한다. 이 중 이용 가능한 1/5 정도를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바꾼다면 벼와 보리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현재의 연간 2000여 근 또는 3000여 근의 20여 배로까지 높일 수 있다."
후에 작가 우샤오보(吳曉波, 1968년~ )는 당시 첸쉐썬의 발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첸쉐썬의 논문은 거대한 반향을 일으켰고 전국 각지에서 더욱 큰 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과학적 논증 근거를 제공했다. 이 문장이 발표된 후에 ‘식량 위성’의 무당 생산량 보고가 수천 근에서 대번에 수만 근으로 솟아올랐다. 따라서 첸쉐썬은 응당 1958년에 발표한 그 두 편의 논문과 그로 인해 조성된 후과(後果)에 대해서 사과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언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큰 인물일수록 그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
1958년 8월, 흐루쇼프와 만난 자리에서 마오쩌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9년 중국 해방은 매우 기쁜 일이다. 단, 중국은 매우 낙후하고 가난하고 모든 게 비어 있다. 상공업의 개조와 조선전쟁에서 미국에 승리했으나 모두 유쾌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오직 대약진에 대해서만 완전하게 유쾌하다. 이 같은 속도로 발전해 간다면 중국 인민의 행복한 생활은 실현 가능하다.”
이 같은 말은 마오가 자신의 바람대로 진행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초조감 속에 자기최면과 환상으로 빠져들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그러나 객관적 경제 규율을 무시하면서 낭만적 구호만 내건다고 실현할 수 있는 건 없다. 결국 대약진은 대실패했고, 그 결과 수천만의 중국 인민들을 극도의 굶주림속에 죽어가는 상태로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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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성의 현대 중국의 이해-중국현대사: 현대 중국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중국현대사, 중국경제지리, 중국 부동산 관련 현장 지식과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 소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