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한 위로

나의 정욱이 언니

by nemo



그림을 시작한 지 2년 반이 지났다. 하지만 붓을 잡기까지는 선물 받은 물감을 1년이나 묵혀두어야 했던 ‘지체된 시간’이 있었다. 나를 위해 8만 원어치의 화구 세트를 사주며 무엇이든 시작해 보라고 응원했던 언니. 오늘 그 언니를 다시 만났다.


나보다 열 살이 많은 언니는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슬퍼하거나 원망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어른이 되어 제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던 사람. 감정의 유예 없이 곧장 삶의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언니의 시간은 늘 단단하고 엄격했을 것이다. 그런 언니가 나에게 건넨 말은 평생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내 영혼을 꿰뚫는 위로였다.


“나는 엄마가 열 살 때 돌아가셨잖아. 그런데 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엄마가 살아계신데도 사랑받지 못하는 게 정말 더 힘들었을 것 같아. 나는 아예 기대를 접고 살았지만, 너는 계속 기대를 하며 기다려왔잖아. 그것도 참 못 할 짓이야. 얼마나 힘들었겠니.”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따뜻한 위로라기보다 차라리 ‘통쾌한 위로’에 가까웠다.


그동안 나를 위로한답시고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너는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계시잖아.”

그 말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살아있으나 곁에 없고, 존재하나 사랑해주지 않는 엄마를 둔 아이의 형벌은 ‘끝나지 않는 기다림’이다. 죽음은 기대를 소멸시키지만, 부재는 기대를 고문한다. 언니는 바로 그 지점을 알아봐 준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넌 그래도 엄마가 집에 있었잖아”라는 말로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폭력적인 훈육에 시달리던 그에게 그 말은 위로가 아닌 또 다른 가해였을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이 해석한 대로 타인의 슬픔을 재단하며 ‘위로’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진정한 위로는 상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 아픔의 크기로 남의 아픔을 비교하지 않고, 그 사람이 서 있는 그 자리의 고통을 오롯이 바라봐 주는 것. 열 살에 고아가 된 언니가 수십 년 넘게 ‘살아있는 엄마’를 기다려온 나를 있는 그대로 알아준 것처럼 말이다.


내 마음을 꿰뚫은 위로. 엄마가 있는데 사랑해주지 않고, 엄마가 살아있는데 와주지 않아도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 텅 빈 복도에서 평생을 서성여온 나의 시간을 언니는 ‘참 고생했다’며 안아주었다. 그 통쾌한 인정 덕분에, 나는 비로소 1년 동안 묵혀두었던 물감을 풀고 나만의 색을 칠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필요할 때만 찾는다는 나의 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