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는 끊임없이 대상을 관찰하면서 그림을 수정하며 그려나간다. 그래서 어떤 그림은 마음에 들 때까지 몇 년간이고 계속해서 고쳐 그리기도 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런 그림이다.
다빈치는 3년을 「모나리자」를 그리고도 완성하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도 「모나리자」를 지니고 다녔다 한다. 반면 조선 중기에 활약한 김명국(金明國)의 「달마도」는 순간적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모나리자와는 달리 김명국의 「달마도」는 몇 분 안에도 그려낼 수가 있는 그림이다. 심지어 김명국은 달마를 보고 그리지도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 달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가슴속(胸中)에 그리고자 하는 형상(形象)이 있다는 말로 흉중 형상(胸中形象), 흉중성죽(胸中成竹- 마음속에 대나무가 있음)이라는 말로 설명을 한다.
동양의 화가는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내용이 이미 작가의 마음속에서 그려져 있었다. 작가는 모델을 보면서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속에서 이미 구상한 형상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화면에 투사(投射) 시켜 그렸다. 동양화의 창작 방법 중 의재필선(意在筆先)이 있는데, 이 말은 그림은 붓(筆)으로 그리기에 앞서(先) 뜻(意)이 서있어야(在) 한다는 말이다.
동양화는 마음속에 미리 구상이 없으면 제대로 그림을 그려낼 수가 없다. 그것은 먹과 화선지라는 동양화의 독특한 재료적 특성에 기인한다. 서양화와 같이 대상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면 동양화의 특징인 선의 리듬을 살릴 수가 없다. 요즘은 동양의 화가들도 사진을 보면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런 방식으로는 동양화의 선의 맛을 살려낼 수가 없다. 흉중 형상이 되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의재필선(意在筆先)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그리기 방법은 아니다. 흉중성죽(胸中成竹)을 제시한 북송(北宋)의 문동(文同 1018~1079)은 마음속의 그림이 얼마나 포착하기 어려운 것인지 설명한다.
대나무를 그리려면 반드시 가슴속에 먼저 대나무를 이루어 얻은 다음 붓을 들어 화면을 숙시(熟視- 눈여겨 자세하게 들여다 봄) 하다가 그리고자 하는 바를 발견했을 때 급히 일어나 이를 쫓아 붓을 휘둘러 곧바로 이루어내야 하는데, 그 본 바를 추적하기를 마치 토끼가 튀는 순간 솔개가 덮치듯이 해야지 조금만 머뭇 거려도 곧 사라지고 만다(갈로, 중국회화이론사, p.282)
동양화는 아무렇게나 붓을 휘둘러 그리는 그림이 아닌 것이다. 동양화의 관찰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동양의 화가들은 작업에 임하기 전 반드시 세밀한 관찰 과정을 거쳤다. 심지어 그는 그리고자 하는 식물의 생장 법칙과 조직구조까지도 파악했다.
동양의 화가는 그리고자 하는 꽃이 무슨 꽃인지, 어떤 색인지, 잎은 어떻게 나는 지, 꽃받침은 몇 개인지, 또 꽃의 앞뒷면을 구별하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돌아가면서 살펴보고, 꽃의 자태, 꽃술, 꽃대, 꽃줄기 등의 각종 특징들을 연구하고 분석한 후 작업에 임했다(진복조, 동양화의 이해. p.27).
물론 서양의 대가들도 대단했다. 다빈치의 스케치북을 보라. 다빈치는 생물의 생장과정이나 물살의 흐름 등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표현하였다. 다빈치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거의 과학자였다.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화가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를 보면 보티첼리가 얼마나 대단한 눈을 가진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닥의 꽃 하나, 풀 한 포기 허투루 그린 것이 없다. 아마 다빈치나 보티첼리는 식물의 생장 과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양의 화가들도 관찰력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생명의 리듬, 물살의 리듬을 역동적으로 양식화하였다. 그러니 진정한 동양의 화가들 앞에서 관찰력이 부족하다느니 관념적이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