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의 중국 미술은 사실적인 묘사에 중점을 두어 형사(形似)를 중시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형태와 정신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를 ‘경형사(輕形似) 중신사(重神似)’라고 한다.
‘경형사(輕形似) 중신사(重神似)’는 형사(形似), 즉 현실을 객관적/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가볍게(輕) 여기고 신사(神似), 즉 정신을 표현(神似) 하는 것을 중요시한다(重)는 말이다神似)
동양화가 신사(神似)를 중시한 데에는 동양 사회의 특수한 사정이 한몫을 하였다. 과거 동양에서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은 화공(畵工)만이 아니었다. 화공들과 함께 동양 미술의 한 축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대부(士大夫) 들이었다. 동양의 사대부는 학식이 높고 시서(詩書)에 능하며 그림도 수준급에 도달한 사람들이었다.
동양미술의 특이한 점은 그림으로 수양(修養)을 했다는 점이다. 선비들은 마치 무술이나 도를 닦듯, 그림이나 서예를 통해 수양(修養)을 쌓았다. 어찌 보면 사대부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였고 도화서의 화공(畵工)들은 국가나 궁정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도화(圖畵- 도안과 그림)를 그리기 위해 선발한 기능인들이었다. 문인들도 자신들이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문인화가 동양에서 성행한 데에는 동양 사회의 특수한 여건이 크게 작용했다. 과거제도를 통하여 형성된 문인 계층은 시인이자 서예가이며 미술에도 안목이 밝았다. 사대부들이 그림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한 그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서화동원설(書畵同源說)은 사대부들에게 그림에 관여할 든든한 명분을 제공하였다.
서화동원(書畵同源)은 글(書)과 그림(畵) 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同源)는 뜻으로 글과 그림은 형제자매라는 것이다. 먹과 붓을 사용하는 동양의 필기문화가 사대부 문화를 기르는데 한몫을 하였던 것이다.
문인들은 어릴 적부터 시서(詩書)를 읽고 쓰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고, 그림에 재능 있는 문인들은 높은 수준의 그림 실력을 기를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엔 현실을 보이는 그대로만 묘사하는 화공들의 그림이 너무나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였다. 송나라의 소식(蘇軾 1036-1101)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비의 그림을 보면 마치 천하마(天下馬)를 보는 듯하여 그 의기(意氣)가 이르는 바를 취한다. 그러나 화공의 경우는 왕왕 채찍, 털 가죽, 구유, 여물만을 취할 뿐 한 점의 준발(俊拔- 준수하여 빼어남)도 없어 몇 자(尺)만 보아도 곧 싫증이 난다.
한마디로 사대부들의 눈엔 화공의 그림은 그림 같지도 않아 논할 가치도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 주장에 대해 반박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학문이나 소양, 사회적 신분 등 모든 면에서 상대가 되질 않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엘리트 지식인이며 사회 지도층인 문인들에게 대항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의 미술이나 화론은 전부 다 대단한 문인들이 만든 것이다. 사실 사대부들이 그림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서화(詩書畵)에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사군자나 수묵화(水墨畵)의 분야에서는 화공들을 뛰어넘는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들이 많았다.
문동(文同)의 「묵죽도(墨竹圖)」이다. 기품이 있으면서 바람에 서서히 움직이는 대나무를 보는 듯하다. 이 정도 수준이었으니 사대부들이 화공들을 깔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였다. 이런 문인 사대부들의 그림은 기술만으로는 도달할 수가 없는 예술이었다. 이런 그림은 높은 학식과 수양이 있어야만 그려낼 수가 있는 예술이었다.
중국 명말(明末)의 대표적 문인 화가인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중국 문인 화가의 계보를 통해 남북종화(南北宗畵)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당(唐) 나라 때 시인이며 화가였던 왕유(王維)를 문인화의 으뜸으로 꼽았고, 그 외 동원(董源)·거연(巨然)·이성(李成)·범관(范寬)·이공린(李公麟)·왕선(王詵) 등을 열거했다. 그리고 원말(元末)의 대가로는 황공망(黃公望)·왕몽(王蒙)·예찬(倪瓚)·오진(吳鎭)을, 명나라의 문인 화가로는 문징명(文徵明)·심주(沈周) 등을 꼽았다.
동기창은 서법의 용필로 그림을 그릴 때는 초서나 예서의 기이한 글자의 법으로 그릴 것을 강조했다. 문인들에게 미술은 그림이면서 동시에 글씨였던 것이다.
선비가 그림을 그릴 때는 마땅히 초서(草書-한자의 전서나 예서 등의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 글씨로 쓴 서체)나 예서(隸書 -중국 한나라 때의 옛 서체)의 기이한 글자의 법으로 그려야 한다. 나무는 마치 쇠를 구부린 듯하고, 산은 마치 모래에 획을 그은 듯하여 달콤하고 속된 좁은 길을 완전히 제거하여야만 사기(士氣)를 이룰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엄연히 격에 이르더라도 이미 환쟁이의 마귀의 세계에 떨어져 다시는 구제할 약이 없다.(갈로, 동양회화이론사)
동양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서양의 화가들도 사사건건 그림에 간섭하는 고위 성직자들 때문에 보통 골머리를 앓은 것이 아니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는 불후의 명작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자신의 그림을 계속하여 비난하는 고위 성직자를 지하세계의 심판관으로 지옥의 맨 끝부분에 그려 넣었다. 그 성직자는 그림에서 자기의 얼굴을 빼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지만 그의 요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양의 성직자들은 그림의 내용만 간섭했을 뿐 사대부들 같이 그림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지 못할뿐더러 미술에 대해 일가견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동양의 사대부들은 사회적 지위와 소양 등을 내세워 틈만 나면 화공(畵工)들의 그림을 비난하였다. 사실 일부 사대부 화가들은 그럴만한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환쟁이의 마귀의 세계라니?“ 화공(畵工)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가?
조선의 화가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문인화는 고려 시대 유입되어 고려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에 의해 꽃을 피웠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도화서(圖畵署)에서 화공들을 지도하는 상급자였으니 화공들의 그림에 대해 꽤나 심하게 간섭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부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준 높은 문인들과의 교류와 협력하며 미술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서양도 그랬다. 15-6세기 이탈리아의 메디치는 화가들과 학자들을 교류케 하여 수준 높은 르네상스 예술을 만들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