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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빈한 Mar 04. 2024

술·약물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으면 감형이 될까?

형법 제10조 제2항 심신미약 감경을 중심으로

1.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에 대한 사회적 비판


  2020년 12월경 초등학생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조두순이 심신미약 감경으로 12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자, 심신미약 감경 규정을 폐지해야 한다거센 비판이 제기되었다. 음주 또는 약물 상태에서 저지르는 범죄 사건이 증가함에 따라, 음주 또는 약물 상태에서의 범죄를 가중처벌하자는 의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데, 범죄자의 주관적 상태에 따라 형벌이 달라진다는 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형사피고인이 선처나 감형을 받기 위해 재판 전략으로 심신미약 주장을 하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형사재판에서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감형을 받을 수 있을까? 「형법」 제10조 제1항은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변별능력이나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필요적 조각). 「형법」 제10조 제2항은 심신장애가 미약한 경우에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임의적 감경). 즉, 심신장애자의 행위는 '행위자의 탓'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이유로 책임을 조각하거나 형을 감경할 수 있다는 취지이다. 다만, 근래의 재판 실무는 피고인이 음주나 약물 상태였거나 오랜 정신 병력이 있다는 이유로 심신미약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술이나 약물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형을 받는다면, 실제 사안에서 형사처벌을 제대로 받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법 제10조(심신장애인) ①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

② 심신장애로 인하여 전항의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 <개정 2018. 12. 18.>

③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는 전2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2.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은 형사법 원리에 따른 평가적·규범적 개념에 해당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형사사법의 기본원리는 피해자가 당한 고통만큼 가해자도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형벌이론에서는 응보형주의(retributivism)’라고 하는데, 형벌의 본질이 범죄에 대한 정당한 응보에 있다는 사상이다. 인간사회에서는 오래전부터 나쁜 사람들이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왔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고조선 팔조금법의 ‘살인한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문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고대의 역사에서는 ‘응보’ ‘처벌’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책임에 비해 가혹한 형벌을 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근대의 형사법에서는 ‘책임주의 원칙’, ‘형벌과 책임의 비례원칙’이 점차 강조되었고, 형벌의 목적도 범죄인을 개선·교화시키고 범죄를 예방하는 데에 있다는 ‘목적형주의’ 사상이 대두되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상설전시관

  형법 제10조의 심신장애 규정도 '책임주의 원칙' '형벌과 책임비례원칙' 따라 심신장애 상태의 행위자에게는 비난의 정도가 낮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사안에 따라 제대로 된 식이 없는 상태에서의 범행은 치밀하게 계획하여 범행한 경우보다 그 책임의 정도 비난가능성이 낮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심신장애라는 개념은 단순히 술, 약물로 기억이 없다거나 정신병력이 있는 등의 '사실적 개념'이 아니라, 형사법의 원리에 비추어 행위자의 비난가능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평가적·규범적 개념'에 해당한다. 이에 법원 술이나 약물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형감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히 엄격하게 판단한다. 


3.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actio libera in causa)


  형법 제10조 제3항은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는 전2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를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actio libera in causa)'라고 하는데, 이때에는 행위자의 책임이 조각 또는 감경되지 않고 행위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부담하게 된다. 대법원은 음주 뺑소니 사건에서, '고의에 의한 원인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행위만이 아니라 과실에 의한 원인에 있어서의 자유로운 행위까지도 포함된다'는 취지로 판시하였다(대법원 1992. 7. 28. 선고 92도999 판결). 법원은 만취상태였다는 이유로 뺑소니범이 도주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보고, 수십 년 전부터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라는 법리를 통해 운전자의 책임감경사유를 상당히 엄격하게 판단해 왔다.


  이처럼 우리 법원은 개별 사건에서 심신장애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① 위험의 발생을 사전에 예견할 수 있었는지, ② 스스로 심신장애 상태를 야기하였는지, ③ 범행경위와 죄질 및 행위태양, ④ 피해의 정도 및 피해회복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음주나 약물로 스스로 심신장애 상태를 야기하였거나, 사전에 범행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주의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면,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에 해당하여 범행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부담하게 되고, 형법 제10조 제3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난가능성이 인정되어 엄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한편, 근래에범죄 사건에서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미약 주장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성폭력처벌법」 제20조에서는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에서 성폭력범죄를 범한 때에는 「형법」 제10조 제1항ㆍ제2항 및 제11조를 적용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대법원 양형위원회 성범죄 양형기준에서도 자의로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성범죄에 대하여는 만취상태를 가중인자로 반영하, 적어도 감경인자로 반영하지 아니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위 법률규정과 양형기준, 현실적인 처벌필요성 등을 고려하여 보더라도, 성범죄 사건에서는 심신장애로 인한 감경여부를 더 엄격하게 판단하게 된다.   

                                                                           



4. 최근 심신미약 감경을 이끌어낸 사건 


  얼마 전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으로 기소된 의뢰인의 변호를 맡아 심신미약 감경이끌어냈다. 의뢰인은 오래전부터 정신질환이 있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경찰관커터칼로 찔러 상해를 입힌 강력범죄 사안에서 심신미약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검찰은 오랜 정신병력에 미루어 볼 때 의뢰인과 가족들에게 돌발행동예견하고 회피할 주의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검찰은 의뢰인이 강력범죄를 저질러 재범의 위험성이 높아 치료감호시설에서의 치료가 필요하다며 치료감호도 청구했다.


  필자는 형사재판에서 실관계를 전반적으로 인정하되, 심신미약 감경사유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였다. 먼저 의뢰인이 치료 중인 병원에 협조를 구하여 정신감정 및 치료경과가 반영되도록 함으로써, 의뢰인이 자신의 병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피해경찰관에 대한 합의 및 공탁절차를 통해 충분한 피해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다만, 의뢰인에게는 일정기간 치료감호가 불가피하였는, 의뢰인이 가족들과 정서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가족들이 사랑과 보살핌으로 평생 돌볼 것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는 점을 변론했다. 그 결과 의뢰인이 강력범죄로 기소되어 중한 처벌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심신미약 감경을 인정받아 선처 이끌어냈, 더 나아가 검사의 치료감호 청구이례적으로 기각결정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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