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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고독 유배객과 대화

프롤로그

by 박필우입니다

* 강진 다산 초당




유배형은 기본적으로 종신형이며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러나 정치에 휘말린 사건에 따라 유배지와 유배 기간이 천차만별이다. 유배를 귀양이라고도 하는데, 귀양은 더는 벼슬을 하지 못하도록 고향으로 보내는 귀향歸鄕에서 파생된 말이다. 유배 다음 형벌로는 그 죄질에 따라 곤장을 맞은 뒤 1~3년 복역하는 도형을 비롯해 장형, 태형이 있었다.


당대 집권 세력의 문벌과 학맥을 달리할 경우 해배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으며, 정쟁이 난마같이 얽힐수록 사약의 악몽에 시달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감시의 눈초리와 절대고독의 삶 속에서도 주옥같은 학문과 예술, 문학을 탄생시킨 유배인이 많았다. 이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으며, 현실에 깃들여 있는 지독한 침묵을 이겨내고 자신을 밝히는 지혜로 승화했다. 그런 까닭에 사숙하듯 불러내 그들이 지녔던 인격과 학식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유배형은 정치적으로 양반 관료가 많은 수를 차지하지만, 양반상노 구분 없이 행해졌다. 유배지 거리는 죄질에 따라 달랐는데, 최소 600리에서 3,000리까지 있었다. 넓은 땅을 가진 중국에서는 3,000리까지 유배를 보낼 수 있으나 조선에서는 그럴 수 없으니, 전국 방방곡곡을 빙빙 돌아서 가도록 하여 거리를 채웠다 한다. 가장 혹독한 곳으로 알려진 것은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같은 함경도 변방의 극변안치, 제주도, 추자도, 흑산도, 남해도 등 섬으로 도배되는 절도안치가 있다.


당쟁으로 반목과 갈등이 극에 달했던 조선 중기에 와서는 정치적인 중죄에 따라 가시 울타리가 둘러쳐진 위리안치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일이 많아지자 영조 대에 와서는 작은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은 가혹하다며 규제했지만,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섬으로 도배되는 도중에 배가 풍랑을 만나 그 행방이 묘연한 경우도 있었다. 제주도는 특히 정치적으로 비중이 높았던 인물들이 유배를 갔던 곳이다. 광해군, 송시열, 정난주, 김정희, 최익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 부인은 조선 최초의 여성 유배인으로 제주도에서 술을 빚어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시대에 가장 어린 유배인은 누구였을까.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황사영 사이에서 난, 두 살배기 아들 황인보(경환)다.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면서 정난주는 제주도로 보내지고, 아들은 압송관원에 의해 추자도에 버려졌다. 때마침 추자도 어부 오상선 씨가 발견하고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웠다고 한다.



Chusa-Buliseonrando-01.jpg 추사 김정희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또, 조선의 마지막 유배인은 낙안군수를 지낸 임병찬이다. 그는 1906년 면암 최익현과 함께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제에 붙잡혀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로 유배를 당했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순절하였고, 임병찬은 귀양에서 풀려난 후, 1914년 서울로 올라가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해 활동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병사했다. 조선 시대 유배형은 1908년 일제가 만든 경성감옥을 증축해 1923년 5월 5일 서대문형무소를 열면서 막을 내린다.


유배지로 떠나는 과정도 지위나 처지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조만간 정계에 복귀할 인물은 유배길 중 지방 관헌의 관찰사나 부사 등 관원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노잣돈과 선물까지 한아름 챙겨 받는 일도 허다했다. 명승고적을 탐하며 유람을 떠나듯 유배지로 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민과 상노라면 상황은 달랐다. 유배지로 떠날 때 발생하는 모든 숙식 비용을 본인 것은 물론이고 압송관 경비까지 일부 부담해야 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죄인은 간혹 압송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유배지에서의 삶이란 절대고독 속에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핍박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고관대작으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죄인의 몸이 된 벼슬아치들은 절망의 나락에 빠진 듯 살아야 했다. 더구나 임금 주변에 정적들이 가득 차 있어 해배의 꿈이 요원하면, 자포자기 상태에 놓이기 쉬웠다. 죄인을 감시하는 날카로운 시선도 피해갈 수 없었다.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지방관아의 관찰사나 부사, 군수, 현감 등이 감시하는 눈길은 유배객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말발굽 소리만 들려와도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오는 것으로 알고 그때마다 혼을 놓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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