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Kir)', 그 붉은 유혹의 역사
파리의 노천카페에 앉아 메뉴판을 펼치면, 가장 윗줄에 낯익은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키르(Kir)'.
투명한 화이트 와인에 붉은 카시스(Cassis, 블랙커런트 리큐어)를 살짝 떨어뜨려, 마치 저녁 노을처럼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칵테일. 프랑스인들이 식사 전, "입맛을 돋우기 위해(Apéritif)" 가장 사랑하는 술입니다.
이 시리즈의 첫 문을 열며, 저는 여러분께 이 '키르' 한 잔을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달콤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아름다운 칵테일 속에는 나치에 맞서 싸운 어느 신부님의 용기와, 화합의 철학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키르의 베이스가 되는 와인은 부르고뉴의 '알리고떼(Aligoté)'라는 품종입니다. 솔직히 말해, 이 포도는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습니다. 부르고뉴의 왕자인 '샤르도네(Chardonnay)'에 밀려, 척박한 땅에서 자라야 했죠. 그래서 신맛이 강하고 거친 편이라 단독으로 마시기엔 뭔가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기막힌 아이디어를 냅니다.
이 시큼한 와인에, 우리 마을 숲에서 나는 달콤한 카시스(Cassis, 블랙커런트) 열매를 섞어보면 어떨까?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산미는 카시스의 달콤함과 만나 상큼한 식전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부족한 것 둘이 만나 완벽한 하나가 된 것이죠. 이 술을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이 바로 펠릭스 키르(Félix Kir, 1876~1968) 신부입니다.
펠릭스 키르는 평범한 성직자가 아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종교인의 옷을 입고 레지스탕스(저항군) 활동을 이끌었습니다. 수용소에 갇힌 5천 명의 포로를 탈출시키는 데 일조했고, 나치에게 사형 선고까지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영웅이 된 그는 부르고뉴의 중심지인 디종(Dijon)의 시장으로 선출됩니다. 그는 22년 동안 시장직을 수행하며 디종 시청을 방문하는 모든 귀빈에게 이 칵테일을 대접했습니다.
그의 '칵테일 외교'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방문객들은 이 독특하고 맛있는 식전주에 매료되었고, 자연스럽게 "그 키르 시장님이 주는 술 주세요"라고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52년, 이 술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그의 성을 따 '키르(Kir)'가 되었습니다.
이 술은 우리 땅에서 난 거친 와인과 달콤한 열매로 만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섞여 조화를 이루듯, 우리도 이념과 국경을 넘어 화합합시다.
1960년,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프랑스 순방 중 디종을 일정에 넣었지만, 교회와 정치적 사정으로 인해 예정된 만남은 열리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마치 지역의 전설처럼 남아 도시 전체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3. 당신의 식탁을 여는 첫 번째 건배
우리는 종종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감추려 합니다. 하지만 키르 신부는 부족한 알리고떼를 버리는 대신, 달콤한 카시스를 더하는 '화합'을 통해 최고의 식전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프랑스 와인의 긴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때로는 척박한 땅에서, 때로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포도 이야기들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그 긴 여정을 시작하기 전, 가볍게 잔을 부딪쳐 볼까요? 부족함이 조화로움으로 바뀌는 마법, '키르'를 마시며 말이죠.
"Santé! (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파리 노천카페의 낭만, 생각보다 훨씬 쉽게 집에서 재현할 수 있습니다.
준비물: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저렴한 것도 괜찮습니다), 크렘 드 카시스(Crème de Cassis, 마트 주류 코너, 인터넷에서 쉽게 구합니다).
비율: 와인 4 : 카시스 1 (단맛을 줄이려면 5:1).
순서: 잔에 카시스를 먼저 붓고, 그 위에 차가운 화이트 와인을 천천히 채우세요. 그래야 자연스럽게 섞이며 예쁜 그라데이션이 생깁니다.
응용: 화이트 와인 대신 샴페인을 넣으면? 그 유명한 '키르 로열(Kir Royal)'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