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벌의 군복, 세 개의 제국, 그리고 단 하나의 목숨

노르망디의 이방인 양경종

by KOOIL


거대한 체스판 위의 말: 이름 없는 청년의 징집


전쟁사라는 거대한 기록은 언제나 승리한 장군들의 오만한 턱선과 그들이 남긴 회고록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역사의 지층을 깊게 파고들면, 우리는 화려한 훈장과 웅장한 작전 지도 아래에 짓눌려 신음했던 수많은 민초들의 피비린내 나는 삶과 마주하게 된다. 당신과 내가 진정으로 공감하고 눈물지을 수밖에 없는 지점은 별을 단 지휘관들의 영광이 아니라, 살점이 뜯겨나가는 전장 한가운데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이름 없는 개인의 비극이다.


1938년, 조선의 평범한 열여덟 살 청년 양경종(Yang Kyoungjong)의 삶에 제국주의의 폭력적인 손아귀가 뻗쳤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일제에 의해 만주(Manchuria)에 주둔 중인 관동군(Kwantung Army)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총을 쥐는 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식민지의 소년은 "제발 살아서만 돌아오라"며 오열하는 가족들을 뒤로한 채,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낯선 북방의 영토로 끌려갔다. 그것은 개인의 자아가 국가라는 거대한 폭력 시스템에 의해 완벽하게 분쇄되는 참혹한 서막이었다.


image01.png 독일군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양경종


세 벌의 군복과 이데올로기의 무상함: 영화 마이웨이의 이면


강제 징집된 지 불과 1년 후인 1939년, 양경종은 할힌골 전투(Battle of Khalkhin Gol)에 투입되어 지옥을 맛보았다. 그는 이 전투에서 붉은 군대(Red Army)에 포로로 잡혀 얼어붙은 툰드라의 노동 수용소(labour camp)로 끌려갔다. 그러나 역사의 광기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942년, 독소 전쟁의 막대한 사상자로 인해 위기에 처한 소련 군사 당국은 수용소의 포로들을 총알받이로 내몰며 그를 다시 소련군으로 징집했다. 이듬해인 1943년 초, 그는 우크라이나(Ukraine)의 참혹한 하르코프 전투(Battle of Kharkov)에서 이번에는 독일 국방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만다.


이 기구한 운명은 훗날 강제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My Way)를 통해 스크린에 옮겨졌다. 영화는 조선인과 일본인 라이벌 사이의 드라마틱한 전우애와 갈등을 웅장하게 그려냈지만, 현실의 진창을 구르던 양경종의 삶은 영화처럼 낭만적이거나 영웅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군복의 색깔이 황갈색에서 적갈색으로, 다시 회녹색으로 바뀌는 동안 그에게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같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영하 30도의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언 감자를 씹어 삼키며, "오늘 밤에는 죽지 않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원초적인 생존의 본능만이 그를 지배했을 것이다. 이념의 제단 위에 개인을 제물로 바치는 미친 시대 속에서, 그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적군의 군복을 주워 입어야 했던 철저한 피해자였다.


유타 해변의 참상과 생존의 몸부림


1944년 6월, 이제 가슴에 독일군의 독수리 문양을 단 그는 프랑스로 보내져, 노르망디 상륙작전(Allied invasion of Normandy)의 폭풍우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그는 유타 해변(Utah Beach) 내륙의 코탕탱 반도(Cotentin Peninsula) 기지에 있는 대서양 방벽(Atlantic Wall)의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투입된 동방대대(Ostbataillon) 소속이었다.


해안가 너머에서 연합군의 거대한 함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대지를 뒤흔드는 충격파와 함께 벙커의 콘크리트가 부서져 내렸고, 흩날리는 흙먼지와 자욱한 코르다이트 화약 연기가 허파를 찢을 듯이 파고들었다. 지휘관들은 독일어로 알 수 없는 명령을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고막을 찢는 폭발음 속에서 이 동양인 병사는 그저 공포에 질린 채 참호 바닥에 몸을 웅크렸다. 사방에서 살점이 튀고 내장이 쏟아지는 전우들의 비명 속에서, 그는 또다시 두 손을 들고 참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를 생포한 미군 공수부대원들(American paratroopers)은 처음에는 그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청년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서유럽의 해변에서 미군에게 항복하는 이 초현실적인 장면은, 전쟁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가장 기괴하고도 슬픈 촌극이었다.


침묵 속으로 사라진 민초의 역사


영국에 있는 포로수용소(prison camp)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낸 후, 그는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일리노이(Illinois) 주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1992년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가족에게조차 철저히 함구했다.


자신의 영웅담을 과장하여 회고록을 써 내려간 장군들과 달리, 그는 왜 평생을 침묵했을까. 그것은 세 개의 제국에 의해 자신의 청춘과 영혼이 철저히 유린당한 기억이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거대한 트라우마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총알받이, 스탈린주의의 소모품, 나치즘의 방패막이로 쓰였던 자신의 끔찍한 과거를 기억의 깊은 심연에 묻어버림으로써, 비로소 이념과 전쟁이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적 의미


양경종의 일생은 20세기 중반을 휩쓴 전체주의와 제국주의가 평범한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고 유린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적나라하고 비극적인 증거다. 역사는 종종 처칠의 결단, 스탈린의 무자비함, 히틀러의 광기를 중심으로 서술되지만, 그 거대한 권력의 충돌 속에서 실제로 피와 땀을 흘리고 사지가 찢겨나간 이들은 양경종과 같은 이름 없는 민초들이었다.


우리가 장군들의 작전 지도보다 양경종의 세 벌의 군복에 더 깊이 공감하고 가슴 아파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국가와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우상(Idol)은 결국 한 줌의 먼지로 사라지지만, 그 미친 시대의 톱니바퀴 속에서도 끝끝내 목숨을 부지하며 인간으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생존에 대한 갈망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본성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양경종의 침묵으로 끝난 삶은, 어떤 위대한 전쟁의 명분도 한 인간의 평범한 일상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는 역사의 준엄한 경고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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