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 출신 디자이너 본 적 있으세요? 그게 저예요,...
흔히들 말하는 국내 N사 게임 회사였고(aka.구로의 등대.. 이렇게 써도 되나) 운 좋게도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입사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초초 거대 기업임을 감안하면, 인서울이라는 학력 덕도 본 것 같다.
주변에서는 요즘 같은 때 이 정도면 잘 간 거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도 그 말에 대체로 동의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연봉은 빠르게 올랐고, 3년 차가 되자 숫자만 놓고 보면 불만을 말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서 더 애매했다.
힘든 건 분명한데, 그만두기엔 이유가 부족해 보였다.
야근이 심했나? => 거의 매일이었지만 참을만 했음, 수당으로 금융치료 가능
회사 분위기가 나빴나? =>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 파트는 정말 끈끈한 동료 이상이었음
그냥 점점 개발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화면을 만들고, 수정하고, 다시 고치는 일이 더 이상 아무 감정도 안 들었다. 남들도 다 그렇겠지만 방망이 깎은 노인처럼 코드 짜는 기계가 된 것 같았다. 방망이 노인은 최소 장인이기라도 하지 난 뭐야..
기능이 잘 붙어도 건조하게 "오 됐다"라고 말하고 끝이었다. 뿌듯함도, 재미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회사 밖에서는 전혀 달랐다.
아주 어릴때부터 “미감이 좋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한 때 패션디자인과에 진학하고 싶었고, 컴퓨터공학을 배우면서도 일러스트로 0에서 1을 만들어내는 디자인 전공 기숙사메이트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동경하는 마음을 쌓았던 것 같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매일 핀터레스트를 보면서 아카이빙했다.
그리고 열정이 식기 전, 외국 스트릿 패션을 소개하고 코디를 제안하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반응이 있으면 곧 계정 공개도 해볼게요..!)
옷을 고르고, 화면 구성을 고민하고, 썸네일을 만들 때는 정말 시간이 말도 안되게 빠르게 흘러갔다.
그럴 때마다 그냥 웃고 넘겼지만, 사실 마음속에서는 계속 비교하고 있었다.
왜 회사에서의 나는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옷을 대하는 열정의 반의 반만큼만 해봐라..
지금 생각해보면 흔히 말하는 ‘마의 3년’이 딱 그 시기였다... ㅠㅠ
이제 일을 잘하게는 됐는데, 더 잘하고 싶지는 않은 상태.
앞으로도 개발자로 커리어를 이어가는 내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후.
그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내가 잘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일단 개발은 아닌게 확실했지만, 회사에 바로 사표를 낼 용기는 없었다.
구로구의 오피스텔 월세와, 캠핑간다고 구매한 레이의 할부금은 내야하니까.. 흑..
대신 몰래 퇴근하고 디자인 부트캠프를 들었다.
진짜로 내가 미감에 관한 감각이 있고, 디자인을 시작해도 되는지 처음엔 그냥 확인해보고 싶었다.
툴은 낯설었고, 당연히도 일주일 동안 만든 랜딩페이지는 마음에 안 들었다.
오히려 프론트 개발 경력이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느껴질 때도 많았다.
연봉 8천을 받던 사람이 신입 디자이너 포트폴리오를 만든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좀 웃겼다...ㅎㅎ
그래도 이상한 건, 그 시간이 싫지 않았다는게 신기했다.
퇴근 후 시간이 더 힘들어졌는데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유튜브 채널에 소홀해질때는 그만하고 싶긴 했음)
프론트 개발자를 때려치고 디자이너를 준비하면서 나는 점점 확실해졌다.
1. 참지마. 도전해. 너 아직 어려.
2. 송충이는 솔잎 먹어야해
그 시간동안 참 많이 되뇌였던 주문과도 같은 문장이었다.
지금 나는 중견 뷰티 회사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연봉은 줄었고, 직급도 다시 처음부터다.
여전히 부족하고, 배울 것도 많다.
그래도 적어도 출근하면서 스스로에게 변명하지는 않는다.
“이게 맞는 선택이야”라고 애써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
연봉 8천을 포기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꿈을 좇았다고 말하기도 좀 민망하다.
그냥 더 이상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계속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아직 신입이지만,
적어도 내가 만든 화면을 보면서
“이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