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by 최수현

파랗다는 것은 주관적인 느낌이다. 사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새벽부터 천둥, 번개를 동반한 큰 비가 내렸고, 날이 갠 후에도 빗방울이 이어졌다. 출근할 때 장우산과 단우산을 두고 고민했던 기억이 확실히 난다. 장우산은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이었고, 단우산은 버스에 들고 타기가 수월해서 결국 장우산을 들고나갔다. 그날은 기분이 좋았다.

집을 나섰을 때, 하늘이 파란색이 아니라 별들이 쏟아졌다고 기억한다고 해도 할 말 없다. 그날은 정말 내 인생에서 손에 꼽히게 기분 좋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태도가 결정한다는 말처럼 모든 순간이 좋았다.

새벽 네 시 무렵, 밤새 계속된 천둥소리에 잠을 설치다가 카톡 알람에 눈을 떴다.


“헤어지자.”


단 한 문장. 사실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오래 기다리던 말이었기 때문에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그래, 안녕.”


마침표를 찍고 카톡을 전송하며 완전히 달아난 잠 대신에 해방감과 설렘이 가슴 가득 스며들었다. 나는 크게 기지개 켜듯 만세를 외쳤다. 오 년 만에 나 독립, 만세!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마 그 여자의 집일 것이다. 밤새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길 나눴을 테고 이제야 결론에 이른 것 같다. 얼마 전, 직장 동료를 통해서 그 여자가 임신했다는 이야긴 들었다.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부한 지 삼 년이 넘은 나로선 남편에게 생긴 좋은 일을 축하해주고 싶은 기분일 뿐이다. 두 사람의 아이의 생일마다 친한 이모처럼 찾아가서 생일 축하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은 내게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그가 날 자기 기준대로 사랑한 것은 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내게 일으킨 재난들이 내 마음을 소진시켰다. 결혼은 풍랑 속에 두 개의 키를 잡고 배를 모는 일과 비슷했다. 우리는 각자 가고 싶은 곳과 생각하는 바, 원하는 것이 다 달랐고 배는 별거라는 산으로 향했다. 더 이상 서로 함께 자지 않고, 대화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내가 몇 번 이혼 이야길 꺼냈지만 그는 인생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있는 거라며 날 비웃었다. 그러던 사람이 작 년, 그 사람 비서로 들어온 미진 씨에게 푹 빠져 버렸다. 동기들보다 나이가 좀 많은 그녀는 성숙한 분위기의 미인이었고, 경력도 좀 있는 만큼 일도 잘했다. 그리고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건드려도 아이가 생기지 않던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 남편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유전자 검사를 할 정도로 깐깐하게 굴었다. 그러나 미진 씨는 남편의 의심을 감내했고, 이제 아이는 두 사람의 아이로 확인되었다.


“오늘은 사직서를 내볼까!”


계속 같은 직장에 다닐 순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품고 다니던 사직서를 상무님께 제출했다. 그는 소문으로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내게 직접 물은 적은 없었다.


”이제 뭘 할 생각이지? “


나는 늘 보이던 단정하고 사무적인 모습을 내려놓고 활짝 웃으며,


”여행을 다니려고요. “


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면 좀 이뻐 보인다. 한 때 내 첫사랑 이기도 했던 상무님께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모습이다. 상무님은 약간 놀란 듯한 눈으로 나를 살피다가 씩 웃으며,


”예진 씨, 웃는 모습 처음 봅니다. 좋아요. 앞으로 하는 모든 일이 다 잘 되기를 바랍니다. 또 봅시다. “


라고 말하며 내 사표를 받아들였다.


”상무님은 제 첫사랑이셨어요. “


꼭 말하고 싶었다. 상무님은 따뜻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말았다. 그래서 내가 씩 웃고 나가려고 하는데 잠깐 기다리라며 주머니를 뒤지셨다. 그리고 나에게 자몽맛 사탕을 건넸다.


”예진 씨는 최고의 직원이었어요. 그리고 나에게 자몽맛 사탕의 맛을 알게 해 줬죠. “


상무님은 오랫동안 병을 앓던 사모님과 사별을 하고 한 동안 쉬셨다. 그때, 나는 상무님의 댁에 찾아가 문 앞에 사탕 바구니를 걸어놓고 왔었다. 이런 메모를 남겼었다.


‘인생이 다시 달달하게 느껴질 때까지 사탕을 하나씩 드세요. 그리고 다시 뵈어요.’


나는 그 사탕을 받아 들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드렸다.


“감사했습니다. 상무님.”


좋은 날이다.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앞으로 뭘 할지 사실 아직은 계획 같은 것은 없다. 돌아갈 친정도 없고, 이런 날 찾아갈 친구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좋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짐을 쌀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 집을 알아볼 것이다. 지금 사는 곳처럼 비싼 동네 말고 어느 구시가지의 사람 손 때 많이 묻은 그런 낡은 집을 얻고 싶다. 어릴 때 할머니와 살았던 그런 동네에서 세월과 함께 낡아가는 날 느끼고 싶다. 산책을 나오면 길고양이들도 있고, 길에서 쭈그려 앉아서 담배를 피워도 이상한 여자처럼 쳐다보지 않을 그런 소박한 곳에 어릴 때 이루지 못한 꿈 하나만 안고 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나는 원래 동화 작가가 꿈이었다. 결혼과 함께 내 꿈이 사라진 것은 삶이 더 이상 동화 같지 않아서였다. 비싼 대리석 바닥은 왕자님이 사는 성이었고, 남편은 잘생긴 왕자님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가사도우미를 쓰기 싫어하는 남편 때문에 매일 대리석 바닥을 쓸고, 닦았고, 남편의 기벽에 사랑은 이 년도 채 가지 못 했다. 우리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그의 사랑은 자길 위한 것이었다. 자기 성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자기 옆에 완벽하게 어울릴 그림 같은 여자를 원했고, 그것이 여자에게 베풀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 그는 그게 여자의 삶이라고 그랬다. 결혼 선물로 내가 받은 것은 책이었는데, 그것은 부모가 없는 날 위한 배려라고 그랬다.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랑은 끝났다. 그 사실을 말했을 때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있는 거라며 나를 비웃었다. 그는 내게 감옥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오가 되기도 전에 나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날, 나는 이 집에서의 마지막 꿈을 꾸고 싶었다. 감옥의 문이 열리고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여기서 얻은 피로와 슬픔을 모두 씻어내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나는 스물네 시간 이상을 깊이 잤다. 그날은 파랗고 아름다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