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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하던 날

내 마음의 동화

by 사과꽃


(1)

누렇게 여문 나락을 몇 날 며칠 베었는지 모른다. 벼가 새파랗게 물 논에 서 있을 때는 느긋함도 있었다. 모내기는 이 집 저 집에서 품앗이로 하지만 수확기에는 예닐곱 마지기 땅을 오롯이 둘이서 베었다. 베어논 논에 비라도 뿌리거나 몇 해 전처럼 베기도 전에 태풍이라도 오면 일은 두배로 늘어난다. 넘어진 볏단을 서너 그루터기씩 묶어 세워야 하고 물이 빠지면 낫으로 베어 낸다. 베어놓은 것을 한 아름씩 묶어 볏단을 만들고 마른 햇살에 말린다. 뒤집어서도 말린다. 그런 후 볏단들을 일일이 안아서 한 곳에 쌓아야 타작할 수 있다.



탈곡기를 부른 날이다. 느런 장판을 깔고 볏단을 들어다가 방망이로 두들겨 나락을 털었는데 그 탈곡기가 나오고서는 일이 절반은 줄었다. 두 사람이 돌아가는 기계에 볏단을 이리저리 갖다 대면 순식간에 나락이 털린다. 오늘 그 탈곡기 주인이 와서 집집마다 털어주기로 하여 죽을 둥 살 둥 나락을 베고 볏단을 묶었다. 팔다리와 어깨, 허리, 성한 곳이 없지만 첫새벽에 타작하러 갈 준비를 했다.



식구들이 점심을 먹어야 하고 네댓 명 객 식구도 생각해서 새참거리도 넉넉히 준비했다. 밥은 밥대로 지어 여러 찬합에 담고 김치를 썰고 엊저녁 해둔 나물찬에 푸성귀 무침을 가지가지 담았다. 새콤 매콤하게 마늘을 다져 넣고 짭짤한 오이냉국도 준비했다. 감자도 찌고 잘은 고구마도 쪘다.



타작하는 날은 부지깽이만 들고 서 있어도 도움이 된다고 이제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들놈과 큰딸을 깨워서 앞세웠다. 돌 지난 막내를 돌보아야 해서 큰 딸내미를 데리고 간다. 리어카에 먹을 밥과 찬과 물을 넉넉하게 실는다. 그사이 나락을 담을 가마니와 갖가지 도구를 잔뜩 실어놨다. 허새비 같이 마른 신랑이 안쓰럽다. 눈을 비비며 깨어 앉은 작은 딸내미에게 엊저녁 했던 말을 다시 한다.



"동생 일어나면 밥 차려서 먹고 점심도 둘이 같이 챙겨 먹어라, 우린 타작하고 저녁에 올 테니 동생이랑 단디 있어야 한다"


먼동이 터오는 것을 보며 두 아이를 걸리고 막내를 업은 채 신랑이 미는 리어카를 따라 논으로 향했다. '올해는 그 탈곡기가 고장이 덜나야 할 텐데, 여러 집 나락을 다 털어주고 우리 논에 오는 순서가 늦지 않아야 해지기 전에 돌아올 텐데'




(2)

깜깜한데 엄마 아버지는 타작한다고 벌써 갔다. 우리는 데려가지 않고 큰언니 오빠만 데리고 갔다. '막내는 업어서 데려가면서,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작은 언니가 밥 먹자고 깨웠다. 몰래몰래 조금 울어서 안 운 것처럼 쓱 닦고 일어났다. 상보를 들어보니 맛있는 반찬이 많았다. 애고추를 밀가루에 묻혀 쪄서 양념한 반찬이랑 콩나물 가지나물 오징어 숙회에 멸치볶음도 있다. 호박잎을 쪄놓고 감자랑 고구마도 쪄놨다. 된장국도 있는데 엄마는 오이냉국도 해놨다. 밥을 먹고 둘이서 엄마처럼 설거지를 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작은 빗자루로 마당도 고운 결이 한 곳으로 나게 사각사각 쓸었다.



그 마당에서 뛰놀다가 마루에서 낮잠도 자다가 파란 하늘도 보다가 그래도 밤이 되지 않았다. 꼬랑지가 빨간 고추잠자리를 몇 번 놓쳐도 우리는 여전히 엄마 아버지가 오실 대문에 눈을 두고 있었다. 한낮의 뙤약볕이 시들해질 무렵 서서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자꾸자꾸 해가 지는데 이제 어두워지려는데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다. 작은 언니가 갑자기 "아부지하고 엄마가 타작해서 힘들 텐데 우리가 밥 해놓자" 한다. "그러자. 그러면 엄마가 엄청 좋아하겠재"



날이 긴 가을날 마당에서 밥 짓기가 시작되었다. 일곱여덟 살은 되었을까? 연년생 자매는 마당에 걸어둔 커다란 양은솥에 밥을 하기로 했다. 언니가 쌀과 보리쌀을 퍼왔다. 수돗가에 붙어 앉아 언니가 씻는 모양을 구경했다. 물을 쪼르륵 붓고 손을 넣어 휘저으니 뿌연 물에 손이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보일 때까지 여러 번 헹구었다.



'엄마는 콩밥을 해주던데'. "언니야 우리 콩밥 하자" "응 그러자" 저쪽 마당에 늘어놓은 콩깍지를 여러 통 깠다. 빨간 콩 검정콩 메주콩도 담아 언니 곁에서 씻었다. 엄마가 씻어둔 양은솥에 언니는 쌀을 붓고 나는 콩을 사이사이 뿌렸다. 손을 담가 물 가늠을 했다. 언니가 담가보고 내가 담가보고 언젠가 엄마가 하시던 말씀대로 손등 어디쯤에 물이 오는지 가늠했다.



드디어 솥에 불을 붙일 시간. 잔가지를 가져다 놓고 깔비(마른 솔잎)를 가져왔다. 엄마처럼 마른 솔잎을 불쏘시개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깔비에 바람이 들지 않게 두 손으로 막자 언니가 성냥개비를 그었다. 여러 번 그어도 불이 붙지 않아 역할을 바꾸었다. 언니가 두 손으로 깔비를 둘러싸고 내가 서너 차례 긋자 드디어 "와~" 우리의 함성과 함께 성냥개비에 불꽃이 일었다. 깔비에 불이 붙자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언니도 무서운 게 틀림없다. 조심조심 아궁이에 넣고 깔비를 더 넣어 불꽃을 살렸다. 또다시 우린 "와~"를 외며 잔가지를 넣었다.



웬걸 나무 가지에 걸려 자꾸 불이 꺼지려 하고 매운 연기가 지독하게 났다. 언니는 마른 솔잎을 더 넣고 나는 엄마가 하던 대로 부지깽이로 이리저리 헤집으니 신기하게도 불이 살아났다. "엄마는 언제 올까", 아무리 대문을 쳐다봐도 바깥은 조용했다. 하늘도 깜깜해지고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마루에 불을 켜놓고 우리는 딱 붙어 앉았다.



드디어 아버지 엄마가 오시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달려 나가 '아버지 엄마'를 외쳤다. 대문을 열자 들어선 우리 리어카에는 나락 가마가 그득했고 뒤이어 아저씨들은 용달차에 실어온 나락을 마루아래에 재어주고 갔다. 먼지를 홀딱 뒤집어쓴 엄마가 솥을 들여다 보고 "아이구나 세상에!"를 연발하며 웃으셨다.



'다행이다. 우리가 잘했나 보다" 언니와 나는 으쓱으쓱했다. 쌀은 설익고 콩은 생콩이고 아래는 새카맣게 탔지만 엄마는 얼른 콩을 걷어내고 밥을 걷어서 다시 익혔다. 모두가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을 때, 엄마는 우리가 밥을 해놔서 그래도 더 늦지 않았다고 연신 말씀하셨다. 그 일은 오래도록 엄마의 이야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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