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중
"내 가슴 속은 일종의 묘역이다
나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면 가슴에 묘지를 쓴다.
첫사랑 그녀, 이념적 불화로 헤어진 그 친구, 사소한 오해로 이제 만나지 않는 선후배들도 그 묘역에 모여있다. 잠 안오는 밤 나는 어김없이 그 묘역을 서성인다." ㅡ박범신, 힐링 중ㅡ
그들 수많은 그들, 애틋했고 살뜰했고 치기어렸고 오만했고 의기소침했고 어두웠고 뒤틀렸고 그래서 찔렸고 찔렀고, 수많은 그들이 나를 떠났고 수많은 그들을 나는 떠났다. 위악으로 위선으로 가면으로 한 발짝 이상씩 어긋나 비꼈을 때도 해명도 설명도 필요없이 뒤끝없이 끝났다. 서로 아무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었다. 시절인연이란 말은 채 아물지 않은 관계를 포기시켰고, 처음부터 끝내기 위한 여정이었던 것인 양 미련을 부리지 않았다. 끌고 가야하는 관계보다 놓아주고 가야하는 관계가 대부분이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고 식지 않은 관계들을 애써 정리하거나 정리당할 때 상처투성이인데도 피도 고름도 없이 맨숭맨숭 취하지도 않고 강을 건넜다. 아프다거나 미안하다고 말할 대상과 타이밍을 놓치고 나의 흔적과 역사를 지우기에 성공한 내가 무언가 찜찜한 마음으로 '그 묘역을 서성인다.' 이미 죽어버린 관계의 귀신이라도 만나려 용기내 보거나, 어쩌면 만날까 두려워 하면서...
성숙치 못하게 헤어진 인연들에게 나의 과오를 모아 사과하려는 마음도 내 마음 편차고 면죄부를 스스로 발행하는 꼴이다. 상처는 그대로 지고 가야할 이미 업보가 돼버린 나의 일부다. 어떻게 한다고 나아지지 않는 시간의 얼룩이고, 이름표 바꿔 달아준다고 내용이 바뀌지 않는 묘역이다. 특히 비오는 날 이미 깨진 유리창 붙이러 행여 누군가 오려나 엉뚱하게 기다리지 말고, 아무 패거리에나 들어가 불안감이나 죄책감 함부로 통제하지 말고, 못나게 생긴 얼룩과 흔적 그대로 견디며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그냥 걸어가는 것이다. 푸닥거리 한 판으로 쉽고 빠르게 해결될 상처는 없다.
삼십 년 넘게 알게 모르게 상처 준 아이들도 제가끔 잘 '자라서 저 나름의 좌절을 겪고 인생에서 길을 잃기도' 하면서 저대로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이상하고 요상한 힘으로 스스로를 길러낸다.
"세월이란 것은 자기 몫을 거둬간다. 나이 드는 게 딱히 서럽지는 않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은 인생에 한 번이면 족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지금의 나와 잘해보는 도리밖에 없다. 청춘이 저도 모르게 어영부영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어떤 시점에서 끝났다고 명확한 포인트를 파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