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메리올리버 목줄
정혜윤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의 후반부에 소개돼 있는 메리올리버의 '목줄'이라는 산문시의 내용 중 일부다.
"새미는 이빨로 목줄을 물어뜯어 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울타리도 기어오를 수 있었다. 새미는 계속해서 거리로 나갔다. 발길 닿는 대로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사뿐사뿐 우아하게. 어쩌면 어떤 날은 꽃향기를 따라, 어떤 날은 구름을 따라, 어떤 날은 색색의 나비를 따라. 새미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무엇을 따라갔는지 누가 알겠는가? 분명한 것은 새미는 개 단속반 말고는 아무하고도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고, 다른 개들과 싸우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새미는 그저 누군가의 마당에서 잠시 머물다가 친구를 사귀고 가능하면 주인과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나누는 듯했다. 사람들은 개 단속반 눈에 띄기 전에 새미를 데려가라고 올리버에게 연락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새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숨겨주기도 했다."
"‘예상치 못했던 기쁜 결말’만 이야기한다면, 그 개 단속관이 사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임 단속관은 새미를 발견하면 자신의 트럭에 태워 올리버의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새미는 많은 친구들과 더불어 오래오래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올리버는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한마디를 더한다. “이건 새미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안 어딘가에 시도 한두 편 들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을 구속하고 있는 줄을 끊는다면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경이로운 일들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나는 시 속에서, 그리고 시적인 순간들을 만나면서 달라지고 싶다. 현실을 변신의 장소인 것처럼 살고 싶다. 특별한 이야기의 힘을 믿고 우리에게 마법 같은 힘이 있음을 믿고 세상에 기적이 존재함을 믿고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감히 믿으면서 살고 싶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믿어야 자신도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의 증거가 되고 싶다. “누가 그래? 내가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시적인 순간을 만나 달라지고 싶은' 것! 그림을 그려보고 시를 읽으며 내가 꿈꾸는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진짜 삶을 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그 만남의 기록을 남기던 정혜윤 PD의 삶의 모습과 에세이에 경도되어 그의 에세이집은 거의 다 찾아 읽었다. 차마 꺼내놓지는 못했지만 라디오 PD는 사춘기 시절 마음 한 켠에 눌러 담던 오랜 로망이었기에 그의 에세이를 읽을 때도 그 시절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듣는 비밀한 자세로가 좋았다.
목줄을 물어뜯고 자신의 생을 경이롭게 헤쳐 나간 새미의 모습과 그것을 지켜준 사람들의 연결이 시적이다. 내가 제발로 목줄 꿰차고 스스로를 감금시켜 가두던 어떤 날의 모습이 '개만도 못한'이란 말과 같이 떠오르기도 한다. 목줄에 춘향이 칼까지 차고 문으로 들어오는 빛조차 차단하던 골방시절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 온 걸까.
방 안 매트에서 강아지와 누워있는 손주를 풀밭 배경으로 옮기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봄날의 곰'이 떠올랐다. 야생과 동심이 엉클어져 뒹구는 봄날의 언덕은 본원적인 그리움이다. '망할 놈의 봄'이 오면 근질거리는 생명의 충동에 못이겨 세균이니 병균이니 벌레 걱정 따위 없이 실제 저런 연초록 풀밭의 품에 싸여 친구들과 뒹굴던 옛기억이 아스라하다.
" 여기서 핵심은 '너무'라는 간편하고도 흔해빠진 부사어에 습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를 여섯 줄의 문장으로 바꿔낸 성의(이것은 물론 사랑의 힘이다)에 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클리셰(상투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아름답게 고유해'지기 위해 상투성을 벗어나려는 봄날의 곰 문장은 새끼곰의 솜털처럼 살갑다. 쉽게 갇히고 마는 말과 글의 상투어 감옥에 살지만 벗어나고픈 노력을 야단스럽지 않게 해 보고픈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