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는 끝나지 않았다
아영이는 요즘 무언가에 당첨되는 행운이 엄청나다. 옆에서 보면 거의 매 주에 한 번 꼴로 무언가 - 영화, 연극, 공연 - 에 당첨되는 것 같다. 아영이가 당첨된 것 중 하나인 영화 <와인스타인>. 그 덕에 나도 함께 가서 보게 되었다. 서울극장에 가기 위해 1호선 상행선을 타던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 날이 광화문에서 대규모 태극기집회가 열리는 날인지 몰랐다. 그냥 1호선은 원래 노인이 많으니까 그런가보다 했다. 구로쯤부터였나. 이건 심상치 않았다. 아저씨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용산에서는 심지어 한 문당 정말 30명씩 탄 것 같다. 내리는 사람에 비해 타는 사람이 훨씬 많고, 시끄럽고 텁텁하고 내 발 두 개 놓일 공간밖에 없는 곳에서 나는 이미 미간에 수백개의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종각에서 거의 대부분이 내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도대체 이토록 많은 노인들을 모이게 하기 위해 자한당이 얼마를 뿌렸을까, 를 생각하다가 종로 3가에서 내려 아영이를 만났다. 지하철역을 내리자 더더욱 가관이었다. 도로 양쪽에 빼곡히 서있는 관광버스. 그리고 그 주변에서 떼로 이동하는 수많은 태극기들... 한숨을 푹푹 쉬며 우린 서울극장으로 향했다.
원제목은 'Untouchable'이다. 할리우드에서 하비 와인스타인이라는 거물은 정말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의 재판이 아직도 진행중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미라맥스가 제작/배급한 영화들을 보고 있을 것이다. <시네마천국>, <펄프픽션>, <킬빌> , <싱스트리트> ... 정말 많은 작품들에 그는 프로듀서로 관여했기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와인스타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품은 만나기 힘들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이없는 조소도 나오고 탄식도 나왔다. 와인스타인이 자신은 항상 약자로 살아왔기에, 약자가 주인공인 영화에 관심이 많다는 말을 하는 장면에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약자에 대해 운운하는 사람이 배우를 성폭행하고 희롱하는 과정에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까?
영화에 직접 등장하여 자신의 피해 경험담을 말한 배우 및 직원들의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피해 경험을 카메라 앞에서 말하기가, 그것도 영화로 내보내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카메라 앞에 나서준 사람들이 정말 멋졌다. 와인스타인의 녹취록을 듣는 것은 역겨웠다. 목소리에서 '너가 지금 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너는 이 바닥에서 끝장이야'라는 오만함과 그 뒤에 느껴지는 찌질함이 정말 싫었다.
아영이와 함께 하고 있는 소모임에서 얼마 전에 '권력 관계에서의 성폭력이 왜 더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대학 내 교수 성희롱에 대한 논문(조주현)에서 "대학 내 성평등 체계가 마련되어있지 않은 상황일 때 성희롱은 성차별과 무관한 것으로 인지되고 그 결과 성희롱은 현재 성별 위계구조를 유지,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음을 보여주었다" 라는 문장에서 무릎을 탁 쳤다. 이는 영화계로도 확장될 수 있다. 영화 산업 내에서 성평등 체계가 없었기에, 와인스타인과 여배우들의 관계는 그저 뻔한 '꽃뱀 스토리'로 치부되어왔고 모든 가십의 중심에는 와인스타인이 아닌 배우들이 있었다. 그것이 합의에 의한 성관계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배우가 성적인 행동을 얼마나 수용하는 지에 따라서 할리우드의 중요한 배역을 주거나 혹은 반대로 할리우드에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위협을 가했던 것은 권력 내에서 성별 위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의 교육부 내 민권국은 교육기관 내 성희롱을 조건형 성희롱과 적대적 환경형 성희롱으로 구분하여 정의했다. '조건형 성희롱'은 쉽게 말해 성적 언어, 비언어, 신체적 행동을 학생이 수용하는지 여부에 따라 학생에게 프로그램고 활동에의 참여를 제한하거나 교육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적대적 환경형 서희롱'은 성희롱 행위가 지속적이고 만연하여 학생의 능력에 영향을 주거나, 위협적이고 적대적이고 불쾌한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를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에 적용해본다면 그는 30여 년간 지속적으로 산업 내에서 '조건형 성희롱'을 저질러 왔음을 알 수 있다. 배우가 성적인 행동을 얼마나 수용하는 지에 따라서 할리우드의 중요한 배역을 주거나 혹은 반대로 할리우드에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위협을 가했던 것은 권력 내에서 성별 위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모든 것들에서 남성은 유유히 빠져나갔다는 점도 무척 화가 난다. 미라맥스의 여직원이 와인스타인으로 인해 강간 미수 피해자가 될 때, 해당 여직원의 동료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알고 난 이후에도 회사를 그만두거나 저항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카메라 앞에서 반성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솔직히 그게 정말 반성인지 모르겠다.
와인스타인은 '젠더 희롱(gender harassmenet)'도 많이 저질렀다. 젠더 희롱이란, 전혀 성적인 함의가 없지만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들로 예를 들면 '여자들은 너무 예민해'와 같은 것들이다. 그는 평소 일을 열심히 하고 능력있었던 여성 비서가 딱 한 번 실수를 저지르자 '그냥 유대인 남자나 만나서 애나 여럿 낳고 기르며 살아. 그게 너가 잘 하는 유일한 것일테니까.' 라는 말을 쏟아냈다.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내가 저 여성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과연 회사를 때려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영화계 종사를 꿈으로 두는 나로서, 최고의 직장에 들어왔을 때 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모를 겪는다면 나는 바로 박차고 나올 것인가 아니면 그곳에서 남아 투쟁할 것인가. 둘 다 힘들겠지. 취업 준비도 하기 전에 이런 고민을 하게되는 것도 짜증이 난다. 이 영화가 나는 멀고 먼 미국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와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이야기로 느껴진다. 영화인으로서의 커리어 vs. 성범죄 피해자로서의 감정 ...이 두 가지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힘들었을 피해자들을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났다. 하비 와인스타인 괴물새끼 진짜. 내년 1월로 재판이 연기되었다는데, 평생 감방에서 썩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