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는 아니었지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회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영혼 없이 일하고 있었다.
또각또각또각...
갑자기 키보드의 반응이 멈췄다.
한 달에 한 번은 건전지를 갈아줘야 했는데 귀찮아서 미루다 결국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실 옆에는 다이소가 있어 가끔 일하기 싫을 때 비품 사러 가는 척 농땡이 피러 자주 가곤 했다.
이번에는 진짜 건전지가 필요하지만.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가기로 했다.
이 다이소는 늘 관광객으로 붐빈다. '대체 뭘 사러 오는 걸까' 생각하며 건전지를 집어 들었다.
계산대로 향하던 중, 사람들 사이에서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회색 반팔 티셔츠에 하얀 치마.
옆에 놓인 작은 캐리어를 보니 왠지 일본 사람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을텐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물건을 찾는 척,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고민 끝에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뭐 찾고 계세요?"
"아... 네... 전원 어댑터..."
갑작스러운 인사에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닙니다' 속으로 생각하며 여행용 어댑터를 찾아 계산까지 도와주었다.
나가려니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다.
'뛰어갈까... 매장 구경이나 더 할까...' 생각하고있었는데 그녀가 말을 건네왔다.
"우산 없어요? 괜찮으면 역까지 같이 쓰실래요?"
사무실까지는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뛰면 어떻게든 되는 거리였다.
일부러 역까지 갈 필요도 없었지만,
일부러 역까지 같이 가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그 여름날, 우리는 그렇게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