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 여교사의 교단일기 5 – 네 편인 나를 찾아서
“올해 3학년 1반의 이경태 학생을 젤 조심해야 해요. 이 학생은 인터넷 도박에 중독되어, 다른 아이들의 돈을 갚지 못해 문제가 되어도 그 부모는 절대 인정하지 않아요. 자꾸 문제가 들춰지면 정신과에 입원시켜서 모면해요. 아버지가 아이를 때리는 것 같은데 엄마도 아이도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만 해요. 교실에서 갑자기 뛰쳐나가는 것을 학생부장이 사고 날까 봐 잡고만 있었는데 폭력을 사용했다고 고발당했잖아요. 다행히 CCTV 자료가 있어서 모면할 수 있었어요. 선생님들도 조심하셔야 해요.”
3학년 부장의 설명을 듣고 무거운 기분으로 3학년 1반 수업에 들어갔다. ‘조심하라는 말’은 마음을 드러내지 말고, 안 하면 문제가 되는 것만 하는 기계처럼 학생을 만나라는 말로 들렸다. 이런 교사의 마음을 학생들이 모를 리 없다. 교실은 지저분했고 학생들의 앉은자리는 목소리 큰 아이들의 뜻대로 바꿔 앉았다. 첫 시간부터 자리를 바꾼 학생들을 찾아 한 명 한 명 제자리로 앉힐 때, 교탁 앞에 앉은 키가 크고 히죽히죽 잘 웃는 녀석은 발로 농구공을 살짝살짝 건드리며, 내 눈을 피해 나를 비웃듯이 앞뒤 아이들을 건드리며 놀았다. 낄낄거리며 웃는 진율이 책상 위의 여러 책엔 수업할 교과서는 없었다. 잡을 수 없는 두더지를 때려 맞추느라 힘이 빠지는 두더지 게임 같은 수업을 하다가 3월 초부터 녀석과 부딪쳤다.
“학원 숙제 못 해서 벌금 내면 선생님이 대신 내줄 거예요? 시험만 잘 보면 되잖아요. 저 성적 좋아요. 건드리지 마세요. 빨리 수학 문제집 줘요. 다른 애들도 다 몰래 학원 숙제해요. 저만 미워해서 선생님은 저만 감시했잖아요.”
누가 이기는지만 관심 있는 학생들의 시선을 느끼며 나도 밀릴 순 없었다. 수업 중에 일어난 일을 정리해서 학년부로 올리고 녀석은 학년부 벌칙에 따라 벌 청소를 했다. 겉으로는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속으로는 녀석의 함정에 걸려들까 봐 조심하는 여유와 웃음기 없는 수업을 이어갔다. 깐죽거리는 진율이 와는 달리 경태는 종이치고 늦게 들어오는 것과 자꾸 화장실을 보내달라는 것만 빼고는 오히려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졸업하기 위한 수업 일수를 채우기 위한 조퇴가 잦았다.
진율이와 눈싸움하며 수업하는데 새파란 입술로 벌벌 떠는 경태가 화장실을 보내달라고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모르게 경태의 얼음장 같은 손을 잡았다. 꽃샘추위에 심하게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너 아침은 먹었니?” 따뜻한 물이라도 교무실에서 떠다 줄 테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때부터 복도에 마주치거나 수업 시간에 틈이 생기면 자꾸 말을 걸었다. 본인이 어떤 주식에 투자했는데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느니, 지금 알바생을 시켜서 택배를 보내야 하는데 핸드폰을 엄마한테 빼앗겨서 손해가 막심하다느니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들어주면 아무에게도 말 걸지 못하는 것 같아서 손을 잡고 의미 없이 “그랬어? 대단하네!”라고 대답했다.
“어제 얻어맞은 눈은 괜찮니? 병원은 다녀왔지? 병원 영수증도 잘 챙겨놓았지? 학교폭력을 당한 경우는 학교안전공제회에서 치료비를 다 보상해 주니까 걱정하지 말고. 선생님은 네 편이다. 넌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할 줄 아는 똑똑한 아이라 싸움에 끌려들 그런 학생이 아니다. 어제 일은 복도의 CCTV 자료가 있어서 너의 진술만 있으면 바로 신고가 가능하다. 어제의 일뿐만 아니라 그동안 경태한테 당한 것을 빠짐없이 다 써라. 넌 책임지고 보호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강 시간에 교무실에서 진술서를 쓰고 있는 진율이와 눈이 마주쳤다. 마침, 4교시라 급식실로 가신 선생님이 많아서 녀석과 나뿐이었다. 녀석은 뒤끝도 없이 씩 웃는다. 그리곤 자기한테로 와보라고 대담하게 손짓한다. 어이없지만, 녀석의 해맑은 웃음에 꼬였다. 경태가 불쌍하다고 어쩌다 스포츠토토에 중독되어서 저렇게 되었는데 착한 아이란다. 그래서 본인이 구해주려 한다며. 진술서 대충 쓰고 우선급식권으로 특식인 돈가스를 실컷 먹는 행운을 누리려 한다며 웃었다. 자기를 괴롭힌 나에 대한 뒤끝도 없는 모습에 미안했다.
3학년 1반의 복도에서 진율이와 경태는 싸웠다. 수학도 못하면서 맨날 수학만 푼다고 놀리기에 수학 문제 풀기 내기를 했는데 진율이가 졌다. 진율이는 경태가 정답지를 보고 풀었다고 우겼고, 경태가 주먹을 휘둘렀다. 학생부장이 진율이 편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진율이는 경태를 신고하지 않았고 경태를 강제 전학 보내려는 학생부장의 바람은 비껴갔다. 경태는 3학년 부장의 말과는 달리 다른 아이들과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경태가 돈을 못 갚으면 경태 엄마가 와서 다 줬고, 힘도 없어서 몇 대 건드려도 아프지도 않단다.
억울한 눈물을 쏟아질 때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숨을 곳만 찾다가, 이런 곳이 없을 땐 무조건 지지해 줄 내 편을 찾는다. 내 편만 있으면 한 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기에. 그러나 내 편도 찾을 수 없고 숨을 곳도 없으면, 풀이 죽고 쪼그라든다. 누구라도 자꾸 쪼그라들면 말라비틀어져 견디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에겐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나에겐 쪼그라든 아이들이 기댈 수 있는 그들의 편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기대어 울 곳을 찾지 못하는 아이를 다독거렸거나 오들오들 떨고 있던 아이의 차가운 손을 잡았던 기억은 선생 노릇하면서 들었던 어색한 존경의 말보다 훨씬 뿌듯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