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그 어느 해 고등학교 국어시간. 교과서 없이 수업하는 특출한 실력 때문에 '특급투수'라는 별명이 붙은 국어선생 A가 책상 밑으로 책을 깔아 놓고 독서삼매경에 빠진 내게 백묵을 던졌다. 백묵은 정확히 정수리에 맞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백묵과 읽던 책을 가지고 튀어 나온다. 실시!" 아이들은 '너 이제 죽었다'며 고소한 표정이었다. 나 역시 다리가 후들거렸다. 수업시간 소설책을 보다 변을 당한 아픈 기억이 있어서다.
책을 보더니 A는 말했다.
"당신들의 천국이라... 다 읽었나"
"거의 다 읽었습니다."
"어떤가"
"너무 좋습니다"
"뭘 느꼈나"
"우리들의 천국은 어디일까. 이 교실은 천국일까."
아이들이 "와!"하고 웃었다. A는 묘한 웃음 지으며 말없이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지금도 애매모호한 미소를 짓던 A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70년대는 한국문학은 최고의 전성기였다. 시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도 상업소설과 참여소설, 장편소설 등 장르를 불문하고 나름대로 두터운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었다. 대중한테 골고루 인기 있던 최인호 한수산 조해일. 장편소설로 일가를 이룬 홍성원 황석영 김주영. 여기에 참여문학 역시, 많은 독자들을 몰고 다녔다. 나는 이청준을 좋아했다. 사변적이기는 하지만 정치색도 없고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그의 모든 소설을 좋아했다. 그중 '당신들의 천국'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 읽기 말고 특별한 놀이가 없던 때였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읽은 만한 책 없냐고 물을 때 '당신들의 천국'을 빌려줬다. 빌려간 책은 돌려주지 않는 게 상식(?)인데 신기하게도 모두 책을 들고 왔다. 친구 A는 책을 주며 책 뒷면 속지에 '우연히 잡힌 책 한 권이 운명의 지침을 흔들 줄이야'라고 적었고, B는 '문학에서는 유일한 정답이 없고 독자의 수만큼 해답이 존재한다'로 C는 '책은 눈으로 읽지 말고 마음으로 읽을 것. 때로는 눈시울이 뜨겁고 , 기쁨으로 목이 메면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밀물처럼 가슴에 부딪혀 온다'라고 적었다. 마치 추사의 세한도에 문인들이 소회를 적듯이 말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그런 책이었다.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를 모티브로 삼았다. 환자들에게 낙원을 건설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조백헌 원장, 이를 견제하는 보건과장 이상욱, 둘 사이에서 미묘한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는 섬주민을 대표하는 황희백 노인. 이 세명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이 소설의 근간을 이룬다.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이론'을 풀어헤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이청준이 이 글을 '신동아'에 연재할 때가 74년과 75년. 박정희의 전횡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소설을 가리켜 '이청준의 정치학'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신들의 천국'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당하는 자의 관계를 다룬다. 복종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이청준은 이 소설을 통해 이렇게 주장한다. 천국이란 인간이 당신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진실로 일치할 때, 그리고 운명의 뿌리를 함께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건설되는 것이라고. 만일 이런 것이 배제된다면 모든 낙원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이며 '동상의 천국'이라고 말이다. 마치 지금 우리 사회가 국민은 배제된 채 '정치인들의 천국'으로 전락한 것과 다름 아니다. 훗날 이청준은 '자서전들 쓰십시다'에서 '동상' 부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동상은 지으려 해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어져서 지어질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지으려고 해서 억지로 짓는 동상은 탐욕의 거짓 표상일 뿐입니다. 속임수일 뿐입니다.'
‘근대 소설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문적인 지성을 보인 작가’로 평가 았던 이청준은 2008년 7월 31일 6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 최고의 작가중 한명이라 아쉬움은 컸다. 그는 한국영화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김수용 감독의 '병신과 머저리'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그의 작품이 원작이다. 그러나 이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가 한동안 그를 잊고 있던 중, 2023년 이윤옥이 쓴 '이청준 평전'이 발간되면서 위대한 작가 이. 청. 준 석자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내용은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평전이 세상에 나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족- 내 고등학교 시절 인기 작가는 단연 최인호와 한수산이었다. 특히 한수산 인기는 한국일보 연재소설 '해빙기의 아침'이 두 권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절정을 맞았다. 그 어느 날 수업 중 나는 새벽까지 읽다만 '해빙기의 아침'에 정신줄 놓고 있었다. 국어시간이라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그건 순진한 내 생각이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당해 본 사람을 알 것이다. 싸~해지는 교실 분위기 말이다. 언제 내 뒤로 왔는지 국어선생 B의 손두껑만 한 손이 내 등짝을 강타했다.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안경이 떨어졌다. 그날 안경이 깨지지 않았다면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깨진 안경으로 눈이 뒤집히는건 나였어야 했는데 오히려 B였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수업 중에 뭐 읽어! 책표지가 불그스름한 게 문제였다. 야설이라고 확신한 B는 마침내 시계줄을 풀었다. 시계줄을 푼다는건 더이상 수업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엄청 얻어터졌다.'지옥'이 따로 없었다. 지금도 의문이다. 같은 국어선생인데 A와 B는 왜 그렇게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