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생이 되기 전까지

세상 물정 모르던 사회 초년생의 과거

by 글임자
22. 9. 17.

< 사진 임자 = 글임자 >


사실 나는

과거에

잘못을 했던 적이 있다.

2003년 대학 졸업을 하고도 그땐 철이 없었나 보다.

세상 일에 시큰둥하게, 이렇다 할 미래 설계도 없이

'그냥 살았다.'


대학 다닐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알바는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가 '필립모리스 바다사랑 캠페인'(이라고 기억한다.) 활동으로 바다 주변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다.

여름 방학기간이었고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

다른 하나는 근처 도자기 공장에서 겨울 방학 때 한 달 정도 도자기 굽는 일에 보조 인력으로 투입돼 아주 단순한 일을 했었더랬다.


남들이 흔히 하는 음식점 서빙이나 카페 알바 이런 것들(힘들다고 하더라)은 아빠가 꿈도 못 꾸게 하셨다.

"그 돈 아빠가 줄 테니까 알바는 하지 말아라."

남의 편도 해 봤다는 음식점 서빙, 카페 알바, 그 흔한 것도 내가 못해 보다니, 그에겐 있지만 나에겐 없는 것, 알바 경험의 결핍에 느닷없이 샘이 나고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

무척이나 그런 일들을 해 보고 싶어 했다.


오해는 마시라~ 대단한 부자여서가 아니다.

다 이유가 있다.

우리 집은 그 당시 농사를 정말 열심히 많이도 힘들게 짓는 집이었다.

여름엔 담배가 한창이라(방학 기간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담배 수확 시기 덕분이다) 내가 동원됐다. 겨울엔 시금치, 갓 작업에, 봄, 가을엔 틈틈이 각종 채소를 재배해서 성실한 나의 부모님은 4남매를 길러 내셨다.

밭에 이거하고 끝나면 금세 저거 하고 또 끝나면 딴 거 하고.

오죽했으면 철없던 나는 부모님께

"땅도 좀 쉬어야지. 땅이 욕하겠소."

라고까지 했었다.

(그게 부모님 부귀영화를 바라고 그러신 건가. 4남매씩이나 되는 자식 생각해서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고급인력이었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도 잘 엮어, 채소는 또 어찌나 손 빠르게 잘 다듬었는지.

동네에 일할 사람도 없거니와, 일꾼으로는 아주 몹쓸 정도가 아닌 딸은 훌륭한 영농후계자감이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에 따른 보상도 따랐었다.

가끔 약속한 임금이 제 때 지불되지 않아 부모님을 악덕 업주로 몰아세운 적도 있었지만 말이다.

사실 힘들게 농사짓는 부모님을 옆에서 보면 안 따라나설 수가 없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부모님 일손을 도와가며 알바에 큰 미련 없이 4년을 보내고 졸업 후에도 이런저런 일을 조금씩 했다.

국민연금에 계약직으로 잠깐 들어가서 한창 등급 조정을 위해 연금을 더 올려서 내라고 독려하는 전화를 마구 돌렸었고, 어디 신도시가 생기니 '땅값이 많이 오를 거다' 알선하며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땅 구입을 권유하기도 했었다.

그중 단연 으뜸, 잊을 수 없는, 지금도 꿈만 같던 경험은 바로 오전과 오후 회사가 달라지는 곳에서 일했던 것이다.


오전에는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저희 회사와 제휴를 맺어서 어쩌고 저쩌고~"

오후에는

"안녕하십니까, 00 관광호텔입니다. 이번엔 저희 호텔에서 어쩌고 저쩌고~"

00 관광호텔이 당시 실제로 있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이제 와서.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쩜 저렇게 허술할 수가 있었을까'도 싶고, 사람들이 어쩌면 순진하게 개인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지도 정확히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로 다 알려주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20년 전의 일이라 그땐 지금처럼 개인정보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분위기였던 것 같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들이다.


더욱 뜨악했던 것은 전부 여성들만 텔레마케터(스스로를 텔레마케터라고 칭했다.)로 있는 곳이었는데 , 10시가 넘어 쉬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시간이 되니까 다들 사라졌다. 내가 가장 늦게 합류한 멤버이기도 해서 아직 친해지지 않기도 했지만, 순식간에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직원들이 사라지자 어리둥절했다.

세상에, 만상에!

개구멍 같은 건물 구석 쪽문을 열어보니 거기 줄줄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 연기라면 질색팔색 하는 나라도 당장에 집에서 담뱃잎을 돌돌 말아와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아, 담배 농사짓는 집 딸이 선택한 최고의 근무환경이라니.

물론 어디까지나 나도 흡연을 기꺼이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비흡연자였으므로 고역이었다.


이효석은 낙엽을 태웠고, 그녀들은 담배를 태웠다.

어쨌거나 기호식품이라는 데에야 뭐.

쉬는 시간마다 나와는 다른 취향에 쉽사리 어울리지 못했고 슬슬 '지금 뭔가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내 그만두었다.

흡연자들의 세상이 싫으면 비흡연자가 떠나라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들에게 호소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거 국산 맞지? 담배는 국산으로 피워야 써!"


그곳은, 한마디로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뭔가 판매하는 그런 회사다. 그런데 그때는 철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사회 초년생은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런 생각도 못하고 그저

'희한한 경험 했네.'

이렇게만 생각하고 말았다.

나 같은 사회 초년생이 겁도 없이 휘말리기 딱 좋은 그런 곳이 그곳 아니었을까.

나도 정말 대책 없었다. 일은 제대로 하지도 못했으면서 월급은 받으러 갔다. 중간에 정신이 나서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두겠다고 하고 안 나가다가 월급날을 기억하고 있다가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은 일단 구매 성사(?)만 시킨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나중에라도 싫다고 취소하겠다고 하면 취소도 가능했다.

그걸 보면 또 이상한 회사는 아닌 것도 같고 좀처럼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안 좋게만 보려고 해서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이 미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전화로 어떤 상품들을 구매하도록 권유하는 전화들이 마구 쏟아지는 걸 보면 그런 비슷한 유형의 회사인지도 모른다.

여러 건을 성사시켰더라도 마지막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그것도 월급 받으러 가서 처음 알았다.


월급 받으러 왔다니까 사장님이 어이없어하면서 내가 근무하는 동안 5건 정도 했는데 취소된 건을 빼면 3건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아니 2건이었나?)

그 말은 '양심이 있으면 알아서 퇴장하라'는 의미였을 텐데 난 당시 무식하고 용감한 데다가 챙겨가면 짐만 되고 무거울까 봐, 결정적으로 잃어버리면 절대 안 되었으므로 양심도 안 가지고 가서 '무조건 월급을 달라'라고 했다.

물론 온전치 못한 월급이었지만 말이다.


요즘은 어딜 가나 개인정보가 중요시되고, 처벌도 엄중한데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항상 신경 쓰이고 마음에 걸렸던 과거다.

제발이 하도 저렸던 도둑은 지은 죄가 있으니 공무원 생활하는 동안 정말 개인정보 하나만은 철저히 관리했다.(고 자신하고 싶지만 완벽할 수는 없었으리라.)

'나의 실수로 민원인에게 티끌만 한 피해라도 생겨서는 안 돼.'

라고 항상 생각을 했다.

공무원이 된 후에는 항상, 무거워도, 거추장스러워도, 숙명처럼 '양심'이란 것을 늘 챙기고 다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