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와 담판 지었다

가을은 김장 담판 짓는 계절

by 글임자
2023. 10. 6. 김장을 기다리는 친정 배추 우정 출연

< 사진 임자 = 글임자 >


"올해는 배추 몇 포기나 심으셨어요?"

"얼마 안 심었다. 150 포기 심었어."

"그렇게나 많이요?"

"올해는 조금만 심었다. 하다 보면 또 죽기도 하니까 그 정도는 심어야 돼."

"정말 그렇겠네요. 그게 다 잘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많이 심으셨네요, 어머님. 설마 그거 다 김장하실 건 아니죠?"


말이 150포기지 100 포기도 많은데, 게다가 시부모님은 베테랑 농부시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 배추들과 함께 하실 텐데, 중도에 포기하는 배추는 없는 편인데 어쩌자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배추를 심으신 거람?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문득 친정 텃밭에 있는 배추가 생각났다.

하긴, 우리 집도 만만찮게 많이 심으셨다.


"너희도 갖다 먹고 하려면 김장 많이 해놔야지."

"아니에요! 어머님, 저흰 안 주셔도 돼요. 저희는 반 포기면 한 달도 더 먹어요.(이건 조금의 거짓도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집에 많이 먹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 너는 안 줘도 되겠냐?"

"네, 어머님. 진짜로 주지 마세요.(=정말 진정,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심입니다.) 제가 조금씩 만들어 먹을게요.(=맛은 보장 못하지만 저도 김치 만들 줄 알아요. 모르면 배워서라도 기어코 만들겠어요.) 그리고 김장철 되면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오는데 어차피 그것도 다 못 먹어요.(=둘러대는 게 아니라 그건 정말 사실이에요. 어쩔 땐 미안한 말이지만 그 김치들도 귀찮아요.)그러니까 저희 줄 생각은 하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김장 덜 하세요.(=김장 택배 명단에 아들 며느리는 없다고 생각하세요.) 두 분만 드실 거면 얼마 안 해도 되시잖아요.(=딱 두 분 드실 것만 하시는 게 어떠세요?) 차라리 사 먹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솔직히 그게 더 싸게 먹혀요. 김장한다고 고생 안 해도 되고, 요즘은 위생적으로 맛있게 잘 만드는 데도 얼마나 많다고요.)"

"그럼 너는 안 갖다 먹을래?"

"네, 옛날에 받은 김치도 많이 남았어요. 그리고 제가 요새 김치 조금씩 만들어 먹어요. "

"그러냐?"

"얼갈이김치도 담가봤고, 저번엔 친정에서 파 뽑아와서 파김치 담갔어요.(=들으셨죠, 어머님! 저 파김치 만드는 며느리예요.) 근데 합격이 아범은 맛없다고 하더라고요.(=어머님 아들이 아주 배가 불렀죠. 호강에 겨워가지고 맛이 있네 없네 따지고 있네요.) 전 먹을 만하던데요.(=세상에 사람이 못 먹을 음식이 얼마나 있겠어요?)"

"파김치를 다 했어?"

"네. 작년에도 몇 번 담가 먹었어요. 무도 하나 샀더니 많더라고요. 무 생채도 만들어주니까 애들도 잘 먹던데요. 섞박지도 담갔는데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그러니까 필요하면 제가 조금씩 만들어 먹을 테니까 저희 것은 김장 안 하셔도 돼요. 진짜예요, 어머님. 무 하나 가지고도 몇 주째 먹고 있어요 지금. 그리고 저흰 겉절이를 잘해 먹으니까 김치 많이 저장해 놓고 안 먹어도 돼요."

"그래. 알았다. 그럼 너희 것은 안 할란다."

"진짜로 하지 마세요!"

"알았다. 그래도 여기저기 나눠 먹으려면 좀 해야지 어쩌냐."

"무릎도 안 좋으신데 김장을 어떻게 한다고 그러세요?"

"너희 아버님이 그래도 하라고 할 것이다."

"그냥 조금 사서 드시면 안 돼요?"

"그래도 내가 해야지. 해서 이모네랑 외삼촌네도 부쳐주고 해야지."

"힘들게 해서 다 부쳐 주시려고요?"

"어쩌겠냐. 다들 혼자 사는데 김치라도 부쳐 줘야지."

"저도 김장할 때 못 갈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세요? 아무튼 저희는 주지 마세요."

"알았다, 너희 것은 안 할란다."

이번 추석에 또 담판을 지었다.(고 나만 혼자 생각했다.)


불과 작년의 일이다.

"어머님, 저는 김치 안 주셔도 되니까 김장하실 거면 저희 몫은 빼세요."

"그래? 진짜 안 줘도 되겠냐? 한두 폭만 조금 보내주려고 했는데 보내지 마?"

"네. 정말 괜찮아요. 절대! 보내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그럼 올해는 너희 것은 안 할란다. 나도 몸도 아프고 많이는 못하겠다. 우리 먹을 것만 조금 할란다."

하지만, 작년에 소리소문 없이 어머님은 김장을 하셨고, 어느 겨울날 김장김치가 문 앞에 배달되었다.

김장철이 닥치기 전, 작년에 남편과 나는 모의를 했다.

"어머님이 자꾸 우리 주려고 김장도 많이 하시는 것 같아, 사람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우리한테 주는 것도 많은데 우리 엄마집에도 한 박스나 부치신다니까. 두 세 포기만 있어도 우린 몇 달 먹을 텐데. 어차피 김장하러 가지도 못할 것 같은데 아예 우리 것은 빼라고 말씀드려. 양심 없이 같이 일하지도 않으면서 얻어먹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거기서 안 받아도 여기저기서 조금씩 주는 걸로도 충분해. 정 안되면 조금 사서 먹음 되지 뭐."

"알았어. 근데 그래도 엄마가 보내실걸?"

"그러니까 단단히 말씀드리란 말이야. 아예 우린 김장할 때 안 갈 거라고 말씀드려. (남들은 몰라도 시부모님은 그러시진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도와주러 안 온다고 욕먹어도 할 수 없지."

"알았어. 그렇게 말해볼게."

"'말해볼게'가 아니라 꼭 그렇게 하시라고 하라니까. 내가 자꾸 말하면 또 듣기 안 좋을 수 있으니까 나보다는 아들이 말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일단 알았어."

그래서 우린, '김장날 안 가고 안 갖다 먹기 운동'을 실천하려고 했다.

불효막심한 아들내외여서가 아니라, 어머님 몸도 편찮으신데 우리가 한번 이렇게 '모질게' 나가면 어머님이 김장하는 양을 좀 줄이실까 싶어서 그랬던 거다.

김장하는 데 얼굴도 안 비친다고 욕먹을 각오를 하고 세게 나가기로 남편과 합의 봤다.

어찌 된 일인지 언제 김장을 하겠다는 말씀도 없으셨고, 김장할 때 올 수 있겠냐고 묻지도 않으셨다.

그래서 우린 정말 어머님이 심경상의 변화를 일으켜 두 분 드실 것만 간단히 하시려나 싶었다.(고 단단히 착각했던 것이다.)

김장을 했다면 정 많은 어머님이 아들 먹일 김치를 보내지 않으실 리가 없는데 12월이 다 지나가도록 별말씀이 없으시길래(보통 시가는 12월 초에 김장을 해 왔다는 스몰 데이터를 내가 잘 꿰고 있었다.) 정말 극소량으로 파격적인 김장을 하신 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들 며느리를 괘씸하게 여기시는 건 아닌가, 한편으로는 염려스러웠지만(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큰 일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김장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한 번 이렇게 나가면 어머님도 뭔가 생각이 달라지시겠지.

'얘네들이 안 온다더니 정말 안 오네. 안 갖다 먹겠다더니 정말 달라고 안 하네. 에이. 다음부터는 나 먹을 것만 조금만 해야겠다.'

라고 어머님이 생각하실 줄 알았다 나는, 순진하게도.

정말 이번에는 어머님이 과감히 우리 몫을 패스하셨나, 좋아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 때쯤 김장 김치는 도착했고 나는 또 뻔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 김치 왔어요. 안 보내셔도 된다니까 또 보내셨어요? 저는 가서 일하지도 않았는데."


작전 실패다.

반갑다기보다 솔직히 답답하기도 했다.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안 줘도 된다고 그렇게 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또 힘들게 김장해서 보내셨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게다가 아들 며느리가 빠진 그 자리를 어머님과 친한 동네 멤버들이 그 자리를 빛내 주셨다고 한다.

졸지에 '김장날 코빼기도 안 비친 아들 며느리'가 된 우리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김장날 아들 며느리가 무조건 와서 해야 한다고 법에 나와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러려고 어머님께 그렇게 부탁한 게 아닌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의별 말을 다 한다.

"근데 아들 며느리는 왜 안 왔어?"

라는 말이 분명히 나왔을 것이라고 100% 확신하는 바이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요단강을 건너버렸는데 어쩌랴.


작년에 그 사건이 있었지만, 이게 굴하지 않고 추석에 시가에 가서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님과 '딜'을 했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우리 몫의 김장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이다.

알았다고 알았다고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올 겨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나가지 않으면 어머님은 그 막대한 김장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실 것이다.

어떻게 해야 현명하게 어머님의 일거리를 줄일 수 있을까.

이왕 불량 며느리로 소문이 나 버린지도 모를 일, 일단은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 느낌은 뭐지?

나름 작정하고 딜을 했다고 여겼는데,

담판을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님과 합의가 된 걸로 믿었는데,

나 혼자만 북 치고 장구 친 이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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