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시어머니가 양심 고백을

참 고소하다.

by 글임자
2023. 10. 7.

< 사진 임자 = 글임자 >


"며늘아, 그거 어쩌더냐? 참기름 말이다."

"참기름이요?"

"그래. 맛이 괜찮더냐?"

"네. 고소하고 좋던데요? 깨 농사는 정말 짓기 힘들다던데 어쩌면 그렇게 깨 농사를 잘하셨어요? 얼마나 많이 하셨길래 이렇게 저한테 많이 주셨어요?""

"아... 그러냐. 다행이다."

"갑자기 왜요, 어머님?"

"그게 말이다... 내가 한 거랑 중국산이랑 좀 섞었다."

"......"


이건 좀 당황스러운걸?

뭐랄까,

순수 100%라고 믿었던 시가 참기름이 허무하게 왈칵 쏟아져버리는 기분이랄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시나 했더니,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꽤 오랫동안 벼르던 양심 고백을 하신 것 같았다.

"내가 너한테 진작에 말하려고 그랬는데."

"아, 그러셨어요?"

"그래도 맛은 괜찮지? 그것이 섞어도 괜찮더라."

"네, 괜찮아요."

"암만, 내가 농사지은 것만 해서 짜면 참기름 얼마 나오지도 않지."

"하긴, 정말 그렇겠네요."

갑자기 원효대사가 된 기분이라니.

그렇게 고소하게 느껴지던 참기름이, 그 맛이 그 맛이 아닌 것 같았다, 간사하게도.

여태 시어머니가 주신 참기름을 고소하다고, 맛나다고, 역시 시골에서 직접 농사지어서 짠 거라 그런지 확실히 다르긴 다르다고, 뭔가 차별화된 맛이라고 오두방정을 떨면서 여기저기 인심 쓰고 한 병씩 다 돌렸었는데, 웬 마른하늘에 참깨가 우수수 떨어지는 상황이란 말인가?


"참기름 남았냐? 내가 너 오면 주려고 진작에 참기름 다 짜놨다. 갈 때 잊어버리지 말고 꼭 챙겨 가라."

이러시면서 시가에 가면 으레 기본적으로 참기름을 두 세 병씩 내 손에 들려주시곤 했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시가에만 가면 참기름 앞에서 자동 반사가 되기 시작했다.

시가 가는 날 = 참기름 수거하는 날.

순식간에 이런 공식이 성립됐고 염불보다는 잿밥에 '심히' 관심을 두었다.

어떤 날은 그 참기름병들이 서로 부딪쳐 깨지지 않도록 미리 손수건을 몇 장 챙겨가는 치밀함까지 다 보이기도 했다.

행여라도 시어머니가 우리가 떠날 때까지 그 갈색병을 꺼내오지 않으시면,

"어머님, 저번에 주신 참기름 정말 잘 먹었어요. 애들이 참기름을 좋아해서 많이 먹어요."

라는 말을 반드시 빠뜨리지 않고 살짝 어떤 힌트를 주었다, 시어머니가 깜빡하신 그것을 상기하시도록 말이다.

그 와중에,

"합격이 아범이 참기름을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어머님 아들이 제일 잘 먹어요!"

라고는 차마 거짓말할 수 없었다.

우리 집에서 참기름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멤버는 단연 시어머니의 며느리인 바로 나다.

"참기름은 왜 뿌렸어? 난 참기름 넣는 거 별론데."

라며 거의 모든 음식에 참기름을 들이부어 먹는 나와는 달리 시어머니의 아들은 진심으로 참기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양심상 그분의 아들을 팔아먹을 수는 없었다.

"안 먹으면 내 몫이 많아져서 난 더 좋지. 안 먹을 거면 먹지 마!"

라며 좋아하기까지 했더랬다.

나는 반칙 같은 건 하지 않으려고 하는 며느리다.(라고 혼자만 생각해 왔다.)

차선책으로 아이들을 소환하는 것으로 그쳤다.

사실 아이들도 나를 닮았는지 다행히(?) 참기름을 좋아한다.


어느 해였던가?

한 번은 시어머니가 참기름을 10병이나 챙겨 주신 적이 있었다.

설마, 나보고 이거 팔아 오라는 뜻인가?

많아도 너무 많은걸?

잠깐 주책맞은 생각도 했다.

"이거 너희 새언니들이랑 나눠 먹고 엄마도 갖다 드리고 해라. 친구도 좀 주고."

참기름계의 큰손, 나의 시어머니이시다.

"세상에. 참기름을 이렇게 많이 짜셨어요? 이렇게 많이 나온 걸 보면 깨 농사 진짜 잘 됐나 보네요. 잘 먹을게요, 어머님."

"으... 응. 그래."

그때 뭔가 석연치 않았던 시어머니의 대답이 지금 돌이켜보면 다 이유(어머님의 참깨와 중국 참깨의 건전한 만남이랄까?)가 있었던 걸까?

당시에 나는 그 참기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우쭐대며 인심을 썼던가?

얼마나 요란하게 유세를 떨었던가?

"세상에, 우리 몫까지 챙겨 주셨어? 고맙기도 해라. 아가씨, 내가 전화 한번 드려야겠네."

이렇게 말하며 내가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리는데도 '굳이' 시어머니와 전화 통화 한 번 하게 해 달라며 기어이 통화를 해버린 나의 첫째 새언니,

"나는 시어머니가 농사지어도 깨 한 알 안 주던데, 넌 좋겠다."

그러면서 부러움을 한껏 내게 넘겨주고 참기름 한 병을 받아가던 내 친구,

"어쩜 시어머니가 이렇게 정이 많으시다니? 고마워. 잘 먹을게. 요즘 사 먹는 건 거의 다 중국산이야. 이렇게 귀한 건 돈 주고도 사 먹기 힘들어."

라는 말로 얼굴도 모르는 남의 시어머니를 예찬하던 직장 동료,

"아이고, 깨 농사하기가 보통 일이 아닌데 이렇게나 많이 주셨다. 덕분에 당분간 참기름 걱정 덜었다."

라고 말씀하시며 그 누구보다도 가장 기뻐하던 우리 엄마.

심지어 그것을 다시 당신의 막내 동서 재보시 하는 자비로움까지 보여 주셨다.

그렇게 나의 시어머니의 인정스러움과 넉넉한 마음씨가 조선 팔도로 멀리멀리 퍼져갔었는데, '너 시어머니 정말 잘 만났다.'라든가 '세상에 이런 시어머니 없다.'라는 칭송 세례를 다 끌어다 받았는데.

아!

바야흐로 나도 이제 그들에게 양심고백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 걸까?

과연,

해야만 하는 걸까?

(엄마는 세상에 가장 비능률적이며 비효율적이고도 '결정적으로 바치는 수고에 비해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친정에서는 그때까지 깨 농사를 짓지 않으셨기 때문에 사돈에게서 물 건너온 참기름을 언제나 두 팔 벌려 적극 환영하셨다.

신이시여, 저는 그들의 기억 속에 아름답고도 인정 많은 시어머니로 기억될 그분에 대한 환상을 지켜줘야 하나이까, 아니면 이제라도 사실은 '외제'가 살짝 섞였었다고, 그대들이 찬양해 마지않았던 그 갈색병은 사실 순수 혈통은 아니라고 양심고백을 해야 하나이까?

이미 그 액체들은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된 지 한 오백 년일 터인데...


국내산이면 어떻고 국외산이면 어떠랴?

그렇다고 참기름이 거짓기름이 되는 것도 아닌데?

한 병이라도 더 만들어서 더 많이 나누고 싶은 시어머니의 마음이 국내산과 국외산의 만남을 주선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고맙게, 맛있게 먹으면 될 일이다.

이제 와서 그 깨의 출신은 따져서 무엇하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깨는 잘못이 없는데?

참기름은 고소한 죄밖에 없는데?

다만, 잘못(?)이 있다면 환상의 비율로 국내산과 매우 적절하게 배합이 잘 되어 감쪽같이 서로 융화된 후 한 병의 참기름으로 거듭난 죄(?) 밖에는...

아,

이렇게나 구수~한 나의 시집살이...

이웃나라 출신까지 너그럽게 포용하여 탄생한, 이름하야 '퓨전 참기름'

며느리는 올해도 '외제'가 섞인 그 갈색병 기꺼이 적극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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