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10. 3. < 사진 임자 = 글임자 >
"브런치 지역 공무원 필기 합격자 발표 났는데 이 수험 번호가 혹시 임자씨 수험 번호 아니에요? 얼른 확인해 봐요. 확인한 다음에 꼭 연락 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필기 합격자 발표를 하던 날이었다.
필기시험을 끝내고 난 직후에는 발표일만 기다리고 있자니까 시간은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리게도 가더니만 부모님 일손 도와드리느라 단순한 생활에 젖어 살다 보니 어느새 심판의 날이 도래했던 것이다.
머리 무겁고 심란할 때 역시 사람은 단순하게 살 필요가 있었다.
필기 합격자 발표할 당시는 아직 전화번호가 오가기 전이었기 때문에 '2등 타령 쪽지남'인 'Mr. 때문에'는 쪽지에 무던히도 집착을 했다.
이건 뭐지?
다 커서 분리불안인가?
좀처럼 내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잖아?
불길해 불길해...
조짐이 좋질 않아.
그날도 세상만사 시름 다 잊고 일을 하고 점심때쯤 집에 돌아오니 쪽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건 뭐 완전 출판사에 자기 책 좀 내 달라고 투고하는 수준이었다.
행운의 편지도 아니고 나한테만 100통을 다 해치워버리겠단 건지 외간 남자의 쪽지가 귀찮을 정도였다.
(내 기준에서) 무척이나 한가해서 효녀 처자에게 쪽지 보내는 일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던(것으로 추정되는) '때문에'씨는 내게 쪽지만 주야장천 보내왔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들의 쪽지 속에서도 알맹이는 단연' 지방직 공무원 시험 필기 합격자 발표'와 관련된 것이었다.
경건하게 성경을 필사하듯, 금강경을 필사하듯 그는 합격자의 수험번호를 그대로 내게 전달해 주었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남의 일에 어쩜 이리도 지극정성이더란 말인가.
그건 그렇고 내가 알아서 확인할 일인데 뭘 굳이 연락까지 또 해달라는 거람?
아, 그는 정말 할 일도 없는 무료한 사람인가 보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중생을 다 구제하기 전까지는 부처가 되는 일을 미루겠다'는 지장보살님의 마음으로 감히 '독거 수험생' 구제에 나섰다.
생각해 보면 그 구제자가 꼭 나일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가엾은 젊은이, 수험 공부만 하던 사람이라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거야, 적당히 연락하다가 나중에 연을 끊으면 되지 뭐.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뭐 어때.
또 다른 사람이 상대해 주겠지.
2009년 지방직 일반행정 필기 합격자 발표가 6월 중순쯤엔가 있었던 것 같다.
5월에 시험을 마치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어느새 합격자 발표날이 다가왔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
이미 결론은 시험을 치른 그날 한 달 전에 나버렸을 것이고 발표일이 지나고 하루 이틀 사이에 무슨 일 나는 것도 아닐 것이며 합격자가 바뀌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너무도 불안한 나머지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양심도 없이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고 치렀던 기존에는 합격할 가망도 전혀 없었는데도 합격자 발표날만 기다리며 가슴을 졸이곤 했었다.
그래 맞아, 생각해 보니 그 해에는 모든 게 전과 달랐었지.
공무원을 준비하는 카페 '구꿈사'가 낳은 그 시대의 최고의 분리불안남인 '때문에'씨로부터 먼저 연락이 왔었다.
참 친절한 동생이란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내 남동생과 동갑이고, 나는 그의 둘째 누나와 동갑이었다.
그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종종 그에게서 '경로우대 사상'이 우러나올 법하게 연장자 행세를 일삼곤 했다.
자신도 지원했던 지역에 합격자 발표 났으니 얼른 확인해 보라고, 혹시 그 번호가 내 수험번호 아니냐면서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떨었다. 내 남동생이나 남의 남동생이나 철없어 보이는 것은 똑같다.
역시나 자신은 나 때문에 2등으로 떨어진 것 같다며, 그 와중에 잠시도 2등 타령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점수는 철저히 보안 강화에 힘썼다. 필기시험에 떨어지면 불합격자는 자신의 점수를 확인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점수가 얼마나 나왔는지는 끝내 비밀에 부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남의 점수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잽싸게 컴퓨터 전원을 켰다.
아무리 내가 확인할 수 없다고 해도 아무 말이나 마구 해대는 그는 이젠 관심 밖이었다.
단순한 몇 개의 숫자로 조합된 내 수험번호를 외우고 있을 리가 없었다.
밤손님이 엄마의 금붙이를 다 털어간다 하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테지만 내 분신과도 같은 수험표는 참기름 보관하듯 빛도 안 드는 곳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도둑에게는 전혀 쓸모없을 내 수험표를 찾아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당시의 풍경이.
점심을 차리기 위해 먼저 집에 도착해서 뜻밖의 소식에 마음은 이미 미친 듯이 널을 뛰고 있었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때문에'씨의 긴급속보에 고마운 마음도 잠시 화면에 선명한 그 수험번호와 내 수험번호를 일일이 대조해 갔다.
숫자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책 한 번 쳐다보고 공책에 한 번 옮겨 적고 하듯이 화면 한 번 쳐다 보고 내 수험표 한 번 쳐다보고를 수 십 번 했다.
수 십 번을 봐도 똑같다.
그 필기 합격자의 수험번호와 나의 수험번호는 일란성쌍둥이였다.
세상에, 내게도 이런 일이!
드디어 내가 일 저지른 거야?
아무렴, 크게 저지를 때도 됐지.
아니 조금(그러나 매우 많이) 늦긴 했지.
그런데 이 기분은 뭐람?
합격했네.
끝.
그 순간에는 기쁘다는 마음도, 가슴 벅찬다는 느낌도, 해냈다는 성취감도,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다.
필시 장수생의 생활고에 찌들어 내가 어떻게 되어버린 것이야.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던 그 순간, 기쁨도 행복도 내 것이 아니었다.
간절했던 바람이 차고 넘쳐 쏟아지게 되면 그렇게 되는 법도 있는가 보았다.
나는 그동안 사위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