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증 난 여자, 그것도 모르는 남자

2009년 희대의 꺼삐딴 리

by 글임자
22. 10. 8.

< 사진 임자 = 글임자 >


"어차피 우리 둘 다 할 일도 없잖아요. 여기까지 오기 정 그러면 제가 임자 씨 있는 데로 갈게요. 어때요? 그럼 괜찮죠? 시간도 많이 안 뺏기고."


전생에 사람 못 만나 봐서 죽은 구신이 환생했나?


왜 이렇게 만나자고 야단이람?

수 억겁의 전생 동안 간신들의 모함에 멀리 유배당해 사람 구경도 못하고 살기라도 했단 말인가?

나 같으면 맨날 늘어지게 잠이나 실컷 자겠다.

아니면 하루 종일 뒹굴면서 책을 보든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남 걱정하고 있을 때는 아니지 참.


다음에 생각해 보자는데도, 아니 굳이 만날 것까지야 없지 않냐는데도 자꾸 날을 잡자고 보채는 '때문에 씨' 때문에, 나야말로 그 사람 때문에 한여름 무더위 아래에서보다도 더 지쳐가고 있었다.


어디 용한데라도 다녀오셨나 봐요.

언제가 길일이라고 하던가요?

최소한 손 없는 날로 택해야겠지요?


동생, 이 누님은 상당히 바쁘신 몸이란 말이지.

아니 왜 친누님들이 두 분이나 있다면서 남의 누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람?

내 남동생도 그렇게까지 자주 연락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하긴 남동생에게서 연락이 와 봐야 좋을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난 그를 친동생으로 입양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러지?

나를 자기 누나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뭐야?

이래서 남동생들은 철이 없다는 거야 , 내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어서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야겠어.


남의 누나야,

남의 누나랑은 쪽지 주고받는 것까지만이야.

함부로 만나는 거 아니야.


옳거니, 국가직 시험에서 커트라인을 훨씬 웃돌았다더니 (내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렇게 집요한 데가 있었군. 과연 합격할 만도 하겠어.

하지만 이런 집요함을 넘어 집착에 가까운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공무원보다 더 알맞은 직업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런 게 있던데?

채권추심단, 그래 그런 게 딱이야.

못 받은 돈, 떼인 돈 대신 받아준다는 그 직업 말이야.

이를 어째?

진지하게 이런 갑작스러운 제안 품에 안고 입을 뻥긋해보려면 당장에라도 만나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너무 저렇게 나오니까 오히려 더 뒷걸음질 치게 되는 게 사람 심리다.

고백하건대 물론 나도 처음에 몇 번 쪽지 오가며 소일거리 삼아 대화 몇 마디 나누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의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싫증을 금방 낸다는 것이다.

공평의 주님이 내게 모든 것을 주시진 않으셨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너무 허술한 것도 문제는 문제다.


공시생으로 오래 살게 되면 그것도 혼자서만 공부를 하던 사람은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고립된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시험이 끝났다고 해서 바로 속세에 물들지는 않는다.

부모님을 붙잡고

"이번 공무원 시험 커트라인이 몇 점이나 될 것 같아요?"

"내가 붙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런 식의 질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때는 자꾸 공무원 시험에 떨어져 좌절의 통화를 했던 나의 친구도 얼마 후 당당히 합격해 근무하며 '서울 남자'를 잘 만나고 있으면서 내게 위화감만 조성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독거 수험생 사정 독거 수험생이 안다.

하지만 수험생도 수험생 나름이잖아.


"때문에 씨'는 어디까지나 '지방직 공무원 시험'관련 대화만 나눠야 하는 사람이다.

느닷없이 만남을 요구해 와서는 아니 될 일이다.

이미 면접까지 다 끝낸 마당에 둘이서 같은 화제를 가지고 더 이상 이어나갈 이야깃거리도 없었다.

거기까지여야만 했다.

일종의'시한부 조건(온라인상) 만남'이라고 해야겠지.


나보고 '꺼삐딴 리'에 버금가는 기회주의자라거나 토사구팽의 화신이라거나 하는 등 그 어떤 비난의 말을 한다고 해도 달게 받겠다.


애초에 카페에서 내가 원한 것은 같은 지역에 응시한 수험생을 찾아 그의 점수를 확인하는 것, 그뿐이었다.

나의 경쟁 상대만 파악하면 그만이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그러나 "때문에 씨'의 관계 유지 능력은 탄력성이 매우 뛰어난 고무줄로 만들어진 것인지 늘이고 늘여도 끊길 줄을 몰랐다.

연장전에 연장전을 거듭했다.

부모님을 돕는다는 핑계로 나는 이쯤에서 어설픈 관계를 정리하고 싶었는데 눈치가 어지간히도 없는 남자다.

촬영 중인'접속'의 조기 종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공무원 시험에 '눈치보기'과목이 있었다면 과락을 결코 면치 못할 사람이다.

수 백 생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쪽지 주고받는 것도 지겹고 재미없어졌으니 이제 그만 연락하자."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사람이 모질지 못해서 탈이다 정말.

한 번 만나자는데 보자마자 끝내버리는 것도 깔끔하겠다 싶기도 했다.


처음엔 썩 좋은 국가직 점수를 받은 그에 대한 나의 태도가

'실력은 있는 사람이네, 눈치는 없지만 아주 바보는 아닌가 봐.'

이랬던 것이

'잘난 척 좀 그만했으면 좋겠네. 언제 봤다고 걸핏하면 잘난 척이야?'

라고 변했다.

이렇게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


사람이 진중하지 못하게 보이는 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내 동생도 아닌데 내가 무슨 상관이랴.

내 남동생도 어디 가서 저러고 있는지 누가 알아?

철없는 남동생들 걱정에 전국의 누나들은 시름 깊어진다.


내가 안 만나준다고 엇나가기라도 하면 큰일은 큰일인데, 이를 어쩐다?


우리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얘기하지 말랬는데, 카페에서 말을 튼 게 화근이었다.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카페에서 쪽지 주고받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나도 모를 일이다.

쪽지 주고받으면서 원수진 일도 없는데 한 번 만난다고 뭐 큰일이야 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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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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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 큰일.

그것도 어마 무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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