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겐 가장 낮고 작은 목소리로

특히 방학 중에는

by 글임자
2023. 12.21.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나 내일 7시에 깨워줘."

딸이 선창을 하자 아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나는 6시!"


이럴 수는 없어.

이래서는 안 돼.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남매가 말하는 그 시각이 오후 6시와 7시는 아니겠지?

그건 턱도 없는 소리겠지?


그날도 두 어린이는 9시가 넘도록 잠을 잘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까불고 놀다가 제 아빠에게 훈화 말씀을 듣고 겨우 (엄마만) 고된 하루를 마무리 지으려는 찰나였다.

순간 듣고도 믿기 힘든 발언을, 그들은 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뭐 하게?(=지금은 방학이잖아. 학교도 안 가는데 왜 그렇게 빨리 일어나? 오후 6시와 7시라면 적극적으로 너희 말대로 하겠어. 하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우리 사이에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다 할 일이 있지."

남매는 정확히 구체적으로 새벽부터(솔직히 그 정도면, 더군다나 방학 중인 어린이들에게는 새벽에 해당되는 시각이 아닌가?) 일어나서 무슨 원대한 꿈을 이루시려고 저러는 걸까?

그들은 절대 내게 다음날의 일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자고로 그런 일급비밀은 아무리 부모와 자식 사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마음속에서만 간직되어야 마땅하다는 듯이.

"너희 무슨 일이 있는데 그래?"

무슨 일이 있든 없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어떻게든 그들의 기상 시간을 늦춰야만 한다.

그러나 심지가 굳은 남매는 끝내 내게 그 어떤 것을 발설하지는 않았다, 물론.

"엄마, 7시에 깨워줘야 돼. 알았지?"

딸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고,

"그럼 나는 엄마 일어나자마자 그때 깨워줘. 엄마 6시에는 일어나잖아."

아드님은 한 술 더 떴다.

이러면 안 되지. 사람이 신의가 있어야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자고로 어린이는.

좀 전에 분명히 6시라고 해놓고 내가 일어나자마자 깨워달라니, 이 정도면 좀 선을 넘은 것 같다.(고 나만 느꼈다.)

설마 새벽같이 일어나서 출근하는 아빠를 위해 밥을 지어 상을 차릴 리는 절대 없을 테고 굳이 그렇게 이른 시각에 뭘 하시려고?

"엄마는 5시에서 6시 사이에 일어나는데. 그럼 그렇게 빨리 깨워 달라고? 어쩔 땐 4시에도 일어나는데."

입이 방정이었다.

차라리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아들에겐.

"그래? 아무튼 엄마 일어날 때 나도 깨워주면 돼."

아들은 '엄마만 믿어'라는 표정으로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조금 전의 말실수를 돌이킬 수 없어 낙담했다.

"엄마가 일어나는 시간은 보통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야. 너희 누나 방학 생활 계획표랑 비슷해. 그러니까 우리 아들도 9시까지는 절대 일어날 생각도 하지 마. 그냥 너희에게 아침은 안 온다~ 하는 생각으로 푹 주무시면 돼. 아침은 안 올 예정이니까 그리 알아. 개학하는 날 깨워 줄게. 아침이 밝았어도 안 밝았어, 알겠지?"

라고는, 내가 듣기에도 터무니없는 아무 말 대잔치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늦게 일어나자.

아들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새벽 4시에 일어났어도 난 안 일어난 걸로 치자.

어차피 내가 말만 안 하면 아들은 모를 테니까.

하지만 내가 언제 일어나는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결정적으로 내가 아는걸?

단지(물론 단지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는 양심상 말하긴 힘들지만) 어린이는 잠을 푹 자야 건강에도 좋다고 맹신하는 나였으므로 일단은 잠을 실컷 자도록 물심양면으로 아들을 돕자.

만약 6시에 일어나더라도 눈 한번 질끈 감고 8시 정도에 살짝 깨우는 '시늉'만 해 보자.

물론 남매의 원성을 살 수는 있겠으나 과감히 도전해 보는 거다.

그리고 학기 중에 아무리 깨워도 깨워도 쉽사리 기상하지 못하던 행태를 보이던 어린이들이었으므로 무리는 없을 듯했다.

운이 좋으면 내 계획대로 될 수도 있다.


아뿔싸!

다음날 눈을 뜨니 새벽 5시다.

별생각 없이 오디오 어학당을 듣고 있다가 전날 남매가 했던 부탁이 생각났다.

하필 그때 '입이 트이는 영어'에서 아들 관련 사연이 소개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까(눈은 떴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유치한 변명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합법적으로 아직은 아들을 깨우지 않아도 된다.

7시가 넘어가자 내적 갈등을 겪었다.

진작에 일어났으면서도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성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 양반의 아침을 다 준비하고 나만 먼저 아침을 먹고 나자 7시가 넘었다.

슬슬 시동을 걸어야지.

'최소한의 액션'은 나도 취해줘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남매가 따졌을 때 할 말이 있으니까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낮고 작은 목소리'로 아들을 향해 한마디 했다, 물론 들릴락 말락 한 그 정도로, 아직 잠결이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로 지극히 소극적인 목소리로.

"우리 아들, 일어나자, 자, 자, 자.(=그냥 자, 계속)"

살짝 몸을 뒤척이더니 크게 동요하지 않고 아들은 그 상태로 있었다.

휴, 다행이다.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나는 분명히 깨웠다.(비록 깨우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나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러나 안심하고 욕실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사이 나는 목격하고야 말았다.

어느새 A4용지 한 장과 책 두 권과 연필 한 자루를 들고 머리를 산발한 채 어떤 작업에 돌입하려는 아드님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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