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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당신

남편이 없는 사이에-후속편

by 글임자
2024. 8. 10.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아빠가 오늘 3시쯤에 올 거라는데."

딸의 비보를 듣고 나는 그만

"그렇게 빨리?"

라고 반사적으로 되물을 뻔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빨라.

빨라도 너무 빨라.


"어떻게 알아?"

"아빠가 어젯밤에 통화할 때 그랬어."

"그래..."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말이 1박 2일 워크숍이지 이건 사기다.

'1박 반일' 워크숍이라고 정정해야 한다.

너무한 거 아닌가?

1박 2일이라고 했으면 이튿날 오후까지 알차게 보내고 밖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컴백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 많이 나의 시나리오를 빗나갔다.

오전 9시, 나에게 주어진(도대체 뭐가 주어졌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은 단 6시간.

물론 6분처럼 느껴지는 시간일 것이다.

이제부터 난 무얼 해야 하지?

일주일 넘게 몸이 안 좋아서 병원도 가고 약을 먹고 있지만 계속 잠을 못 자서 낮 동안에도 생활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방학 중인 남매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활기에 넘치시고 말이다.

지금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귀찮을 지경이다.

할 수만 있다면(물론 그게 불가능해서 더 절망적이고 절실한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내가 그 양반 대신 워크숍에 가고 싶다고 아무도 몰래 우리 둘이 바꿔치기하자고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다.

부부는 (그럴 때만) 일심동체니까, 딱한 내 사정 좀 봐주면 안 되겠느냐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애원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그동안 축적한 나만의 허술한 스몰 데이터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나는 전날과 비슷한 패턴으로 또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몸이 안 좋아서 거의 매일 밤 수 십 번을 깨고 잠을 설치다시피 하고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아침 8시가 넘어서 일어났더니 다정한 그 양반은 그사이에 사진 한 장을 보내오셨다.

출장만 갔다 하면 (나는 원하지도 않는데, 사진 좀 보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꼭 사진을 찍어 내게 보내온다.

"나한테 보낸 거 맞아? 다른 사람한테 보내야 하는 거 잘 못 보낸 거 아니야?"

라고 매번 확인하는 일을 나는 잊지 않는다.

그 양반은 집에 없지만 그 사진 한 장으로 잊고 있었던 그의 존재를 다시금 상기하게 하는 용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동시에 몇 시간 후면 그 실체를 드러낼 사람 말이다.

"도대체 내가 뭘 어쩌길래 그래?"

라고 내 속마음을 알면 내게 따지고 들겠지만, 그 양반이 내게 뭘 어쩌는 건 아니지만, 왠지 뭘 어쩌는 것만 같다.

평소에도 퇴근하자마자 곧장 집으로 귀가하시는 그 양반은 좀처럼 딴 길로 샐 줄을 모르신다.

사람들은 말한다.

참 가정적이라고...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속 모르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가정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기나 하시냐고...

가끔 퇴근 후 곧장 집으로 오는 사람을 가정적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가정적이라고 보긴 힘들단 말이다.

* 가정적 : 가정에 충실한

차라리 그 양반은 '퇴근적'인 사람이다.

* 퇴근적 : 퇴근에 충실한

(그 어느 신조어보다 국어사전에 등재가 시급한 어휘라고 나만 집에서 주장한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전국의 아내들과 함께 궐기 대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얼추 이것저것 할 일을 하고 지친 나머지 나는 급기야 중대 결심을 했다.

그냥 드러누워야겠다.

오후 2시, 그 양반의 예상 컴백 시간 한 시간 전, 나도 요양이 필요하다.

컨디션도 좋지 않으니 몸이 더 고됐다.

혼자 끙끙 앓으며 누워서 심신의 안정을 취하려는 찰나,

저승에서 부르는 소리보다 더 무서운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

동시에 나는 들었다.

"얘들아, 아빠 왔다!"

이럴 수는 없어.

3시에 올 거라고 했잖아?

"아빠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달려들었다.

"얘들아, 아빠 왔어."

"아빠, 근데 3시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2신데 정말 빨리 왔네."

"응. 좀 빨리 왔어."

설마, 이 양반이 중간에 도망 나온 건 아니겠지?

나의 백 년 전 워크숍 내지는 교육을 생각하며 나는 지레짐작을 했다.

이제 와 양심고백하건대 직장 생활을 했던 시절 몇 차례 그런 행동을 했던 과거의 나는, 나를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고로 교육이나 워크숍은 중간에 도망 나오는 맛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땡땡이 친다'라고 한다지 아마?

직장인이라면 교육이나 워크숍 중간에 한 번이라도 도망 나오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도망 나온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

만에 하나 나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나는 당장 그 양반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신고라도 하고 싶었다.

"여기 근무지 이탈자, 아니, 워크숍 참석 태만자가 있어요!"

라고 기꺼이 적극적으로.

자식이 엇나가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어미의 심정으로 말이다.

물론 그 양반을 자식으로 삼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다는 점은 분명히 밝히고 싶다.

"근데 엄마는 어딨어?"

왜 자꾸 나를 찾는 걸까?

내가 있어도 없다고 생각하라니까.

최소한 집은 안 나갔으니까 제발 나 좀 그만 찾았으면 좋겠다.


참 다정한 당신,


다 :(컴백 홈 할 시간을) '다'

정: '정해 놓고'

한 :'한결같이'

당 : '당장 들어 올 곳이라고는 집뿐인 사람'

신 : '신물 나게 나만 찾는 사람'


그런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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