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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네 살 x 10
차라리 전 여자친구 생각을 해!
이렇게나 치밀하고 준비성 철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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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임자
Dec 29. 2024
2024. 12. 28.
<사진 임자 = 글임자 >
"제주도나 갈까?"
또 병이 도졌다.
갑자기 바람 넣고 느닷없이 저돌적으로 나오는 데에는, 하여튼 뭐 있다.
아무리 전날 과음을 했다손 치더라도 이건 좀 아니었다.
"특가 떴는데. 보통 같으면 이 정도 가격은 절대 있을 수 없어."
나는,
이런 막무가내식 여행 제안도 절대 있을 수 없었으면 좋겠다.(고 가만 생각해 보았다.)
"언제 갈 건데 벌써 말해?"
그래, 얼토당토않을 예정이지만 들어나 보자.
"오늘 밤. 11시 비행기야. 배보다 더 싸."
어머님, 어머님 아들 이런 줄 다 알고 결혼시키신 거죠?
그때가 저녁 8시가 막 넘은 시각이었던 것 같다.
한숨은 이럴 때 쉬라고 있는 거겠지?
"오늘 갈 건데 벌써 얘기하면 어떡해? 내일 아침에 얘기했어야지!"
"뭐 준비할 것도 없잖아. 그냥 간단히 먹을 거 좀 챙기고 옷이나 몇 벌 챙기고. 그냥 짐 싸면 되지."
이 양반이 정말!
아무리 본인이 짐을 안 싸기로 소니 이게 말인가 막걸리인가?
"이번엔 펜션으로 가볼까? 음식도 다 해 먹고 그럼 되겠다."
"언제는 다 안 해 먹고 왔어? 항상 내가 다 했지. 그리고 나 아직도 몸 안 좋은데. 다 나으려다가 다시 안 좋아지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럼 당신은 안돼?"
나만 안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집 멤버 누구든 다 안될 예정이다.
"얘들아, 제주도 어때?"
철없는 어린것들을 선동하려 하고 있다.
"진짜? 아빠 우리 제주도 가는 거야? 언제?"
딸은 환호했다.
"오늘
밤 11시 비행기라는데?"
그 양반이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내가 답해줬다.
"그거 괜찮은데? 나쁘지 않아."
딸은 약간 현실감이 없다고나 할까?(이 글이 딸에겐 최대한 늦게 발각되기를.)
"오늘 밤 11시 비행기면 집에서 출발한다고 했을 때 언제 나가야 할까?"
자가용으로 바다 건너가는 것도 아닌데 지금 당장 출발해도 터무니없는 시간인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딱 지금 거기서 내복만 입은 채로 더도 덜도 말고 양말도 꿰찰 시간도 없이 바로 뛰쳐나가도 모자랄 판이다.
"또 가? 집에 좀 있자. 엄마도 몸 안 좋다고 하잖아, 아빠."
아들은 역시 내 편이었다.
"그래? 그럼 너랑 엄마는 집에 있어. 누나랑 아빠는 제주도 갈게."
잠자코 듣고 있던 딸이 쾌재를 불렀다.(고 나는 확신한다, 앞으로 100년 동안.)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아빠?"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정녕 저 딸을 내가 낳았단 말인가.
"아빠는 엄마랑 우리 가족 다 같이 가면 좋겠는데."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씀하실 일이지.
어머님, 어머님 아들 이런 줄 다 알고 결혼시키신 거죠?
"꼭, 하필이면 나 몸 안 좋을 때 그러더라. 내가 가자고 할 때는 안 간다고 하면서."
하긴, 어딜 같이 가자고 하는 것부터가 잘못이긴 하지.
"벌써 그렇게 계획 세우면 숙소는 어떻게 하고 차는 또 어떻게 할 거야?"
"이제 알아보면 되지."
이렇게나 준비성이 철저한 남의 편이라니!
신에게는 아직 세 시간의 여유가 있사옵니다,라고 생뚱맞게 내게 반박할 것만 같다.
"당신 귤 좋아하잖아. 가서 귤 따기 체험을 하는 거야. 우리가 각자 한 박스씩 따 오면 되지. 그럼 공짜로 귤 실컷 먹을 수 있잖아. 여보, 어때?"
"귤 따기 체험은 공짜로 해? 몸도 안 좋은데 뭐 하러 거기까지 가서 귤을 따 와? 네 사람 체험비로 집에서 귤 실컷 사서 먹겠다.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뭐 하러 그걸 따고 있어? 한 사람 비행기표값이면 천 년 만년 귤 사서 쟁여 놓고 먹겠다!"
다시금 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양반이 출근해서 일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과연?
이번 달 월급도 무사히 받아 오긴 한 것 같긴 한데 받을 때마다 용하다.
"에이, 지금 준비해도 괜찮아. 우리 저번에도 하루 갔다 왔잖아."
그렇다.
그 양반의 꾐에 넘어가 얼렁뚱땅 특가의 유혹에 넘어가 제주도를 하루 다녀온 사실이 있다. 출발 이틀 전에 급조된 여행이었던가? 그리고 그 후유증은 어마어마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도대체 무슨 생각하고 살아?"
딱히 그 양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에 대해서는 그닥 관심이 없긴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 당신 생각!"
이런! 큰일 날 양반이다.
결혼한 유부남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으로는, 이미 헤어진 전 여자 친구 생각도 아니요,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여자 친구 생각도 아니요, 바로 아내 생각이다.(라고 이 연사 힘차게 외치는 바이다.)
"제발 내 생각은 하지 말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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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할머니 아님 주의! 공무원 퇴직하는 일에만 얼리 어답터.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그러려니 합니다,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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