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하면 한 끼라도 덜 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잔머리만 쓴 엄마의 최후
23. 2. 20. 끼니의 그늘에 가린 간식거리들< 사진 임자 = 글임자 >
"얘들아, 오늘 아침엔 간단히 가래떡이나 구워 먹을까?
"응, 좋아."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고 떡을 두 번째로 사랑한다던 아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합격아, 너도 가래떡 괜찮아?"
"좋지."
봄방학 중이니만큼 조금은 여유를 부리고 좀 게으름을 피워도 되겠지?
우리 집에선 종종 볼 수 있는 가래떡 브런치 시간이다.
"근데 엄마, 오늘 아침은 뭐야?"
내 손바닥만 한(20cm 정도는 될 것이다.) 가래떡 4개를 구워서 아들과 딸에게 먹이고 배를 더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으므로 새하얀 우유도 큰 컵 가득 따라 주고 나는 그만 안심하고 있었는데(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다.) 느닷없이 딸이 아침밥 타령이다.
"어? 이게 아침밥이야. 아까 엄마가 말했잖아. 오늘 아침은 간단히 먹자고."
"아, 그랬나? 알았어."
뭐가 문제지?
어른이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의 양이었는데, 우유까지 마셨으면 든든할 텐데 그건 아침밥이라 하기엔 부족했었나 보다.
"너희 혹시 배고파?"
"조금."
아침을 9시 반이 넘어서(나는 아침이라 했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긴 했다.) 가래떡을 먹고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 탄수화물 덩어리가 벌써 다 소화되었단 말인가?
나도 쉽게 배가 고파지는 편이기는 하지만 한 시간 만에 다 없었던 일로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나는 믿기지 않았다.
아이들이니까, 한창 클 때라 그런가?
"그럼 감말랭이 좀 줄까? 작년에 엄마가 많이 만들어놨어. 식탁에 놔 둘 테니까 먹고 싶은 사람은 알아서 먹어. 알았지?"
급히 냉장고에서 배고픔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달래 줄 간식거리를 공수해 왔다.
떡을 먹었으니까 많이 배고픈 건 아니겠지. 간식 삼아 먹으면 되겠지.
여느 때처럼 나는 일상의 어떤 것들을 해 나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각자 할 일들에 집중했다.
"엄마. 우리 아침밥은 언제 먹어?"
"아까 그 가래떡이 아침밥이라니까?"
세상에 만상에,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아들은 아침에 일어나 음식이라곤 전혀, 이슬방울 하나라도 구경 못한 사람처럼 천진스럽게 내게 묻고 있었다.
그때가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우리 아들이 배고픈가 보네. 그럴 줄 알고 엄마가 요구르트 많이 만들어 놨지. 잼 좀 넣어줄까? 아니면 사과나 귤이랑 먹을래? 너 먹고 싶은 대로 골라서 넣어서 같이 먹어."
사과를 깎아 깍둑썰기를 하고, 귤을 까서 일일이 하나씩 분리해 놓고 심심하면 까서 먹으라고 귤을 대여섯 개 식탁에 올려 두었다.
"엄마, 먹을 거 없어?"
"먹을 거? 지금까지 계속 먹었잖아? 그렇게 배고파?"
"응. 우리 아침도 안 먹었잖아."
아들과 딸은 내가 준비한 가래떡 브런치의 가치를 한참이나 떨어뜨려 놓고 있었다.
아마도 그건 그들에게 노는 사이에 잠깐 맛보는 '새참' 수준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엄마. 오랜만에 국수 먹는 거 어때? 나는 엄마가 만들어 준 국수가 제일 맛있더라."
"그래? 우리 딸이 먹고 싶다면 엄마가 해 줘야지. 잠깐만 기다려. 우리 아들도 국수 좋아?"
"응, 엄마 난 엄마가 해 주는 건 다 맛있어요."
시간은 정오가 넘어갔고, 자식이 먹고 싶다는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을 어미는 없었다.
"역시 국수는 맛있어."
딸이 그야말로 국수를 마셔대며 말했다.
"외할머니가 너희 먹으라고 김도 한 장씩 다 구워 주셨어. 김 넣어서 먹으니까 더 맛있지?"
"응. 그래서 엄마가 김을 넣어서 먹는구나?"
"그럼.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으면 좋지."
딸은 연신 감탄사를 쏟아내며 면발을 들어 올렸다.
그 옆에 말도 없이 묵묵히 깍두기까지 얹어가며 제 갈 길을 가는 한 남자 어린이가 있었다.
"엄마. 그럼 국수 먹고 나서 점심밥 먹을 거야?"
"우리 아들이 지금 잡수고 계신 게 점심이야. 시계를 봐. 점심시간이 지났잖아."
"국수 먹는다고 했지 밥 먹는다고는 안 했잖아. 난 밥을 또 먹는 줄 알았지."
얘가 정말 왜 이런다니?
국수 = 점심
내가 얘기 안 했었나?
아니다.
국수를 먹는다고 했지 그것이 곧 점심밥이라는 말을 명확히 하지 않았었구나 내가.
가끔 엉뚱한 것을 꼬투리 잡고 끝가지 물고 늘어지는 성질이 있는 아들과는 길게 얘기해 봐야 나만 피곤해진다.
결론은 엄마 잘못이구나.
이제 갓 10 살이 된 아들에게
'밥은 밥이요 국수는 국수로다.'
국수는 결코 밥이 될 수 없음을, 국수는 국수일뿐임을 나는 그만 간과하고 말았던 것이다.
"으이구, 꼭 밥이라고 말을 해야 아냐? 그냥 점심에 먹으면 그게 점심밥이지."
인생 선배인 누나의 따끔한 조언을 동생은 피할 길이 없었다.
국수가 밥으로서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이 한 끼의 식사로서 밥으로 대우받을 만한 것인가에 대하여 아들과 나 사이에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어쨌든 점심까지 그럭저럭 넘겼다.
오후 3시, 합기도 학원들 다녀온 아이들이 오자마자 외쳤다.
"엄마, 점심을 안 먹었더니 너무 배고파요."
"너희 아까 국수 먹은 지 이제 두 시간도 안 됐어. 근데 벌써 배고파?"
"응, 진짜 너무너무 배고파."
"근데 너희가 엄마보다 더 많이 먹었는데?"
"아무튼 배고프니까 뭐라도 좀 만들어줘 봐요."
"알았다. 하긴, 운동하고 왔으니까 배고플 만도 하지. 배고프다니까 또 엄마가 출동해야지. 일단 씻고 있어. 씻는 동안 엄마가 준비할게."
"근데, 엄마. 메뉴는 뭐예요?"
"오랜만에 감자 버터구이 어때? 너희 둘 다 그거 좋아하지?"
"그럼. 당연하지!"
"정말 그거 해 줄 거야? 와, 신난다."
마침 아이들 주먹만 한 감자 6알이 조신하게 대기 중이었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정말 맛있다. 그치 얘들아?"
"응, 엄마. 너무너무 맛있어."
"엄마, 다음에도 또 해주라."
"알았어, 우리 아들딸이 해 달라면 날마다라도 해 줄 수 있지."
구황작물은 좀 오래가겠지?
자고로 감자란 것은 예로부터 우리네 조상들의 허기를 든든하게 달래주곤 하던 깜찍한 구황작물이었으니까.
시간이 오후 5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고요한 거실에 정적을 깨는 한마디가 들렸다.
"엄마, 빵 보니까 빵 먹고 싶어."
딸이 요즘 한창 슬라임에 빠져 있는데 과일, 빵, 케이크 같은 음식이 그럴싸하게 장식되어 나오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갑자기 웬 빵이야? 그럴 줄 알고 엄마가 햄버거 빵을 사놨지. 햄버거 만들어 줄까? 누나가 빵 먹고 싶대서 엄마가 햄버거 만들 건데 우리 아들도 햄버거 먹을 거지? "
"당연하지 엄마!"
동그랑땡을 해주려고 사둔 '간 돼지고기'가 있어 급히 패티를 만들었다.
작년 늦봄에 만들어 놓은 딸기잼을 오랜만에 소환하고 양상추 대신 친정 로컬 푸드 상추를 꺼내고 토마토와 사과도 얇게 썰어 넣었다.
치즈 한 장도 잊지 않았다.
"역시 엄마가 만든 햄버거는 맛있어."
"진짜 맛있어?"
"진짜야, 진짜 진짜 맛있어."
말이 햄버거지 집에서 만든 것이라 시중에서 파는 것만큼은 맛도 모양도 덜 할 것이다.
그래도 제법 그럴싸하게 보이고 맛도 썩 괜찮아 종종 간식으로 만들고 있다.
"너희들 배부르지 않아? 엄만 배부르다. 이러다가 너희 저녁 못 먹는 거 아니야?(=이게 저녁이라고 생각하거라 제발. 탄수화물에 과일, 야채 그리고 고기까지 들어갔잖아.=애초에 이 엄마가 노린 게 이거였어.)"
"응. 지금은 배불러."
이구동성으로 아이들은 대답했다.
어느덧 저녁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얼렁뚱땅 저녁밥을 해치우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나야 고맙지.
"엄마, 근데 왜 밥 안 줘?"
"응? 무슨 밥?"
"저녁밥 먹어야지!"
"아까 햄버거 먹고 배부르다며?"
"그건 햄버거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밥 먹을 수 있겠어?"
"당연히 먹을 수 있지. "
"아... 그래?"
"엄만 왜 우리한테 밥을 안 주는 거야? 오늘 밥 한 번도 안 줬잖아."
누가 들으면 끼니도 안 챙겨주는 엄마인 줄 오해할라.
아들의 밥 타령은 쉽게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엄마, 밥 안 먹고 자면 자다가 배고파서 깬단 말이야. 나 저번에도 배고파서 깼어."
저녁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어떻게든 밥 한 끼라도 덜 차려 보려고 갖은 수를 다 써 보았으나 두 어린이는 '밥 먹을 권리'를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엄마,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정말 이 어린이들은 적당히를 모르는구나 당최!
"우리 아들, 그냥 엄마가 주는 대로만 먹으면 안 될까? 엄마가 알아서 줄게."
"궁금해서 그러지. 물어보지도 못해?"
"아니. 물어볼 수야 있지. 근데 엄마도 맨날 반찬 만들기 힘들어. 그냥 있는 반찬에 먹자 오늘은."
이라고 말했으나 보통은 조금씩 끼니마다 반찬을 만들어 먹는 편이라 반찬이랄 것이 전혀 없었다.
급히 된장국을 끓였다.
역시나 아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뭐야? 오늘은 반찬이 하나도 없네?"
그 어린이의 기준에서 국은 반찬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이 어린이는 언제쯤에나 군대에 가게 될까?
군대에서는 메뉴 선택권이 없겠지?
가끔 나는 아들의 입영 날짜를 간절히 기다린다.
요리조리 잔머리 써 가며 간식거리(그러나 영양 면에서나 조리과정 면에서나 결코 가벼운 간식일 수만은 없는)로 연명해 보려던, 봄방학 중인 어린이를 둔 엄마의 최후는 이러했다.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사서 고생한다'라고 한다지 아마?
오호 통재라!
허기짐을 느낄 사이도 없이 그냥 하루 세끼 한 공기씩 밥 가득 담아 상을 차려주고 말지, 이것도 못할 노릇이구나.
우리 집 사전에 이젠 더 이상 '브런치'라는 단어는 없다, 삭제되어야 마땅하다.
만들어주는 음식마다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것은 잠깐일 뿐, 엄마의 '음식 만든 보람'이 어린이들의 '식욕'을 이길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어린이는 밥심으로 산다.
나 하루 종일 뭘 한 거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