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링클프리 민방위복을...
남편에겐 너무 쭈글쭈글한 민방위복
2023. 5. 1.< 사진 임자 = 글임자 >
"민방위복 말이야, 이거 너무 구김이 심한데?"
"그것 때문에 가자마자 전화했어?"
"응. 딴 데는 괜찮은데 등 쪽이 좀 쭈글쭈글해."
"내가 보기엔 별로 안 그런 것 같던데?"
"그래? 어떡하지?"
"일단은 일하면서 입고 있어 봐.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좀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 하루 종일 입고 있다 와."
"그러면 좀 펴질까?"
"그럴 수도 있지."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나는 확신했지만 그에게 희망고문을 했다.
몇 년 간 방치됐던 옷인데 그렇게 쉽게 주름이 없어질 리가 있나. 어림도 없지.
공사다망하신 남편은 토요일에도 출근을 했다.
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나 민방위복 세탁 한 번 해야겠는데.(= 당신이 세탁 좀 해 놔.)"
"그거 아직 안 썩었어?"
얼마 전에 남편이 몇 년 만에 민방위복 커밍아웃을 하셨다.
내 기억엔 트렁크에서 최소 2년은 묵은 것 같았다.
사무실에 둘 거면 사무실에 두든지 필요할 때만 입을 거면 집에 두고 다니든지 할 것이지 왜 굳이 트렁크에 매일 싣고 다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한다.
매일 착실히 차에 싣고 다니는 이유가 있겠지 분명히.
사람마다 생각은 다른 법이니까.
"민방위복 말이야. 그거 왜 차에 싣고 다녀? 맨날 입는 것도 아니잖아."
한 달 전에 남편 차 트렁크에서 우산을 찾다가 나는 그 노란 옷을 발견했다.
뿐이랴, 겨울 슬리퍼와 기모 집업 재킷도 하나 월척했다.
"이렇게 짐 많이 싣고 다니면 안 복잡해? 날마다 야반도주할 생각으로 차 끌고 다녀?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 한살림 차려도 되겠다. 어지간한 건 다 있네. 어때? 오늘 당장 밤도망갈래?"
잘은 모르지만 그 많은 짐을 굳이 매일 차에 싣고 다닐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런 남편의 행동이 나에게 어떤 피해를 준다거나, 내가 굳이 상관할 일도, 간섭하고 잔소리할 일도 아니지만 요즘 출장이 잦아서 트렁크를 비워두면 어떻겠나 싶어서 한 말이다.
"출장 갈 때 차에 짐 많이 있으면 안 불편해? 날마다 쓰는 것들 아니면 짐 좀 빼고 비워놓는 게 어때?"
이 말을 수도 없이 한 것 같다.
"내가 알아서 할게. 자기 차 관리나 잘해."
남편은 늘 그렇게 대답했다.
아이코, 애먼 내 차 트렁크가 공격을 당했다.
그래, 본인 차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더 할 말이 있겠는가.
그렇게 말하는 나도 트렁크에 짐이 없는 건 아니니까 더 이상 그 사람을 자극하지는 말자.
그러나 나는 최근에 트렁크를 거의 다 비웠고 자질구레한 몇가지만 담은 상자 하나만 달랑 남았다.
그리하여 나는 밤도망까지는 못가는 숙명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것인지 최근에 민방위복을 집으로 챙겨 왔다.
얼핏 보기엔 더러워 보이진 않았으나 오랜 시간 동안 암흑 속에서 방치돼 있다 온 물건이라 세탁을 한 번 해달라고 했다. 굳이 세탁소에 맡길 필요까지는 없어 보여서(그것은 단지 일 년에 한두 번 입을까 말까 한 비상용 옷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직접 세탁을 하고 출근하는 길에 미리 갖다 놓으라고 챙겨주었다.
"나중에 급히 챙기려다가 또 깜빡할 수 있으니까 미리 갔다 놔. 어차피 사무실 가니까."
몇 년 전에 을지훈련이 있던 날 미리 챙겨 놓지 않은 민방위복을 혼자만 입지 않아 민망하더란 그 날의 일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부랴부랴 사무실을 뒤져서 그 옷을 걸치기는 했다는 미담도, 하필이면 그날 지각을 해서 꼴등으로 출근을 하셨다는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흑역사를 말이다.
지난 주말에 출근하는 남편이 잊고 갈까 봐 현관 앞에 민방위복을 깔아 두었다.
님아, 사뿐히 즈려밟지 말고 고이 집어 가시옵소서.
그게 바닥에 깔려 있는데 결코 그냥 지나치진 못하리라.
"자기가 세탁했어? 역시! 고마워!"
다소 과장된 반응을 보이며 남편은 그것을 챙겨갔는데 사무실에 가서 다짜고짜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옷이 너무 구겨졌어."
"그냥 편히 입는 옷인데, 날마다 입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을지훈련할 때나 어쩌다 한 번씩 입을 건데 대충 입어."
내가 손수 세탁을 했으니 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급히 전화를 걸어 그 섬유의 구김성에 대해 이야기할 성질의 것은 아닌데, 내가 보기엔 분명히 그 정도는 아닌데.
"일단 하루 종일 일하면서 계속 입고 있어 봐. 그리고 올 때 챙겨 와 봐. 내가 보고 판단할게."
"그럴까? 알았어."
민방위복도 링클프리 제품으로는 안 나오나?
5년이고 10년이고 정년퇴직할 때까지 접어 놔도 주름이 안 가게, 쭈글쭈글한 그것 때문에 우리 집 가장이 신경 쓰이지 않도록 말이다.
요즘 대세는 링클프리라는 점을... 업체 사장님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