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채우고 많이 비워야 하는 것

내 마음도 냉장고도...

by 엘 리브로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나의 집이다.

여백의 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집안 구석구석을 쳐다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고 그중에서도 옷장은 철마다 대대적인 정리를 하겠다고 벼른 지가 몇 년째인지 모른다.

그나마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다 꺼내서 버릴 것은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것이 냉장고다.

버리는 것을 잘 못하는 내가 덜 고민하고 버릴 수 있는 이유는 먹거리이기 때문에, 오래 끌어안고 살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냉동실의 문을 열면 뭔지도 모를 검정 비닐에 싸인 것들이 뒤엉켜있다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서 발등을 찍히기도 했다. 냉동실이건 냉장실이건 안쪽 깊숙이 들어 있는 것은 꺼내 볼 엄두가 안 났으며 도대체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 재고 파악도 안 됐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오래된 채소가 상해서 물이 흐르고 냄새가 날 지경이 되어서야 큰맘 먹고 야채칸 속을 다 끄집어내어 청소를 했다.

열어 보면 과일도 군데군데 물러있거나 껍질이 말라비틀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가 언젠가 정말 작정을 하고 냉장고 속에 있는 것들을 다 꺼내어 정리를 해보았다.

한 달 이상 잠자고 있었음직한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것도 버리고, 먹지도 않을 거면서 버리기 아깝다고 넣어둔 것들도 버렸다.

안 쪽에 있는 식재료를 꺼내려면 앞쪽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다 꺼내고 다시 집어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쟁반이나 바구니를 활용했다.

냉동실에도 육류, 생선, 건어물 등등 분류해서 바구니에 넣어두니 필요한 것을 찾기가 쉬워졌다.


그렇게 정리를 해두어도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카테고리가 섞이고 마는데 그건 비우기 전에 자꾸만 무언가를 사서 채워 넣으려 하기 때문이다.

바구니가 가득 차면 자기 영역이 아닌 다른 바구니에 넣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다시 대충 집어넣는 습관이 되살아나고 만다.

세일한다고 많이 사고 두세 개씩 묶어서 판다고 생각 없이 사고 다음에 또 장 보러 나가기 싫으니 미리 사두자며 사고...


냉장고는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오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냉장고를 여름철에만 사용했다. 지금처럼 조리된 인스턴트 냉동식품이 있지 않았고 과일도 모든 종류가 사시사철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식재료는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구매했다.

음식은 조리해서 바로 먹고 남은 것은 한 번쯤 더 먹을 분량이었기에 한 여름이 아니면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됐다.


소득이 증가하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서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소비하고 쌓아두려고 한다.

물론 바쁜 현대인들이 매일 식자재를 구매하러 나가고 매번 한 끼 먹을 음식을 새로 만든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정말 냉장고 속을 가득 채우고도 또 뭔가를 사서 더 꼭꼭 욱여넣어야만 할까?

옷장 정리를 할 때 하나를 버리고 나서야 새것을 사는 것처럼, 냉장고도 안에 든 것을 먹고 어느 정도 비운 후에 새로 구매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쌓아두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오래돼버린 것을 먹을 것이 아니라 당장 혹은 며칠 이내에 먹을 것만 사서 넣어 보자.

넣어둔 지 오래된 것, 아깝다고 못 버리고 있지만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것, 신선하지 않은 것 등 버려야 할 음식과 식재료들을 정리해 보자.

그리고 가득 채우지 않겠다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도록 노력하자.


마음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감정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후회나 나를 병들게 하는 증오나 원망, 남과 비교해 가면서 키운 열등감 같은 것들은 과감히 비워내자.

그리고 그 빈자리에 오늘 주어진 것들에 대한 감사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원대하지는 않아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작은 꿈들을 채워 넣어 보자.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겠다.


오랜만에 냉장고 정리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