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V 타고 30일간 미국 뽀개기
하필이면 앨라배마주에 떨어질 건 뭐란 말인가.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토네이도에 휩쓸려 캔자스가 아닌 난생 처음 보는 땅에 툭 하고 떨어졌을 때 느꼈을 당혹감이 이러했을까. 미국 지도를 꺼내 놓고 뉴욕, LA, 샌프란시스코를 찾으라면 0.1초 고민도 없이 단박에 찍을 수 있는데, 앨라배마는 도대체 어디에 붙어있는 동네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학창시절 음악 시간 교과서에 나왔던 미국 민요 속 한 구절이 앨라배마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멀고 먼 앨라배마 나의 고향은 그곳~” 하고 시작하는 그 노래 말이다. 한적한 시골마을을 정겹게 묘사하는 표현이 아주 없지는 않을텐데, 미국 민요 가사에서 ‘멀고 멀다’라고 밖에 표현하지 않은 것만 봐도 미국인들조차 아주 별 볼 일 없는 듣보잡 동네라고 여긴다는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겪어보니 미국인들이 앨라배마주, 미시시피주, 루이지애나주를 우리로 따지면 땅끝마을처럼 ‘Deep Deep South’라고 부르며 그 동네 출신자들을 궁벽한 시골 촌놈 바라보듯이 측은한 눈길로 보는 시선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런데 내세울 게 없는 동네라고 마냥 무시하고 깔보기만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레너드 스키너드라는 미국 컨트리록 밴드가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노래 ‘스위트 홈 앨라배마(Sweet Home Alabama)’는 앨라배마를 미국인들의 마음 속 언제나 그리운 고향, 정겨운 고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노래가 앨라배마를 그토록 아름답게 띄워놓은 게 이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켰던 것인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미 대학 풋볼 랭킹 1위팀인 앨라배마대학교 풋볼팀의 홈 구장에서 경기가 열릴 때마다 ‘스위트 홈 앨라배마’가 경기장이 떠나갈 듯 쩌렁쩌렁 울려퍼진다.
이런 시골 마을에 우연히 정착해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여행자의 처지에선 앨라배마라는 곳이 나름 장점을 발휘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미국 중남부 어쩡쩡한 지역에 위치한 지리상의 이점 덕분에 미국 동부 워싱턴과 뉴욕, 남동부 플로리다, 중북부 시카고, 서부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어느 쪽으로도 여행하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특히 자동차 여행을 할 경우 이런 이점은 십분 발휘된다. 만약 뉴욕에 터전을 잡았다면 워싱턴이나 캐나다 토론토 등은 여행하기 쉬웠겠지만 남부 플로리다로 가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할테고, 서부까지 횡단 여행은 그야말로 온 우주의 기운을 다 끌어모아야 하는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모험일 터이다.
2016년부터 2년간 미국에서 여행자로서 살았던 시간은 한마디로 꿈같은 순간이었다. 일단 밥벌이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고단함에서 해방된 것만도 크나큰 축복인데, 살던 곳을 멀리 떠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가족과 오롯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로또 복권 당첨’ 그 이상의 행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게다가 미국이라니.
미국 지도를 사분오열시켜 몇 차례로 나눠 자동차 여행을 했다. 한번은 미국 동북부로, 한번은 플로리다로, 한번은 미국 서부로 이런 식이다. 지리적 이점을 지닌 앨라배마이긴 해도 미국 서부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는 것은 긴 시간이 소요되는 여정이었다. 그래서 목적지를 향해 자동차로 냅다 내달리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재미있는 방문지를 끼워 넣어 여행이 지루하지 않게 동선을 짜는 일은 꽤나 머리 회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뒷좌석에 까칠한 초등학생 딸과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어부인의 불만과 잔소리를 죄 없는 내 뒤통수가 온전히 감당해야 하니까 말이다.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진 도로, 특히 유타나 아이다호를 달릴 때는 반대편에서 마주오는 차도 만나기 힘든 그야말로 드넓은 땅이 미국이다. 이런 미국을 온전히 느끼고 몸으로 겪으려면 자동차 여행이 제격이다. 특히 몇날 몇일을 자동차에 몸을 싣고 있으면 여행자로서의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제대로 느끼게 된다.
쭉 뻗은 도로, 그 길 위에 삶이 있다. 그 순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운전대를 잡은 손과 발끝으로 전해지는 가속페달의 감각만이 있을 뿐이다. 고국에서 버리고 오지 못한 온갖 상념들이 이정표처럼 길 위에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그때 내가 왜 그랬지, 이렇게도 할 수 있었는데, 정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중요했던 것일까, 중요하다는 건 무엇일까,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일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진짜 나인가… 이런 생각 보따리들을 풀어놓으면서 자동차는 달리고 또 달린다.
길을 달리다 보면 처음에 3차원이었던 세상은 소실점을 향해 나아가며 직선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하나의 점으로 소멸한다. 머릿속 생각들 역시 복잡하고 다층적인 입체였다가 단순한 선으로 압축되었다가 나중에는 하나의 점으로 쪼그라들고 입으로 먼지를 날려버리듯 후~하고 불면 사라져 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삶에 지친 사람들은 여행을 탈출구로 삼는 경우가 많다. 유명 관광지와 맛집을 섭렵하며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이들도 있고 아프리카의 사막이나 인도, 네팔의 에베레스트, 남미의 안데스를 오르며 바닥까지 떨어진 삶의 의지를 되살려 내기도 한다. 여기에 가도 가도 끝없는 미국 자동차 여행을 추가하고 싶다. 낯선 길에서 영화 <노마드랜드>의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만날 수도 있고, 여행자의 자세로 미니멀 라이프를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새로운 생각과 마주할 수도 있다.
길은 여러 갈래로 뻗어 있고 각각의 길마다 다양한 인생이 펼쳐져 있다. 어느 길을 갈 것이냐 선택의 결정권은 나에게 있고 온몸으로 부딪쳐 겪은 인생들은 나의 세포 하나하나에 박제된다. 그래서 여행이 끝날 때 즈음엔 처음의 나는 사라지고 또 다른 나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글 싣는 순서
1. 미국은 넓고 SUV는 많다
2. 멋진 아빠 되려면 올랜도
3. 키웨스트에서 헤밍웨이 찾다 파산각
4. 단풍국 부럽지 않은 스모키
5. 번호판도 없이 나이아가라 넘기
6. 대자연 끝판왕 그랜드서클
7. 황홀한 그대! 캘리포니아 1번 국도
8. 미칠 것 같다면 요세미티
9. 이게 다 리버피닉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