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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ever Sep 02. 2022

모든 예술은 연필로부터 시작되었다

<연필의 힘> 책리뷰

당신의 닫힌 머릿속을 열어주는 책

<연필의 힘>

가이 필드, 더숲 


이 책은 연필의 활용법부터 연필의 역사, 연필로 시작된 예술과 인물들까지 다루고 있다. 인류사에 획을 그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연필의 활용법을 살피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연필의 예술적 가치를 발굴해낸 점이 가장 흥미롭고 독창적이다.


책이 말하는 연필의 진정한 힘은 예술가들의 창의적 활용법에 있었다. 실제로 수많은 예술가는 말한다. 모든 것은 연필로부터 시작됐다고. 점이 선이 되고, 선은 원이 되고, 원은 구가 되고···. 무엇이든 가능하니, 연필만 있다면 세상이 손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책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연필의 가치와 예술, 인문학적 결핍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여기, 몇 가지 사례만 모았다. 깊이 있는 고찰보다는 가볍게 터치하듯 인문학적 갈증을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1만3000쪽 분량의 스케치를 남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1452~1519)

비트루비안 맨, 1490년경, 종이에 잉크, 35×26cm. 다빈치의 가장 유명한 드로잉 작품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운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 작업의 시작은 늘 간단한 드로잉이었다. 그는 풀, 꽃, 새, 인체 해부도 등 그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모두 스케치로 남겼고, 구상한 많은 것이 실현되었다. 헬리콥터, 행글라이더, 교각 건축법 등은 그가 최초로 구상한 것들이다. 이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줄 위대한 작업에 필요한 것은 오직 연필과 종이뿐이었다.


드로잉의 기초는 원근법이다. 원급법은 눈의 기능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다.

그는 무려 1만3000쪽이 넘는 스케치를 남기며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과 과학 분야의 비약적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다빈치의 데생 능력은 과학 발전에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그림에 입체감을 불어넣는 등 사실적 묘사로 수많은 연구에 도움을 준 것. 하지만 이 같은 기법을 익히기까지 그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다빈치는 음영과 빛을 표현하기 위해 핏빛이나 불그스름한 색, 살색 분필이나 크레용을 사용했다. ‘모나리자’가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도 그의 섬세한 음영이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생생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그림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세상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1810년경, 종이에 크레용, 21.9×17.1cm.   괴테가 직접 그린 <파우스트>의 삽화 중 하나.괴테는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만족스러워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으로 독일 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다. 대작 <파우스트>(1887)를 집필했으며 정치인, 과학자, 화가, 역사가, 시인으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그는 화가로서의 자신에게 가장 큰 만족감을 느꼈다.


괴테는 시와 시각 예술인 그림이 상호 보완적 관계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1000장에 이르는 스케치를 남길 정도로 그림을 사랑했다. 훗날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그의 삽화에 주목할 때

마크 트웨인

Mark Twain(1835~1910)


하일브론을 떠나며. <해외 방랑기>(1880)에 삽입된 삽화. 트웨인이 직접 그렸다.


<톰 소여의 모험>(1876), <허클베리 핀의 모험>(1884) 등을 남긴 위대한 작가 마크 트웨인. 그에게는 항상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습관이 있었다. 글이든 그림이든, 자유롭게 사고하고 생각난 것들을 스케치하고 메모했다. 장난기 많은 트웨인이 연필 한 자루를 쥐고 있으면 여지 없이 기발한 그림과 글이 탄생했으니, 사람들로부터 ‘미국 최고의 익살꾼’이라고 불린 것도 당연하다. 그는 자녀를 가르칠 때도 삽화를 즐겨 이용했고, 아이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그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인생 후반기에는 독일에 머물면서 드로잉과 회화를 본격적으로 배우는 등 그림 공부에 푹 빠졌다.




희망을 잡듯 연필을 잡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1853~1890)


슬픔, 1882년, 데생, 44.5×27cm. 잔뜩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모습에서 비탄에 잠겨 있는 주인공의 감정이 드러난다.


빈센트 반 고흐는 37년의 생애에서 10여 년 동안만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 기간에 900여 점의 유화, 1000점 이상의 데생과 수채화를 그렸다. 어림잡아도 1년에 200점, 이틀에 한 점꼴로 그림을 그린 셈이다. 이런 엄청난 열정은 타고난 감성에서 비롯됐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촌스러운 붉은 머리, 구부정한 어깨, 고집불통에 굼뜬 행동으로 말미암아 학교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대신 자연과 예술을 사랑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깊은 절망 속에서 던져두었던 연필을 다시 쥐고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는 스치는 바람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고,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자신의 감성을 표현할 줄 알았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고흐는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왕따’였지만 그에게는 좋은 놀이가 하나 있었다. 인상적인 풍경을 노트에 스케치하는 것. 고흐에게 스케치는 일상이었고, 외롭고 힘들 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돌파구이기도 했다. 연필과 종이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내는 그만의 언어이자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주는 스승이었다.

다리, 1862년, 데생, 12×36.5cm. 빈센트 반 고흐가 9세에 그린 작품.훗날 이 위대한 화가의 탄생을알려주는 지표로서 큰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난생처음 한 말이 ‘연필’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1881~1973)



20세기 미술의 거목 파블로 피카소는 말을 떼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렸을 만큼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꼬마 피카소가 처음으로 한 말은 ‘엄마’, ‘아빠’가 아닌 ‘피즈(piz)’였다고 한다. 연필을 뜻하는 스페인어다. 여기에는 화가이자 미술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세상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자란 후에도 예술가로 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지만, 어린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미술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피카소는 1909년, 28세의 나이에 프랑스 화가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큐비즘’ 운동을 창시했다. 사물을 과장해서 그렸고, 단순하게 표현했으며, 평면 위에 3차원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실험도 계속했다.


무엇보다 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가장 기본으로만 그린 그의 스케치는 ‘근본에 대한 깊은 탐구심’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피카소는 91년 인생 중 80년 동안을 미술 창작에 전념해 소묘, 회화, 도자기, 조각 등 총 5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기며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작품은 기성품으로, 창작은 드로잉으로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1887~1968)

미러리컬 리턴, 1964년, 에칭, 17.7×13.3cm(좌). 소변기를 거꾸로 설치한 ‘샘’(1917)을 공개한 이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뒤샹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프랑스 미술가 마르셀 뒤샹은 미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다다이즘의 중심에 있다. 그는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미의 기준을 무시하고 미술 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며 자신만의 정체성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 변기, 소파 등으로 작품을 만든 것. 뒤샹은 예술가의 의도만 확실하다면 주변의 흔한 물건도 얼마든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꾸민 자신의 오브제 작품을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불렀다.


작품이라는 결과보다도 예술가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정신세계가 진정한 예술의 본질이다.


이런 뒤샹도 처음에는 그림을 그렸다. 주로 전원 풍경이나 가족을 주제로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의 스케치와 유화를 그렸지만, 대중의 혹평이 뒤따르자 바꾼 것이다. 비록 추구하는 스타일은 달라졌지만 작품을 만들기 전 여러 번의 드로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작품에 투영하는 방식만은 끝까지 고수했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다

퀸틴 블레이크

Quentin Blake(1932~)


<내 친구 꼬마 거인>(1982) 중. 퀸틴 블레이크가 로알드 달의 동화 중에서 가장 즐겁게 삽화를 그린 책은 <내 친구 꼬마 거인>이다.


퀸틴 블레이크는 그림책 삽화의 대가다. 그는 영국 소설가 로알드 달이 쓴 많은 동화책에 완벽한 삽화를 그렸고, 아이들은 블레이크의 그림을 보며 자랐다. 그가 평범한 드로잉으로 전 세계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작가들의 상상력과 유머를 누구보다 잘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레이크는 16세 때부터 영국의 유명 잡지 <펀치>의 만화가로 활동하면서 80여 명의 작가가 쓴 300권이 넘는 책의 삽화를 그렸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재능을 꽃피우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나는 인물을 그릴 때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애쓰면서 상상의 여지를 오나전히 닫아두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마치 내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중재자라도 된 것처럼.


블레이크는 2000년부터 지금까지 ‘그리기 캠페인’을 후원하고 있다. 그는 ‘그림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전달하게 해준다’는 행사의 취지에 공감했고, 모든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1964) 중. 빠르게 휘갈기듯 그린 블레이크 특유의 드로잉이 인상적인 작품.




나는 단지 내 그림을 그릴 뿐이다

키스 해링

Keith Haring(1958~1990)


‘마틴 펀(D)’의 일부(우). 1986년 9월 4일 열린 행사 초청장에 직접 그려 넣은 그림이다. 키스 해링은 유쾌한 주제뿐 아니라 각종 사회문제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키스 해링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이다. 그는 뉴욕에서 활동한 만화가였던 아버지의 작품을 따라 그리면서 그림을 배웠다. 1980년대에 가장 유명한 팝 아티스트이자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된 그는 앤디 워홀과 함께 마돈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대담한 선과 컬러에 담긴 유쾌함이 특징이다.


나는 예술가로 타고났고,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해링은 순수미술과 그래피티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예술의 정의와 그들 세대에 예술이 갖는 의미를 재정립했다. 1986년 베를린 장벽 위에 91.5m짜리 벽화를 그리거나 지하철역 안에 하루에 약 40개씩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누구라도 부탁만 하면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그런 것들이 결코 자기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술이 결코 특정한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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