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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ever Dec 20. 2022

팝아트 대표들만 소개한다

해밀턴, 리히텐슈타인, 라우센버그, 워홀, 해링, 인디애나

“재치 있고, 관능적이고, 활기차고, 값싸고, 대량생산적인 미술 양식”

팝아트의 거장 리처드 해밀턴은 팝아트를 이렇게 정의했다. 팝아트는 195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절정에 이른 영국과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TV나 만화책, 잡지, 광고처럼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표현 기법이 드러나는 것이 가장 큰 특징.


또한 과거 순수예술이 주장하는 우월성과 당대의 전위미술에서 볼 수 있는 난해하고 귀족적인 허식을 모두 거부한다. 한마디로 전문가와 일반인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활 밀착형 미술이라 할 수 있다.





리처드 해밀턴

Richard Hamilton, 1922~2011


앤디 워홀에게 영감을 준 팝아트의 창시자

1956년 낯선 그림 하나가 영국 런던에서 전시됐다. ‘오늘날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장황한 제목의 그림에는 TV, 녹음기, 진공청소기 등 당시로서는 첨단 가전제품과 햄 통조림 등의 사진을 짜깁기해 채운 거실이 등장했다.


이 작품의 작가는 리처드 해밀턴. 당시 화단은 경악했지만, 평론가 로런스 앨러웨이는 ‘팝아트’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치켜세웠다. 해밀턴은 기존의 회화만으로는 급변하는 현대인의 삶을 대변할 수 없다고 믿었다. 대신 동일한 이미지와 주제를 지속적으로 재해석하는 등 이미지가 갖는 본질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실험을 계속했다.


그의 작품은 같은 연작이라도 사진, 유화, 아크릴, 판화 등 기법을 달리해가며 미세한 차이를 두었는데, 이는 ‘반복’과 ‘과잉’이 특징인 현대 소비문화의 이면을 날카롭게 직시하며 작품에 담으려 애쓴 흔적이다.



모든 예술은 평등하다.
기다란 선의 한쪽 끝엔 엘비스가,
반대쪽 끝엔 피카소가 있다.
TV는 뉴욕 추상표현주의 못지않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 리처드 해밀턴



그녀 ($he)

1958~1961, Oil Paint, Cellulose Nitrate Paint, Paper And Plastic on Wood, 122 x 81cm

회화 연작 ‘그녀($he)’는 잡지의 광고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이다. 진공청소기와 냉장고 같은 현대식 가전제품과 잡지 <에스콰이어>에 수록된 여배우 비키 더건의 핀업 사진을 조합하여 소비주의 욕구의 기계화라는 개념을 보여준다.



스윙징 런던 (Swingeing London)

1968~1969, Oil on Canvas, 67.31 x 84.46cm

‘스윙징 런던’은 로큰롤 그룹사운드 롤링 스톤스의 멤버인 믹 재거와 아트 딜러 로버트 프레이저가 마약 혐의로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신문 보도용 사진을 회화, 판화, 콜라주 등으로 변주한 시리즈다. 하나의 사건을 미디어가 어떻게 묘사하는지, 대중은 이 왜곡된 이미지를 어떻게 소비하는지를 탐구한 역작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 1923~1997


만화에서 찾은 현대사회의 단면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주로 만화 주제를 차용해 특유의 기법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만화의 한 장면을 확대하고 화면을 망점으로 채움으로써 대중문화와 인쇄기술을 예술 창작의 바탕으로 삼았다. 원작의 표절이라느니, 속이 텅 비었다느니 하는 질타도 거셌지만 그 못지않게 호의적인 반응도 뜨거웠다. 가볍지만 강력한, 무언가 신선한 것을 기다리던 미술 팬들의 인식 변화를 끌어낸 것.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원본 이미지를 과감하게 재구성하고, 말풍선은 작가의 말로 대체하였으며, 흑백의 색과 밝은 원색, 뚜렷한 윤곽선을 지닌 단순화된 형태를 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을 채우는 원형의 망점은 ‘벤데이 점(Benday Dot)’이라 불리는데, 그린 것이 아니라 구멍 뚫린 판을 이용해 색점을 찍어내는 방식이다. 이는 대량생산 사회의 단면을 상징한다.



나는 상투적인 것에서 대단함을 이끌어낸다.
주로 그 둘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지만
아주 결정적이다.

- 로이 리히텐슈타인


헤어 리본을 한 소녀 (Girl with Hair Ribbon)

1965, Lithography, 79 x 60.5cm

리히텐슈타인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제작한 작품. 이 그림 또한 만화에서 출발했지만 ‘회화로서의 표현’에 더 집중했다. 엇갈린 사랑 때문에 애태우는 순정만화 속 주인공은 검은 윤곽선과 선명한 색채,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로 강렬하게 다가온다. 얼굴도 특유의 망점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 많은 여자의 극적인 표정과는 대조되게 이 여인은 어딘가 절제되고 미스터리한 표정으로 관객을 유혹한다.



크랙! (Crak!)

1963, Lithography, 53 x 71.7cm

리히텐슈타인은 자기만의 점묘 기법을 구사하기 위해 알루미늄 판에 구멍을 뚫어 작업했다. 그러다 1962년, 그래픽 아트에 사용하던 벤다이 판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작업 방식을 완성했다. 이로서 훨씬 정교한 패턴을 제작할 수 있게 됐다. 1963년 작품 ‘크랙!’에서 여자의 얼굴과 손은 이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한 것.



모던 페인팅 - 일출 (Modern Painting of Sunrise)

1972, Screen Print, 76 x 101.3cm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작업 후에 풍경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한다. 풍경화는 만화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작품과 상반되지만, 그의 풍경화는 단순히 선과 벤데이 점과 함께 만화 장면의 배경을 재현해놓은 것과 같아 더욱 주목받았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Robert Rauschenberg, 1925~2008


추상주의로 키운 재능을 팝아트에서 꽃 피우다

초기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색상의 단색 회화를 그렸다. 콜라주와 몽타주를 활용한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여러 가지 오브제를 평면 위에 결합한 콤바인 페인팅을 제작하며 일상의 사물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끌어들였다. 사물을 활용하는 방식은 1960년대 실크스크린을 이용하면서 더욱 확장됐는데 신문, 잡지, TV 속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했다.


실제로 라우센버그는 미디어에 대한 비평적인 태도부터 미국 사회에 산재하는 정치적 이슈에 대한 자기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로 가시화된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하거나 냉전 시대 미국과 구소련이 벌이던 우주 전쟁에 대해 냉소를 비추는 등 그가 ‘미국적인 삶’을 이미지화하면서 팝아트의 영역이 더욱 확장됐다. 그의 실험 정신 덕분에 팝아트는 상업적인 기법과 색채를 내세워 미국 사회의 풍요와 빈곤을 동전의 양면으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림은 생활과 예술의 결합이다.
나는 그것을 구분하는 사이에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 로버트 라우센버그



지지 (Support)

1973, Screen Print and Collage, 78.5 x 56.5cm

1962년, 라우센버그는 앤디 워홀의 영향으로 실크스크린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실크스크린은 보통 오일을 추가해 찍어내지만 그는 실크에 인쇄된 이미지를 다시 캔버스에 옮겨 콜라주를 만들었다. ‘지지’는 실크스크린과 콜라주 결합의 좋은 예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ROCI, 베를린, 1990년 3월 (ROCI, Berlin, March 1990)

Offset Lithography, 96.5 x 63cm

1980년대 ROCI(Rauchenberg Overseas Culture Interchange)가 탄생했다. 예술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작업으로, 8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열었다. 이 시기에 완성된 ‘ROCI, 베를린, 1990년 3월’은 오프셋 석판화로, 하단에 브란덴부르크 문을 완성하는 조각품이 보인다.





앤디 워홀

Andy Warhol, 1928~1987


끊임없이 소비되고 버려지는 상품에 특별함을 부여하다

1964년 앤디 워홀은 뉴욕에 창고형 작업실을 열었다. 이곳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워홀의 뮤즈 에디 세즈윅의 활동 무대이면서 그의 그림을 파는 상점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워홀의 역할은 결정권자였고, 그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뽑아내는 ‘예술 노동자’도 있었다. 이들은 지시에 따라 기계처럼 주어진 일을 반복했다.


‘브릴로 박스’, ‘슈퍼스타’, ‘양귀비꽃’ 등의 이미지를 복제 생산하는 이 평범한 행위는 워홀에 의해 대체 불가능한 특별함을 지니게 되었다. 반대로 유명인을 평범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릴린 먼로는 죽은 뒤 더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던 먼로를 워홀의 작품을 통해 친근하게 마주하게 된 것. 이처럼 이중적인 상태를 결합하는 워홀의 뛰어난 능력은 1964년 뉴욕 비앙키니 갤러리에서 열린 <미국의 슈퍼마켓>전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그가 그린 ‘캠벨 수프’가 1500달러에 판매된 가운데, 작품 아래 놓은 실물의 캠벨 수프는 작가의 사인을 더해 6달러에 팔렸다. 그렇게 일상은 예술이 되었고, 팩토리를 통해 예술은 제품처럼 대량생산의 시대를 풍미했다.



팝아트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신문에 난 내용(워홀을 조롱하는 기사)은 신경 쓰지 마라.
그 기사의 길이에만 신경 써라.

 - 앤디 워홀



베토벤 (Beethoven)

1987, Screen Print, 96 x 96cm

‘베토벤’ 시리즈는 초상화 위에 악보 한 장을 배치하여 작곡가의 특징을 드러낸다. 작품에 등장하는 악보는 베토벤의 ‘문라이트 소나타’로 잘 알려진 소나타 14번이다. 이미지의 배경이 검은색이어서 한 남자가 어둠에서 떠오르는듯한 인상을 남김으로써 고전 작곡가를 현대 록 스타로 변형시켰다.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80, Screen Print on Museum Board Paper, 91 x 91cm

1962년 마릴린 먼로의 자살은 워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먼로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결심하고, 영화 <나이아가라>의 광고 사진에 기초하여 그녀를 대형 캔버스에 실크스크린으로 재현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아이콘으로서 마릴린 먼로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워홀은 파란색, 빨간색, 오렌지색 등 온갖 화려한 색으로 먼로를 찍어냈고, 이런 방식이 인기를 얻자 유명인이란 유명인은 모두 찍어서 내다 팔았다. 먼로 연작 중 ‘레몬 마릴린’(51x41cm)은 200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800만 달러에 낙찰되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캠벨 수프 (Campbell’s Soup)

1980, Screen Print on Museum Board Paper, 88.9 x 58.4cm

워홀은 정물화의 과일들이 아닌, 더 친근한 것에 관심이 있었다. 부엌에 있는 통조림 같은. 그중 토마토 캔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캠벨 수프’가 공개되자 예술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워홀은 캠벨사가 보유하고 있던 32종의 수프로 실험을 계속해나갔다. 각 수프의 독창성에 대해 고민했고 흰색 배경 위에 단 하나의 제품만을 놓았다. 그러다 많은 사람이 이 작업이 의미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고, ‘컬러의 미니멀한 표현’이라는 평가도 얻었다.





키스 해링

Keith Haring, 1958~1990


우스꽝스러운 제스처 속에 삶의 무게를 담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키스 해링은 현대미술의 아이콘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해링은 뉴욕에서 활동한 만화가였던 아버지의 작품을 따라 그리면서 그림을 배웠는데, 그의 작품은 한마다로 대담한 선과 컬러에 담긴 유쾌함이 특징이다. 1980년대에 가장 유명한 팝 아티스트이자 그라피티 아티스트가 된 그는 앤디 워홀과 함께 마돈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해링은 순수미술과 그라피티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예술의 정의와 그들 세대에 예술이 갖는 의미를 재정립했다. 1986년 베를린 장벽 위에 91.5m 규모의 벽화를 그리거나 지하철역 안에서 하루에 40점씩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누가 부탁하더라도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그는 그런 행동들이 결코 자기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술은 결코 특정한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이 그릴 것이다.

- 키스 해링



러키 스트라이크 (Lucky Strike)

1987, Screen Print, 100 x 70cm

해링은 1987년 담배 브랜드 러키 스트라이크의 광고 등 다양한 광고에도 참가했다. 러키 스트라이크의 석판화 그림은 이 작품의 담뱃갑과 함께 고전적인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 취향과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당시 뉴욕 그라피티 화가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단순한 선과 강렬한 원색의 대비로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곽선만으로 단순화된 사람은 인종, 성, 연령이 드러나지 않은 보편화된 인간상을 나타낸다.



종말 (Apocalypse)

1988, Lithography, 98 x 96.5cm

예술가로서 해링의 경력은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으면서 단절되었다. 이후 텍스트로 그의 작업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던 작가 윌리엄 버로스와 협업한 ‘종말(Apocalypse)’ 연작을 시작했다. 에이즈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찬 해링의 도발적인 이미지와 버로스의 시는 에이즈를 세계 종말의 예언으로 여기는 관점을 형성했다





로버트 인디애나

Robert Indiana, 1928~2018


간결하면서 단순한 표어문자로 메시지를 전달하다 

초기에는 옛 상용 로고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을 선보였지만, 다른 팝 아티스트와 달리 인디애나는 대중 매체와 소비문화보다는 미국의 정체성과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정치·사회적 격동, 역사적 억압, 아메리칸 드림 등의 주제를 주로 다뤘다.


팝아트는 기본적으로 단어와 이미지의 결합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유명한 팝아트 작품은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연작일 것이다. ‘LOVE’는 1964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의뢰한 크리스마스 카드에 사용되면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이듬해 조각으로까지 만들어지면서 인디애나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하지만 명성만큼 그늘도 깊었다. 문자로는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없었던 시대에(1998년에 저작권을 인정받았다) ‘LOVE’는 머그잔, 티셔츠 등에 무분별하게 사용됐고, 인디애나는 상업적인 화가로 오인받아 명성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나의 목표는 LOVE를 온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다.

- 로버트 인디애나



클래식 러브 (Classic Love)

2002, Lithography, 85.5 x 71cm

‘LOVE’ 시리즈는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단순하고 재미난 작품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흔한 단어가 되어버린 ‘LOVE’는 인디애나를 통해 예술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LO’를 ‘VE’ 위에 올리고 ‘O’의 각도를 약간 돌려놓아 ‘LOVE’가 사각형 구도 속에서 안정감과 율동감을 전달하게 했다. ‘LOVE’ 시리즈는 카드와 포스터, 신문, 간판, 우표로 제작되었고, 조각 역시 전 세계 공원과 공공장소에 설치되어 많은 이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마릴린 - 노마 진 (Marilyn-Norma Jean)

1951, Lithography, 40 x 40cm

인디애나도 거의 모든 팝 아티스트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마릴린 먼로의 몸에 주목했다. 그녀의 비천했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먼로가 영화배우가 되기 전에 찍은 누드 사진을 재현한 것. 작품 속 먼로의 모습은 1953년 잡지 <플레이보이> 창간호에 실리면서 대중화된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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