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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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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Mar 14. 2022

하늘과 바람과 별과 설악

98년 1월 설악산 공룡능선 4박5일 조난기

 

           [ 1 ]


설악은 이상한 산이다. 언제나 사람을 거부하고 밀쳐내는 듯 보이지만 그래서 그만큼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설악에 들어설 때는 마치 투정부리는 아이와도 같은 심정이지만, 그래서 그만큼 설악은 우리들에게 의연하기를 요구한다. 산 아래서는 열심히 설악을 그리워하고 생각하지만, 설악에 들어서는 순간 설악은 하나의 거대한 벽이 된다. 설악의 품에 안긴다는 우리의 작은 몸짓들은 실은 설악이라는 벽을 넘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 말, 산은 넘어야 할 벽이었다는 말, 그래서 넘었다는 말, 그 말을 나는 이제야 이해한다. 그리고 그 벽을 넘고서야 산에 안길 수 있었다는 말도 이제야 이해한다.


겨울 설악산 공룡능선 (사진 = 문화재청)


재미없는 이야기로부터 글을 시작해야겠다.


내가 처음 산의 매력에 대해 알게 되고 산에 간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나의 산 선배이자 사부, 동료였던 한 형이 했던 말들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산행은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 이라는 것과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라는 두 가지 말이다.  그 당시 그 선배는 지금 내 나이보다도 꽤나 어렸었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좋은 말만 골라서 했는지, 감탄할 뿐이다.


산행은 도전이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능력과 한계가 있고, 산에 간다는 것은 그 능력을 시험하고 확인하고 넓혀 나가는 과정이다. 남이 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등반을 했다고 자랑할 것도 못 되거니와,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다. 등산은 남과 겨루는 스포츠가 아니라 자기 성찰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도전한다는 것과 안전해야 한다는 것은 얼핏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도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은 우리에게 치열하기를 요구한다.  산행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무의미한 반복이 될 때, 그 사람의 몸은 산에 있어도 마음은 산을 떠난 것이다.  나는 한때 그렇게 산을 떠났었다. 언제나 산과 함께 있었지만 그 산은 단지 바라보는 산이었을 뿐이다. 결코 산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은 망상일 뿐이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나를 기다리며 서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야동에서 보낸 어느 가을밤, 차곡차곡 접혀져 있던 산의 능선이 다시 눈앞에 펼쳐지고, 숨죽이고 있던 바람이 다시 마른 나뭇잎을 떨궈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어쨌거나 산이 내게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아니, 내가 다시 산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때 보니 산은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조난.


조난이라는 이 용어가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글자 뜻으로만 보면 어려움을 만난다는 것이지만, 모든 산행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 아니던가.  남의 힘을 빌지 않고, 즉 남에게 업혀오거나 실려오지 않는 한 그것은 조난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설악 공룡에서 보낸 4박 5일간의 이야기이다.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에 따라서 이 글은 조난기가 될 수도 있고 그저 평범한 산행기가 될 수도 있다. 한때는 어줍잖게도 산행기를 쓰기 위해 산을 다녔다고 해도 좋을만한 때가 있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지만, 산 아래서 산을 생각하는 마음 만큼은 아직도 그대로이기를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 2 ]


설악동. 그곳처럼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곳도 드물다. 눈앞에 확 드러나는 설악의 모습에 가슴이 설렐 틈도 없이 우선 2200원이라는 기가막힌 입장료가 주머니를 털어 간다. 국립공원 입장료 1200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문화재 관람료 1000원은 또 무어란 말인가. 징그럽게 크기만 한 부처님 한 번 보고 지나가는데, 그것도 보고싶어 한 것도 아닌데 눈짓 한번에 1000원을 내야 하다니.


소공원에 들어서면 그곳이야말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모아놓은 전시장 같다. 피곤에 지친 듯한 발걸음으로 힘겹게 배낭을 등에 매달고 하산하는 시커먼 얼굴의 사람들, 서로 손을 잡고 설경을 바라보며 사진찍을 곳을 찾는 젊은 연인들, 깜짝 놀랄만큼 큰 소리로 웃어제끼며 지나가는 아줌마 관광객들, 한 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아저씨들, 케이블카 앞에 길게 늘어서서 시간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손님을 끌기에 정신없이 바쁜 번데기 장사 아저씨, 부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말하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기념품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꼬마 아이들, 가끔씩 무관심한 얼굴로 지나가는 스님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얀 산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우리같은 사람들까지......


산에 같이 온 사람들이 저마다 설악산 어디쯤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관찰하면 꽤 흥미롭다. 권금성 쪽 우뚝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들을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눈을 들어 저 멀리 대청봉께를 바라보는 지순한 눈길의 소유자들이 있고, 여기에서조차 지나가는 여자구경을 하는 ‘속물’들도 있고, 땅바닥만을 내려다보며 발길을 재촉하는 성격 급한 사람들도 있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저 멀리 움푹 들어간 저항령과 그 주변의 완만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능선들에 눈길을 고정시키게 된다. 그것은 저항령에서 자다가 침낭 안에 쥐가 들어왔던 어느 여름밤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낮아 보이는 곳에 오르려 하루가 꼬박 걸려야 한다는 것, 그렇게 부드러워 보이는 능선이 막상 너덜과 바위로 이루어진 삭막한 곳이라는 그 사실이 그저 이상스럽기 때문이다.


북주능. 내가 설악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면서도 어쩐지 찾아가기 어렵기만 한 그곳,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너덜지대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맛보면서도 감동을 받는 곳, 바람 휘몰아치는 설악의 황망한 허공을 비로소 바라볼 수 있는 곳, 그 곳 한가운데에 저항령이 있다. 누군가 모닥불을 지폈던 흔적, 누군가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의 흔적, 누군가 하루 밤의 다리쉼을 한 흔적, 그런 것들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오른다.    



        [ 3 ]


1월 13일. 귀면암 가게 앞에 도착한 것이 오후 4시 반경. 이미 산은 해가 기울고 있었고, 가게 아저씨도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내려가려 준비하는 중이었다. 평일치고는 많은 사람들이 내려오던 천불동 계곡도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한 팀만 빼고는 인적이 끊겼다.


땀이 비오듯이 흘렀다. 산행은 언제나 힘겹다. 설악산이거나 도봉산이거나 동네 뒷산이거나에 관계없이 언제나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아직 젊어서인지는 몰라도, 체력이 예전만 못해 하면서 넋두리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20대 초반에도 산은 언제나 힘겨웠고, 나는 언제나 헐떡이며 산을 오르내렸다. 산의 매력 중 하나는, 노력하고 땀흘린 만큼만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무쇠같은 체력을 가져서 산에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면 나는 지금만큼 산을 좋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게 앞에 둘러앉아서 귤을 하나씩 까먹었다. 올라오기 전 귤 30개를 샀는데 벌써 몇개째 먹는지 모른다. 앞으로의 며칠을 생각하면 아껴먹어야지 하다가도 문영이의 ‘내려갈 때 무슨 필요가 있느냐, 올라갈 때 먹어야지’ 하는 말을 들으면 그런 것도 같다. 아닌게 아니라 문영이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그 차가운 눈에 세수까지 해댔다.


가게 아저씨는 쥬스 깡통 하나를 탁 까서 한입에 마시더니 천막을 거두기 시작했다. 우리가 출발하지 않고 앉아 있으니까 아저씨의 몸짓도 더디기만 하다. 혹 우리가 캔 하나라도 훔쳐 먹을까 우려한 때문일 것이다. 아무 힘들 것도 없는 그 아저씨가 쥬스 마시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가게 앞에는 ‘귤 껍질은 환경 오염의 주범이니 버리지 맙시다’ 운운하는 팻말이 하나 붙어 있었다. 다른 과일과는 달리 귤 껍질이 쉽게 썩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그게 환경 오염의 '주범'까지야 되랴. 산을 파헤치는 포크레인은 놔두고 자연보호 운동이랍시고 기껏 쓰레기 줍기 행사나 벌이는 행태가 요즘도 계속되는지 궁금해졌다.


얼음이 달라붙어 머리 위쪽에 유리대롱처럼 뻗어 있는 천막 노끈을 스틱으로 한번 툭 쳐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음이 머리위로 와르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단단하기만 했다.


양폭 산장에 도착한 것은 어두워지기 직전. 오늘은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두 팀이나 한꺼번에 왔다면서 산장지기가 반겨주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며칠 전 내린 폭설로 바로 전날까지 입산 금지였기 때문에 꽤 많은 눈이 쌓여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다른 해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고 길도 아이젠을 사용해야 할만큼 완벽하게 러셀되어 있었다. 산사면에 눈사태 난 모습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산장 문 앞에서 밥을 하다 눈을 들어보니 희끄무레한 능선 위로 별이 빛나고 있었다. 산에서는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높은 곳에 서면 별이 더 가깝고 더 영롱하게 보여야 할텐데, 내 눈은 별을 보고 있어도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 별빛에 점점 어두워지는 나무들, 무거운 그림자를 끄는 나무들만이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동경은 멀리 있는 것만에 가능한 것일까.


자유를 찾아 산에 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산정 높은 곳에 서면 자유가 보일 것 같았던 날들은 내게선 지나갔다. 자유가 가까운 곳에서는 자유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산의 자유는 산에서 내려온 자만이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겹게 산을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2

풀잎 사이사이에서 서걱이는 모래들

무엇이 우리가 있는 산을 깊이 들먹이다 혼자 떠나가는지

모래를 잔뜩 문 풀들이 쓰러져 있는 곳에는 튼튼한 둥치만 보이고

모든 길은 산 아래로 쓸려버렸나

우리의 등에도 업혀 자라는 바위며 잡초며 의문이며

그런 내 삶이 섞여 함께 번들거리는 숲의

새는 지금 날개가 자유로운가

저 상반신을 하늘에 묻고 있는 나무는 몸이자유로운가

말해다오, 낡은 의문처럼 체류하는 이 산을

뿌리깊은 나무의 저 높은 가지를

높은 나뭇가지에서 홀로 자유로울 지금은 젖은 새를

날 수 없는 것들만 밀집해서 사는, 이, 산아,        

늘 그 자리에 나와 함께 다시 놓이는


          3

낮은 곳부터 밤이 온다

저렇게 바라보이는 평지도 이곳에서는 얼마나 먼가

어둠 속으로 잎을 넘기는 풀들 위로 나무들 위로

유유히 떠오르는 별들이 우리를 찌른다

이 낮은 곳에서 우리의 하루는

서쪽 하늘 귀퉁이마저 어둠으로 채운다

이것에서 듣는 너의 웃음은 어둠과 맞물려 무섭다

우리의 커다란 눈과 귀에 걸리는 아직은

아직은 풍성한 물소리를 따라

한차례 더 흔들리는 산의


         4

나를 쓰다듬는 물소리는 차갑다

싱싱한 햇빛을 올리브 기름처럼 바르고

응달을 숨기고 희희낙락하는 산의

어두운 숲이 뒤척인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마주치는 내 모습은 아름다운가

기울며 흙에 묻히는 빈 집의 그림자와

내가 느끼는 멀고 가까운 인기척

바람은 우리를 밀며 끌며 산 밖으로 부서지고

잘게 내리는 빛을 받으며 웅성거리는 산을 뿌리가 힘겹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무한정 유보되는 우리는

이 산 어디에 섞여있어야 할까

날아오른 새의 그림자가 파편처럼 떠다니는

       

<  조은, ‘산’ 중에서 >



       [ 4 ]


1월 14일. 지난 밤과는 달리 뿌연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었고 조금씩 싸리눈이 흩날렸다. 그렇지 않아도 흰 산은 온통 하연 운무로 가득했다.


출발이 늦어 9시 반이 되어서야 산장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1275봉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다지 서둘 필요는 없었지만.


태울 쓰레기는 놔두고 가라는 산장지기 아저씨의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 덕분에 조금이나마 짐을 줄일 수 있었다.


겨울산이 춥지 않다는 것은 아마도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겨울산에서 추웠던 기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깨끗함, 순수함, 투명함, 이런 것들만이 겨울산엔 자리잡고 있다. 가끔씩 길가에 보이는 누런 오줌발만 눈에 띄지 않는다면.


무너미 고개를 올랐다. 배낭을 깔고 앉아서 간식을 먹고 있자니 자그마한 새떼가 주변에서 파닥거렸다. 일행 중 아무도 새 이름을 모른다. 예전부터 느끼는 것이지만 산에 꽤나 다닌다고 자부하는 나도 풀 이름, 나무 이름, 새 이름에 참으로 무지하다. 거대한 것, 크고 화려한 것만을 찾아다니기 때문일까.


새들은 나무 위 아래로 어지럽게 흩어져 날아다니더니 급기야 우리의 모자와 신발 위에까지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작은 치즈 조각을 손바닥에 올려놓자 손 위에까지 올라와 쪼아가지만 이내 땅에 뱉어 버린다. “이 비싼 음식을 몰라보다니, 새대가리!” 하고 꾸짖어 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언젠가 희운각 산장 앞에 텐트를 쳐 놓고 이 고개에서 하루종일 미끄럼을 탄 적이 있다. 요즘엔 철계단이 놓여진, 소청에서 희운각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속도 무제한 봅슬레이보다는 한결 여유있는 곳이다. 눈 위로 튀어나온 돌뿌리를 지나칠 때엔 두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쳐서 몸을 허공에 띄운다는 꼬리뼈 보호 방법을 배운 곳도 이 무너미 고개였다. 단 5분만에 내려가고 30분 이상 걸어 올라가고 하며 그때는 마냥 희희낙락했었다. 이제는 등산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로프도 설치되어 있고 산장 앞에 텐트도 못 치고 하니 그런 기쁨을 다시 느껴보지는 못할 것 같다.


운무는 여전히 걷히지 않았다. 이 고개에서 보이는 공룡능선 끄트머리 바위벽에는 만물상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형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한번도 그 벽을 감상하며 세상사를 뒤돌아보는 여유를 가져 보지 못했다. 이곳은 언제나 바삐 지나쳐가는 한 점에 불과한 곳이었고, 희운각에서 맞는 아침 이곳에 산책삼아 걸어와서도 그 벽 뒤에 있을 공룡능선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 설레했을 뿐, 벽을 들여다보며 감상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야! 저건 오리다! 토끼다!’ 하는 장난이 시시하고 유치하게 느껴졌던 탓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고작 오리, 토끼나 찾을 생각밖에 못한 내가 시시하고 유치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음에 희운각에 올 기회가 있으면 평면 브라운관이니 72핀 램이니 하는 것들도 찾아봐야겠다. 혹시 아는가, 그러다 보면 자유나 희망까지도 그곳에서 찾아낼 수 있을지.


그러나 아쉽게도 사방은 온통 하얀 구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룡능선으로 접어들자 비로소 발이 눈 속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러셀 상태는 매우 좋아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쪽으로 가면 희운각인가요?” 하는 바보같은 질문을 하는 한 팀이 우리와 마주쳐 지나갔다. 그래도 눈 속으로 빠지는 발 때문에 선두에 서는 것이 조금씩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신선대.

바람이 추웠다. 오후 1시 30분.


라면을 먹으려 물을 끓이는데 계속 눈발이 물 속으로 떨어져서 쉽사리 끓지를 않았다.


신선대에서는 석양을 보아야 한다. 서북주능 너머로 사라지는 붉은 빛을 가슴에 담고, 어두운 숲길을 그 빛으로 밝히며 희운각으로 내려와야 한다. 검붉은 1275봉의 마지막 모습과 동해바다 배들의 불빛을 뒤로 한 채 우습게도 조그마한 헤드랜턴에 발길을 의지하고 내려와야 한다. 그제서야 공룡릉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누군가 내게 설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마등령의 일출과 신선대의 일몰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흰 구름 사이로 가끔, 아주 가끔씩 뿌옇게 모습을 드러내는 1275봉이 그날은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 5 ]


봉우리를 2개 지나 1275봉 전 오르막길 밑에 이르른 것은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어느새 눈발이 굵어지고 이미 주위는 어두워 오고 있었지만, 몇해 전 겨울 30분 정도 걸려서 올라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오르막을 뚫기 시작했다. 하기는 그 주변에 야영할 자리라고는 그 위 밖에는 없었다. 눈사태 때문인지 아니면 위에서 줄줄 쏟아져 내려오는 눈 때문인지, 이제까지와는 달리 러셀된 흔적이 싹 사라지고 없었다.


올라가야 할 길로 급경사를 타고 끊임없이 눈이 흘러내려왔다. 세탁 세제 같은 굵은 알갱이의 눈이 쏴아 쏴아 소리와 함께 흘러와 우리의 다리를 지나쳐갔다.  


우리는 그 흐르는 눈에 용감하게 뛰어들었지만 몇 발 가지 못하고 이게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신설이라 잘 다져지지도 않았고, 적설량도 엄청나서 한번 다져진 눈을 밟고 일어서면 그 다음 쌓인 눈이 바로 코앞에 닿을 듯했다. 게다가 발밑은 원래 반들반들한 바위가 아닌가. 눈사태도 걱정해야 했지만 자꾸 눈이 미끄러지는 통에 길을 다질 수가 없었다.


반도 못 올라왔는데 어느새 날은 컴컴해지고, 눈은 언제부터인가 맹렬하게, 그야말로 맹렬하게 쏟아지는 중이었다.  앞서 러셀하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서 허우적거리는데 바로 뒤에 선 사람부터는 추위에 떨고만 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속도을 빨리하기 위해서 중앙으로 올라가 보기도 하고 나무가지 옆으로 뚫어 보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이제까지 여유있었던 마음에 갑자기 긴장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산에서의 긴장감. 그것은 기분좋은 유희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절박함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더이상 유희일 수는 없다.


갑자기 우수수 하는 소리가 나더니 왼쪽 위에서부터 눈이 쏟아져 내려왔다. 작은 눈사태였다. 나는 무의식중에 “꽉잡아!” 하고 소리를 쳤지만, 무엇을 잡으라는 것인지 주위에 잡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은 워낙 경사가 급한 곳이고 원래부터 위에서부터 계속 눈이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눈사태가 날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무가 자라고 있는 쪽에서 갇혀 있던 눈이 약간은 있었나 보다.


어느새 주위는 완전히 깜깜해져, 대체 어느정도 올라왔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헤드랜턴을 비춰봐도 컴컴한 허공 속 흰 눈발만이 랜턴빛에 나타났다 사라져 갈 뿐, 멀리 보이지가 않았다. 점점 추위와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문영이가 랜턴을 꺼내다 배낭 헤드에서 안경이 떨어져 눈 속에 파묻혔는데 차마 찾아보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 엄두도 나지 않았을 뿐더러 추위 때문에  단 1초도 같은 자리에 머물기 싫었다.


안경을 잃은 데 대한 보상심리일까, 갑자기 문영이가 괴력을 발휘하여 중간 이후를 러셀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끝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네 명이 교대로 러셀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역주하던 문영이가 마지막 20여미터를 남겨놓고 기진맥진, 나와 교대하였다. 나는 불과 20미터가 그렇게 멀어보인 적이 없었다. 가도가도 몸이 제자리에 맴도는 것만 같았다. 문희는 내가 30미터 정도 남았다고 소리쳤을 때 풀죽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한 시간은 올라가야겠네.......”


드디어 마지막 문턱. 어두운 허공만이 넘겨다보이는 그 턱을 넘었을 때 나에겐 환호할 여유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해 겨울, 해가 지려고 하는 점봉산 정상에 빨리 하산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으로 겨우 올랐을 때엔 그래도 더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지만 이번에는 그런 감정조차 일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하니 밤 8시 20분.


눈이 없을 때 15분이면 오르고, 눈이 쌓여 있더라도 웬만큼 굳어 있기만 하면 3,40분이면 충분한 곳을 무려 3시간이 넘게 걸려 올라온 것이다. 가져온 텐트 2동 중에 한 동만 대충 다진 눈 위에 치고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산은 엄하다 차운 별빛 하나조차도

제자리를 찾아 빛난다

그 자리를 찾기 위해 나는

어둠속에서 작은 손전등 하나 없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얼어붙은 겨울산에 기어올랐다

좌 우 편향 버리고

쓸모없는 것들 죄다 버린

벗은 몸으로 더욱 당당한 겨울 정상에서

나도 이제 수사를 버린다           

    

< 김용락, 겨울산에서>


눈발은 후두두둑 하며 마치 소나기처럼 텐트 플라이를 때려댔다. 눈을 녹여 물을 만들고 밥을 해 먹었을 땐 이미 11시가 넘은 시간. 잠시 텐트 밖으로 나가보니 우리가 올라온 길은 거짓말처럼 지워지고 흔적조차 사라져 버렸다.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한 어둠 속에서 소리없이 굵은 눈발만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눈이 온다는 것, 그것은 축복일 수 있다. 눈이 오지 않는 겨울산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지워진다는 것, 그것 또한 가슴 설레는 일일 수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이란 곧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나온 길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에는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낀다. 다시 돌아가려 함이 아닌데도, 내가 지나온 흔적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에 왜 나는 아쉬움과 박탈감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산에 가는 것이 진취적이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그는 산을 모르는 사람이다. 산행은 내가 지나온 길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과정이다. 앞으로 가야할 길, 앞으로 넘어야 할 봉우리보다는 내가 얼마나 먼 길을 왔고, 얼마나 힘겨운 길을 지났는가 하는 것이 언제나 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또 산으로 향하는 것이다. 뒤를 보고 걷고 있는 것이다.



정상에서 보니 내가 널 찾아온 길이 비워져 있다

내가 내려가지 않으면 저 길은 지워질 거다

지워진 모든 길은 다시 찾아가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하고 말하려던 차였는데 그 길이 지워지고 말았다

나는 여기서 무엇이 될까

궁지에 몰리면 무엇이 되고 싶은 또 다른 나

도대체 나는 몇 개나 되는 거냐


< 이생진, 길-만재도 58 >



내가 공룡릉을 찾는 이유는 마등령에서 공룡을 바라보며 북주능으로 발길을 돌릴까 말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하기 위한 것과, 1275봉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 위한, 순전히 두 가지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이 없는 계절에 1275봉 옆 가게 위쪽으로 올라가 보면, 요즘엔 비바람에 많이 지워지긴 했지만 붉은 페인트로 바위에 그려놓은 화살표를 하나 찾을 수 있다. 일반 등산로는 그냥 지나치게 되어 있는 1275봉 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약간의 세미 클라이밍을 해야 하는 곳이지만, 길만 제대로 알고 있으면 누구나 어려움없이 오를 수 있다.


수백미터 직벽으로 이루어진 1275봉 위에 고개만 살짝 내놓고 아래를 내려다볼 때의 전율. 귀때기청봉보다, 만경대보다, 마등령보다 훨씬 섬세하게 설악과 동해바다가 시야에 들어올 때의 그 기쁨을 이번에는 놓쳐야 하는 것일까. 이 눈만 그친다면 아침엔 올라가 볼 수도 있을 텐데, 눈만 그친다면.......  


빨래줄에 걸린 장갑과 양말이 내뿜는 습기와 버너 2개가 쏘아올리는 열기로 답답해지는 호흡만큼이나 마음 속이 답답해져왔다.


계속해서 내리는 눈과, 점점 좁혀져 오는 텐트 안의 공간을 느끼면서 잠결을 헤매기 시작했다.



본 산행과 관련없는 자료사진. 마등령에서 바라본 공룡능선. 가운데 뾰족한 봉우리가 1275봉이다. 우측 뒤 멀리 대청봉과 중청봉이 보인다.



           [ 6 ]


새벽 1시도 넘어서 잠든 데에다 워낙 피곤했던 탓인지 아침이 와도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으니 잘하면 저항령이나 최소한 북주능에 접어들어 야영할 수 있겠다는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 거의 오전내내를 침낭 안에서 뭉기적 거리면서 보냈다.


하루 정도 여기서 머물다가 눈이 그치고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 한달음에 마등령까지 갈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전날 못지 않게 계속 내리는 눈을 보고는 더 쌓이기 전에 한 걸음이라도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서둘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텐트 문을 열자 눈이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밖이 보이지 않았다. 거의 텐트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밖에 나와서 보니 꼭대기 약 10cm만 빼고 전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간밤에 내 배낭을 대충 꾸려서 평평한 땅 위에 세로로 세워 놓았는데, 그 배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물론이요 한참을 파들어가서 발굴해 낼 정도였으니 밤 사이 적설량이 최소 1m 이상은 된 듯했다.


그런데 짐을 챙기기 위해 눈에서 잡아빼려고 몇 번 텐트를 가볍에 흔들자, 갑자기 뚝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폴이 부러지고, 부러진 부분이 플라이를 찢고 밖으로 튀어나와 버리는 예기치 못했던 사고가 생긴 것이다.


아! 이렇게 해서 나와 7년을 함께 한 이 낡고 헤진 텐트가 드디어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나와 함께 수많은 밤을 보내고 수많은 손님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까지도 따뜻하게 포용하여 주었던, 심지어 저 멀리 뉴질랜드의 빙하지대까지도 나와 동행하였던 오랜 친구를 나는 드디어 잃게 된 것이다. 심한 바람에 휘어지고 일그러진 모습이지만, 못난 주인을 둔 덕분에 여기저기 찢어지고 곰팡이도 슬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긴 시간을 견뎌왔던 동지의 죽음앞에 어찌 비장해지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얼마나 장렬한 최후인가. 폭설의 공룡, 아침이 올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우리를 지켜주고, 그 마지막 소임을 다한 채 생애를 마친 것이다. 삼가 애도를 표하며 여기 그 생전의 모습을 몇 마디 말로나마 남겨두노니, 고인이여 편히 잠드소서. 또한 세인들이여, 싸구려 텐트라고 얕잡아보지 말지어다.


    상표   : 동진 프로 자이언트

    재질   : 바이엑스 (노란색 본체, 연두색 플라이)

    규격   : 150cm * 195cm (2-3인용)

    가격   : 120,000 (91. 1. 구입)



         [ 7 ]


밖에다 눈을 다져서 공간을 만들고 매트리스를 깔고서 아침 겸 점심을 했는데, 눈이 순식간에 매트리스와 내 바지를 뒤덮어 버렸다. 지난 밤에 나는 춥고 급한 나머지 가져왔던 등산용 스틱을 밖에다 놔두고 텐트에 들어갔는데 아침이 되니 찾을 길이 없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 혹 스틱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눈이 녹기 전에 1275봉 가게자리 주변을 파 보실 것을 권한다.


1275봉 올라가는 것은 꿈도 못 꾸고, 배낭을 메고 다시 출발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발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웬만한 내리막길은 오르막길보다 훨씬 쉽게 허우적거리면서 나아갈 수 있는 법이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가슴까지 푹 빠져들어가는데도 여전히 발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어디까지 빠져들어갈 지 몰라서 도대체 발을 앞으로 내디딜 수가 없었다. 겨울 산에 다니면서, 특히 이곳 공룡에서 러셀하면서 지나가 본 경험이 몇 번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잠시 서서 어떻게 해야할까를 생각했다. 희운각으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마등령까지 가는 것보다 오히려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냥 전진하는 편이 나았다. 그 자리에 다시 텐트를 치고, 눈이 그치고 해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었다. 조금만 눈이 녹거나 굳으면 훨씬 빨리 갈 수 있고, 게다가 혹 누군가 길을 뚫고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약없는 일이었고, 눈이 조금 온다 해서 산행을 포기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이틀 정도면 마등령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 하에 우리는 다시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내리막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는 미처 몰랐다. 처음에는 배낭을 메고 걷다가, 배낭을 말타듯이 타고 앉아서 앞뒤로 흔들면서 내려가기도 하고, 배낭을 앞에서 모로 굴리면서 가 보기도 하고, 발로 차면서 가 보기도 하고, 뒤에서 끌고 가 보기도 하고, 별별 짓을 다 해 봤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그나마 가장 괜찮았던 방법은 선두에 선 사람이 배낭을 벗어 놓고 먼저 길을 뚫은 다음, 두번째 사람이 배낭 두 개를 발로 차면서 그 길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었는데 오래 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내려가면서 나는 걱정이 앞섰다. 내리막길이야 이런 식으로 내려간다 해도 평지나 오르막길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1275봉에서 내려오는 것이 끝나고 수평으로 우회하는 길이 시작될 무렵,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출발이 늦었다고는 하지만, 하루종일 우리가 내려온 길을 뒤돌아보고 있자니 한심했다. 거리로 따지면 300미터는 될까?  아니 채 200미터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사방이 온통 하얀 구름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거리는 감 잡기가 어려웠다.


비교적 평평한 지역을 찾아서 땅을 다지고 다시 텐트를 쳤다. 나머지 하나 남은 텐트였다. 짧은 시간, 짧은 거리에다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잠자리나 좋게 만들자 해서 꽤 넓은 지역을 평평하게 다지느라 공을 들였다.


나무 숲 속에 텐트를 치니 기분이 훨씬 아늑했다. 눈도 그치는 듯 싶었다. 플라이를 때리는 눈발과 쉬익쉬익 하면서 텐트에 흘러내리는 눈 소리가 어느 사이엔가 멎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분이 밝아짐을 느꼈다. 새로운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문영이가 기분 좋게 한 마디 했다.


“제발! 딴건 다 좋으니 제발! 눈만 좀 그쳐랏!!”

“야! 존대말도 시원찮을 판에 그렇게 반말로 하면 눈이 그치겠냐?”


내가 이렇게 말하자마자 갑자기 우수수수 하면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날 밤부터 우리는 물이나 음식과 관련된 것 외에 다른 용도, 난방이나 건조 등의 목적으로는 최대한 연료를 아끼기 시작했다. 식량을 점검해 보니 쌀이나 부식은 충분한데 간식 종류가  조금 모자랐다. 처음에 출발할 때 사탕 한 봉지를 살까 말까 했었는데, 그거라도 있었으면 하는 후회가 들었다. 눈이 그쳤으니 이제 해만 나면 한달음에 마등령까지 가겠다 하는 희망 섞인 기대 속에 공룡능선에서의 이틀째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8 ]


눈이 멎었다. 그러나 여전히 날씨는 흐렸다. 흐린 날씨를 핑계삼아 또 침낭 안에서 뭉기적 거렸다. 4명이 칼잠을 자면서 텐트 벽에 밤새 비벼대서인지 침낭은 축축하지만, 그래도 얼굴로 들어오는 견딜 수 없는 추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따뜻했다.


밤새 내린 눈은 그다지 많지 않고 우리가 온 길을 살짝 덮어놓고만 있었다. 해는 나지 않았지만 어제까지 가득했던 운무는 걷히고 시계가 한결 넓었다. 설악에 온 후 처음으로 용아장성릉이 보이고, 공룡의 바위벽들이 어쩐지 음침하게 서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가야할 길은 여전히 흔적도 없고 온통 하얀 눈 뿐. 고개를 돌리면 둥그렇게 일렬로 파인 눈의 흔적만이 우리가 전날 그 위로부터 내려왔음을 말해주었다. 돌아갈 수 없는 길. 누구는 한번 간 길은 다시 돌이키지 않는다고 하던데 사실 돌이킬 수 있는 길이 세상엔 얼마나 될까. 다음날, 그 다음날, 우리는 공룡을 넘으면서 수없이 많은 길을 되돌아섰지만,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은 그 길에 접어들지 않았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랴.


오늘도 갈 길이 없어 되돌아서서

또 어젯밤까지 가 보았다

밤으로만 닿은 길을 걸어

십년 내내 돌아섰던 길을 걸어

돌아서서 걷는 길만이 나의 길이라 다짐하며

끝가지 가 보았다

그러나 갈 길이 많은 밤은 끝이 없어

어젯밤보다 그젯밤보다 더 많은 길을 만들어 걸어가서는

갈 길 없는 나를 불러

밤새도록 가슴으로 기쁨으로 다른 길들을 걷게 해 놓고

새벽이 오면 다시 막힌 길만 내 앞에 주고는

또 돌아서라 한다


< 이시영, 외길 >    


시간을 아끼기 위해 팀을 두 조로 나누어, 한 팀은 짐을 정리하고, 다른 한 팀은 빈몸으로 러셀하고 돌아오기로 하였다. 이것은 이번 산행에서 배운 것으로서, 네 명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중에 되돌아와서 배낭을 메고 다시 가는 왕복을 할지언정 한두명이 먼저 길을 뚫는 방법이 훨씬 빨랐다.


바위 틈이나 절벽이 끝나는 곳에 고산에서나 볼 수 있다는 눈처마와 크레바스들이 보였다. 물론 그 규모야 보잘 것 없겠지만, 그래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밑이 보이질 않았다. 눈으로 살짝 덮인 그 균열부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또 눈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하면서 길을 다지는 작업에 꽤 많은 시간이 걸렸따.


어느 사이엔가 구름 사이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머지않아 어디에선가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그 감격! 나는 새소리를 듣고서야 그동안 무엇이 그리 허전했었는지를 깨달았다. 산이 너무나도 쥐죽은듯이 고요했었던 것이다. 친숙함이 주는 힘이라는 것은 대단했다. 이제 산은 낯설고 엄한 설악산으로부터 다시 친숙하고 아름다운 설악산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12시가 조금 지나서 ‘마등령 1.7km'라는 표지판에 도달한 후 우리 조는 짐을 가지러 돌아갔다. 표지판이 있는 곳은 양쪽의 거대한 바위벽 사이로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장소로 평소에 휴식을 취하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고 흐린 날씨때문에 바다도 보이지 않아 아주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몇년 전 가을에 가야동에서 올라와서 이 부근에 배낭을 둔 다음 1275봉 위에 가서 절벽을 한번 내려다보고 다시 돌아오는 데에 채 2시간이 안 걸렸었는데, 이번엔 1275봉에서 편도로 오는데만 하루 반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다음 조가 출발하고 문영이와 나는 짐을 챙기면서 한결 넉넉한 기분이 드는 것을 즐겼다. 1.7km를 하루에 주파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우리가 제대로 찾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길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점차 시간이 가면서 내가 러셀을 전담하게 되었다. 나는 배낭을 벗어 놓고 길에서 주운 나뭇가지를 스틱 대용이자 눈 쓸어내리기용으로 손에 들고, 오로지 방향 찾는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앞에서 전진했다. 결국 뒤에서 오는 다른 일행들, 특히 문영이가 무거운 내 배낭을 왔다갔다 하면서 옮기는 때아닌 노가다를 해야만 했다. 내가 지나가고 뒤에선 길을 다지고 마지막으로 배낭을 옮기고 하는 더디고 단조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편이 거의 두 배 정도의 속도로 전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뒤의 ‘노가다’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작업에 곧 빠져들고 말았다. 대부분의 리본이 눈 속에 파묻히고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보이는 빨갛고 노란 리본들을 발견했을 때의 일종의 성취감, 뭔가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 오르막길에서 러셀할 때의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작업까지도 내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오후 4시 30분, 야영할 수 있는 넓은 공터에 이르렀다. 2년전 겨울 문희가 텐트 안에서 끓는 물을 엎질러 양발에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한 곳이다. 덕분에 배낭을 가볍게 해 주느라 다른 일행들이 고생하긴 했지만, 이제는 완치되어 지금 뒤에서 노가다를 하고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다.


여전히 날씨는 흐렸다. 앞에는 큰 봉우리가 버티고 있었고 해가 지기 전에 맞는 길을 찾을 수 있을지, 혹은 야영할 수 있는 평지를 찾을 수 있을지가 불투명했기에 다시 텐트를 쳤다. 그동안 나와 문영이는 다음날을 위해 다시 맨몸으로 오르막길에 붙었다. 분명히 봉우리 왼쪽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 돌아가는 길목에 밧줄이 묶여져 있는 바위를 하나 넘어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도, 그 곳이 어딘지를 도대체 찾을 수 없었다. 한시간여를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길 찾기에 실패하고 텐트로 돌아왔다. 혹 우리 뒤에 사람이 오고 있다면 우리가 이리저리 뚫어놓은 길 때문에 그들도 고생할 것이라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이제 마등령은 지척이었다. 밤이 되면서 나한봉과 마등봉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문희가 화상을 입던 그 때, 마등령에서부터 이곳까지 중간에 자일하강을 하는 등 시간을 지체했음에도 서너시간만에 왔었다. 비록 해 지기 전에 길을 못 찾은 것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우리가 특별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리는 내려가서 가장 먼저 할 것들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모아진 결론은 결국 삼겹살을 배터질때까지 먹자는 것이었다.


연료는 두끼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밥은 한 코펠 가득 해 먹었다. 전날부터 하루에 두 끼, 그나마 한 번 먹는 밥, 그것만이 마치 우리의 삶의 이유인 것 같았다.



            [ 9 ]


밤 10시. 텐트 뒤쪽이 갑자기 훤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조금 후 1275봉 위로 보름이 갓 지난 둥근 달이 떠올랐다. 얼음조각같은 별들이 금새 빛을 잃었다.


겨울의 달빛은 춥다. 아니, 달빛은 따스하지만 겨울 숲은 달빛을 추워한다. 나무들은 그림자조차도 푸르스름한 빛으로 떨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산의 이방인인 나는 달빛의 온기를 느낄 것도 같았다. 한참을 밖에 서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저기 속초시와 속세의 불빛들이 반짝였다. 설악은 언제나 그렇다. 서북주능에서도, 공룡릉에서도, 북주능에서도, 문명과 그 문명의 빛에 너무나도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 그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길을 몰라 허둥대고, 내일의 길에 대해 불안해하고, 마치 먼 곳에 와 있는 듯이 꿈을 꾼다. 저 아래엔 가로등도 있고, 잃어버릴 염려 없는 길도 있고, 편히 누울 땅도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산에 오기를 갈망했던 것만큼이나 산에서 내려가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자꾸 산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길이 있으리라 여겼던 곳에 여전히 가로등과, 골목길과, 수많은 집들의 숲만을 확인하기 때문이 아닐까.


길을 못 찾고 내일을 염려하는 나는, 언제 이런 걱정없는 곳에 닿을 수 있을까.                


길이 없다. 나무보다 많은 전신주의 전선이 뿌리처럼 이 도시의 집들을 움켜쥐고 길을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골목은 닫힌 길, 꺽어지는  곳에서  절벽이다. 잘려나간 나무의 뿌리들이 거꾸로 자라나 집을 허공에  매달고 있는 도시의 밤은 무섭다. 마주치지 않고 서로를 통과해가는 사람들.        


발가락이 발가락의 기억을 더듬는다. 딱딱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 도시의  공터로 쫓겨나 흙처럼 버려지기 때문이다. 발가락이 발가락의 기억을 더듬다가 딱딱해진다. 발목에서 뒷골까지, 이러다가 잠들면 꿈도,에서  생각도 굳어진다. 채 굳지 않은 꿈들이 생각을 빠져나가려고 풀벌레처럼  모여  아우성치는 흐린 전신주 불빛 아래, 누군가 지나간다.  아무것도 그의 무게를 받아주지 않아 그림자가 땅처럼 그를 받치고 간다.        


잠이 오지 않아요. 무서워요. 누가 내 잠을 빌려 꿈꾸는지 꿈이 자꾸만  낯설어요. 꿈속에 날 버려두고 깨어나 한밤중에 창 밖을 내다보면  뿌리  둘 곳 없어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나무들. 꿈없이 사는 일은 악몽  같아요. 내 잠속에 푸른 그늘을 드리우던 나무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무서워요. 여기도 사막인가요?        


나무의 뿌리들이 도시를 통째로 끌고 강으로 가고 있는 밤은,               


< 이성일, 나무들의 사막 >

    


다행히도 산의 나무들은 뿌리를 땅에 박고 서 있다. 비록 달빛에 추워하고 있을지라도.


달은 밤새워 텐트를 환히 비추어 주었다.



          [ 10 ]

 

간밤의 기대와는 달리 다시 구름이 잔뜩 끼었다. 1월 17일. 설악에 들어온 지 며칠째인지, 시간의 감각이 이미 무뎌졌다. 중요한 것은 식량과 연료, 그리고 하산까지 남은 거리 뿐,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전날 남은 누룽지에 북어국을 섞어 북어 누룽지 죽을 했다. 연료는 이제 연료통 바닥에 찰랑찰랑 할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능선상에서 1박을 더 해야 한다면 물이나 겨우 만들 수 있을까 말까 한 양이었다. 별로 입맛은 없었지만 이것이 산에서 먹는 마지막 밥이라고 생각하고 억지로 삼켜 넣었다.


눈이 그친 지 벌써 이틀째다. 나는 일행들에게 오늘 낮 12시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못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었다. 공룡을 넘는 팀이 한두팀은 있을 것이거니와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마등령에서부터는 대로가 뚫려 있을 테니까.


이제 봉우리 2개만 넘으면 끝난다. 전날 해지기 전 헤매면서 지형을 보아둔 덕분에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또다시 익숙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마등령에 가까워지면서 왜 그리 급경사 오르막길이 자주 나타나는지, 30도도 넘는, 최고 45도 정도에 이르는 오르막길이 자꾸만 눈 앞에 나타났다. 다른 때야 아래 위로 오르내리기도 하고 지그재그로 올라가게도 되어 있지만, 우리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서 무조건 직선거리를 목표로 하였다. 내리막길이나 우회로는 힘으로 눈을 밀치며 가고, 오르막길은 길을 다졌다.  밟고, 눈을 훑어 내리고, 밟고, 훑고, 밟고, 훑고, 단단해지면 밟고 일어서서 다음발로 밟고, 훑고, 밟고 훑고......... 단조로운 작업이라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마치 슬랩을 오르는 것처럼, 미묘한 균형을 잡지 못하면 기껏 만들어 놓은 스텝이 푹푹 꺼지는 통에 급경사에서는 마치 벽등반을 하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그러나 앞서 가는 나야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아내려고 긴장하고 있었다지만, 뒤의 ‘노가다’ 들은 꽤나 괴로웠을 것이다. 눈이 그치고 며칠이 지나갔기에 그나마 눈 다지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는 것이 조그만 위안이었다.

 

중간에 러셀하던 경민이가 발로 뭔가를 툭툭 차니 저 눈밑에서 이정표가 하나 나왔다. 평소 키높이인 이정표가 발에 채인다는 건 우리가 허공을 걷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눈을 파보니 ‘마등령 1.1km'라고 쓰인 이정표였다. 그 정도면 해 지기 전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 듯했다.  처음엔 하루에 2, 300미터가 고작이었지만, 날이 거듭되면서 나름대로 요령이 생겨 운행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마등령에서 러셀된 길을 만나면 야간산행을 해서라도 내려간다 하며 이를 악물었다.

 

12시를 전후하여 봉우리 하나를 넘었다. 다들 노가다 작업에 지치고, 특히 무릎이 아픈 문영이가 고통스러워 해서 운행방식을 2회 왕복으로 다시 바꾸었다. 그런데 밧줄이 묶여져 있는 급경사 오르막길을 뚫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가서 배낭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다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게 아닌가.

 

“ 안 가고 뭐하고 있어? ”


조금 짜증섞인 목소리로 물었더니, 겁나서 못 가겠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삐딱한 바위벽을 옆으로 트래버스 해야 하는 살떨리는 지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로는 2,30미터 정도 수직으로 낭떠러지나 다름없고 눈이 바위에 비스듬히 얹혀져 있는게, 건너가다가 떨어지면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그 사이로 번듯하게 길이 나 있지만 눈이 쌓이니 저 밑 어딘가 길이 있다는 사실은 심리적 위안밖에는 되지 못했다.

 

결국 다시 내가 앞장서는 수밖에 없었다. 용감한 척, 쉽게 건너갈 수 있는 척 했지만 눈의 균열된 부분을 열심히 찾아가면서 내딛는 다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등산로를 따라 전진하면 그나마 나뭇가지에 걸린 배낭을 빼내느라 쓸데없는 힘을 소모하지 않아도 괜찮았기에 최대한 등산로를 찾으려 애썼지만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우선 관목숲이 대부분 눈에 잠겨 있어서 겉에서 보면 넓은 대로처럼 보이는 곳이 사실은 무성한 나무가지 위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높은 나무들은 상고대가 5cm 두께로 얼어있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축축 휘어져 길을 가로막았다. 리본은 대부분 보이지 않았고 하루에 몇 차례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끔 눈 위에 주저앉아 담배라도 피우고 있으면, 크게 길을 잃어서 헤매는 것도 아니면서도 단 2시간 거리를 며칠이 걸려도 가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또다시 해는 서북주능 너머를 기웃거리고, 등뒤에서는 바람이 점점 세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산행이라기 보다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배부르고 따뜻하고 편한 것만을 생각하는, 몸의 욕구 그것밖에는 내게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마지막 남은 초코렛 한 덩어리가 뒤에서 전달되어져 왔을 때 장갑 낀 손으로 받아들다가 그만 눈 속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었다. 나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미친듯이 맨 손으로 눈을 파헤쳤다. 귤 한 조각, 초코렛 한 조각이 얼마나 힘을 나게 하는지, 그리고 그것에 나는 얼마나 그런 것에 동물적으로 집착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한 조각 초코렛을 찾아서 입에 물었을 때의 그 행복감. 인간의 몸이란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 보려 애써 보았지만 그저 좋다는 느낌 이외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한봉 오르막길. 리본을 하나 확인한 후 또다시 길을 놓쳤다. 봉우리 하나가 보이길래 위치 확인도 할 겸, 텐트 자리도 찾아 볼 겸 무조건 직상해 올라가서 좁은 릿지 밖으로 목을 내밀어 봤더니 아래는 머리카락이 쭈삣 설 듯한 허허공간이었다.  기겁하여 다시 후퇴, 거리로는 30미터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30분 이상을 소비했다. 결국 우리는 경사 30도 정도의 급경사 비탈길에 다시 하루를 쉬기 위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룡능선 상에서 네 번째, 설악산에 온 후로 다섯번째 맞는 밤이었다.

 



         [ 11 ]


문영이의 제안으로 그 자리를 잡긴 했지만, 텐트 한 동이 들어갈만한 공간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게다가 바로 머리 위에는 좁은 바위 통로가 자리잡고 있어서 눈이라도 다시 오면 십중팔구 눈사태를 얻어맞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이상 후퇴해서 좋은 자리를 찾아볼 체력도, 의사도 없었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며칠간은 눈이 오지 않는다는 내 설익은 경험을 믿기로 했다. 문영이는 때아닌 태권도의 찍어차기 기술을 발휘하면서 비탈길 한쪽면을 깎기 시작했다.


눈은 파도파도 끝이 안 보였다. 우리 키높이 정도까지 팠는데도 바닥은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놀랍게도 텐트가 들어갈만한 직사각형 평면이 만들어졌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우리는 신발을 벗을 생각도 안 하고 배낭을 밖으로 내놓을 생각도 안 했다. 배낭을 내놓을 공간을 만들려면 텐트 밖에 눈을 어느정도 파내야 하는데 그럴 몸과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좁은 2-3인용 텐트에 사람 네 명과 배낭 네 개가 한 데 어우러져 뭉기적거렸다.


텐트 문을 열면 한 뼘도 안 되는 곳에 깎아놓은 벽이 만져졌다.  손을 내밀어 벽을 벅벅 긁어서 눈을 퍼날랐다. 그동안 아낀 덕분에 겨우 물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연료는 남아 있었다. 내가 자꾸 벽에서 눈을 퍼오자 문영이의 말이 걸작이다.


“형, 지금 벽 긁고 앉아있수?”


아닌 게 아니라 먹을 게 별로 없다. 간식 종류는 바닥났고 쌀은 한끼분 정도가 있었지만 연료가 없었다. 운행 중에 먹으려던 생라면을 저녁을 위해 남겨놓은 게 유일하게 남은 메뉴. 그 정도면 그나마 열량보충으로는 괜찮은 듯 싶었다.


둥글레 뿌리를 넣어 차 1리터 정도를 끓여 보온병에 담고, 다시 1리터 정도 눈을 녹였더니 연료가 바닥났다. 버너에서 피시식 바람새는 소리만 내고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드디어!  연료가 떨어졌다.  갑자기 몸이 추워졌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음에도 허전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간은 오래 전에 멈추어 있었다. 이제 산에 온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해가 뜨면 눈과 씨름하고, 저녁이 되면 땅을 다져 텐트를 치고, 눈을 녹여 물을 만들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짐을 정리하고, 침낭에 들어가고 다시 해가 뜨면 짐을 챙기고, 하는 모든 것들이 이젠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반복과 반복. 나는 그저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그저 단순하게 살아가는 한 생명체일 뿐이었고, 그것이 더없이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꿈을 꾸는 기분. 세상사는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졌다.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황지우, 겨울산 >


점점 더해가는 긴장의 정도와는 반대로 나는 점차 지쳐가고 있었나 보다. 주린 배에도 불구하고 생라면은 모래알 같아 넘어가지 않았다. 되도록 물을 많이 마시려 노력했다.


물 속에 담갔다 꺼낸 듯이 축축한 침낭. 비브람을 신은 채 그 침낭 안에 들어갔다. 배낭에 등을 기대고 반쯤 누운 자세로 잠을 청했다. 식량이 없으므로 이제는 산에 오래 머물수록 손해다. 대충 밤을 보내고 새벽에 다시 출발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침낭 끈을 조였지만 생각과는 달리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본격적으로 휘몰아치는 바람은 밤새 텐트를 흔들어댔다.



         [ 12 ]


1월 18일. 제발 더디 왔으면 하던 아침이 갑자기 찾아왔다. 아직도 어둑어둑한 새벽, 냄새나는 침낭을 뒤집어쓰고 앉아서 벽을 바라보며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짐 챙기고 출발하자는 소리가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오래 굶어야 할 것인가.


비장한 마음으로 침낭에서 수통을 꺼냈다. 물 몇 모금씩을 마시는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다. 이 몇 모금 물이 허기를 달래줄 수만 있다면.....


물! 오늘 못 내려가는 비상사태가 오더라도 저녁때까지 최소한 물은 찾아야 한다. 하늘에서 휘발유 눈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바람이 미친듯이 불어제끼는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거의 일주일만에 보는 찬란한 태양. 저 태양을 얼마나 그리워 했던가. 저 태양만 뜨면 마치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갈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태양은 축복이랄 수는 없었다. 햇빛이 녹여놓은 눈 표면이 강풍에 휘날려서,  작은 얼음조각들이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들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 등뒤를 보면 저 멀리 대청봉 주변에서 뿌옇게 눈 휘날리는 모습이 그 먼 곳에서도 보였다. 겨울에 중청에서 대청을 향해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번 쯤은 맞아보았을 살인적인 바람, 배낭을 지고 있지 않으면 몸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 미친 바람이 하필 이날 불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에 덮이는 얼음을 닦아낼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나는, 춥다는 것이 진짜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했다. 그동안 우리가 공룡능선에서 했던 고생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두들 말이 없어졌다. 지난 며칠간이 눈과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바람과도 싸워야 하고, 무엇보다도 시간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조금만 길을 잘못 든다는 것은 곧 조난을 의미했다.


얼굴에선 눈조각들이 녹아 끊임없이 물이 흘러내렸다. 덕분에 더이상 눈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얼굴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이 엄습해왔다. 얼음옷을 입은 듯 얼어붙은 오버복 상의는 딱딱한 채 녹지도 않았다. 추웠다. 춥다는 말 이외에 무슨 말이 더이상 필요할 것인가.


원효로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등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 황지우, 눈보라 >



마음과 달리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바람에 노출된 곳은 눈 뜨기가 어려웠고, 바람이 없는 곳은 적설량이 만만치 않았다.


나뭇가지들을 필사적으로 헤치고 정상에 섰다. 나한봉. 오전 11시경. 마등령까지 내려가는 길은 북사면이기 때문에 훨씬 적설량이 많을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고 있었지만, 막상 러셀해 보니 무릎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오고 있었기에 북사면이 오히려 조용했다.


눈 그친지 벌써 사흘째.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누군가 지나가면서 사탕 하나라도 던져주고 가면 한달음에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을 만난 것이 언제였던가. 나흘 전이었나 닷새 전이었나. 아마도 마등령에서 공룡 러셀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사람들이 돌아갔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등령까지만 가자. 마등령까지만......


전날 먹은 누룽지와 생라면은 이미 소진되어 버리고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허기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책에 보면 남들은 사흘씩 굶고도 산행하는데 겨우 이정도 굶은 것 가지고.......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배고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길을 걷고 또 걸어 마등령에 이르렀다. 천막을 헐어 눈 속에 파묻어 놓은 가게자리가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건너편 갈림길 쪽엔 능선상에 뭔가 사람 발자국 비슷한 것이 나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가게에 도착했다. 4박 5일간의 공룡능선이 드디어 끝났다. 이제는 기쁨의 악수나 한번 나누고 하산할 차례다.


아! 그러나............


마등령.

이리 저리 어지러이 패인 눈은 오직 바람만이 마등령을 지나쳐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어떤 사람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마등령에 오면 길이 뚫려 있을 것이란 희망, 그 하나로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왔는데.....


눈 위로 삐딱하게 고개를 내민 식생 보호구역 표지판, 비선대 3.4km라는 이정표, 그리고 여전히 미친듯이 불어대는 얼음바람. 우리는 잠시 망연자실 제자리에 서 있었다. 길을 뚫으며 하루에 1키로 가기도 힘든데 3.4 키로를 언제 간다는 말인가.


문영이가 어디선가 삽을 찾아들더니 천막 위 눈을 파내기 시작했다. 가게 아저씨가 겨울을 맞아 철수하면서 혹시 통조림 같은 거라도 놓고가지 않았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절망적 기대 때문이었지만, 설마 먹을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 희박한 가능성에 때아닌 삽질을 해대는 문영이의 모습이 너무 절박해보여 차마 그만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주 정말, 정말 정말 혹시라도, 먹을 게 저 눈 밑에 파묻혀 있을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눈을 아무리 파도 천막은 나오지 않았다. 조금 시도해 보던 문영이는 곧 삽을 내던졌다. 애초에 그런 희박한 가능성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처지는 아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비선대로 향할 것인가 오세암으로 내려갈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해야 했다. 이런 어려운 산행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다가오기 마련이지만, 이것이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 들어선 길이나 잘못된 시간 계산은 단지 운행 속도를 더디게 할 뿐 야영할 수 있는 자리만 있다면 해결되는 것이지만, 이 상황에 루트를 잘못 잡는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물론 거리상으로만 보면 오세암이 훨씬 가까운데 해지기 전에 오세암에 도착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비선대는 거리는 멀지만 마등령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물을 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만 있으면 생쌀을 씹든 나무껍질을 씹든 내려갈 수 있었다. 반면에 비선대길이 능선 사면이라는 점은 문제였다. 급경사라도 오세함을 향해 계곡길을 내려가는 것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게다가 오세암에 도착하면 따뜻한 밥 한 술은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적설량도 걱정이었다. 만약, 오세암으로 내려가다가 해가 떨어지면 물도 없는 곳에서 다시 하루밤을 버티고 또 걸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인가...............

 

선택의 시간.


나는 비선대를 선택했다. 잘못된 결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선대길이 훨씬 더 잘 찾아갈 수 있는 자신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가까운 곳에 물이 있다는 점에 가장 큰 희망을 걸었다. 언젠가 마등령에서 비선대까지 맨몸으로 1시간만에 뛰어내려갔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빠른 시간 안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 불러일으키려 노력해 보았다.


그런데 문희가 아무래도 누군가 지나간 것 같다는 말을 몇 차례 했다. 그러고보니 눈에 덮였지만 야영한 자리도 있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눈 위에 선명하게 누군가의 오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가 보다.  발자국이 없어 낙담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잃어 버리고 말았던 모양이다. 그 ‘소중한’ 오줌발은 분명히 누군가 눈이 그친 후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아까 내리막에서 저 건너편에 보이던 길 흔적 비슷한 것도 혹시 진짜......?


우리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반신반의하면서 다시 비선대쪽 갈림길을 향해 능선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15분 뒤. 눈 위에 선명한 사람 발자국을 찾아냈다. 입에서는 환호성이 나왔지만 몸은 반대로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오전 내내 계속된 러셀에 지쳐있었던 것이다. 배낭을 던져버리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으면서 나는 대열의 맨 뒤로 처져 걷기 시작했다. 오후 1시 30분이었다.



       [ 13 ]


마등령 갈림길. 미끄럼을 타고 내려가다가 잠시 후 햇볕 들고 바람 없는 곳에서 배낭을 내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아침에 출발한 이후 6시간 넘게 한 번도 쉬지 못했다. 살을 에는 바람과 급한 마음은 단 한번의 휴식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보온병을 꺼내 어제밤 담아 둔 미지근한 물을 나누어 마셨다. 따뜻했다. 마치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편해지고 배도 조금 덜 고픈 것 같았다.


공룡능선과 화채능선,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긴 산행을 통해서 경치를 구경하며 멈춰 선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눈이 오거나 흐린 날이 계속되었던 까닭이다.


바다. 더이상 낮출 곳이 없어 넓은 바다. 설악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바다는 평화로울까. 바다에서 바라보는 설악에는,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려고 아둥바둥 애를 쓰는 삶의 모습도, 조금이라도 편한 곳을 찾아 허겁지겁 자리를 찾는 인간의 모습도 담겨있지 않을 것이다. 산에서 보는 바다, 그 아래에도 사람들 못지 않은 고단하고 외로운 삶이 담겨있을 것이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우리들의 이 몸부림도, 훗날에는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산을 내려가면서, 언제나 마음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 산엔 바람도, 추위도, 굶주림도 없고, 주름마다 눈을 머금은 준엄한 바위 봉우리들과 백색의 능선만이 햇살에 빛난다. 그 산이 내가 사는 산이다. 우리가 도망치려 애쓰는 이 산이야말로 가짜다. 때때로, 우리는 산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곤 한다. 내려가는 것은 올라오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다.


발자국은 2명 내지 3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하나는 여자인 것 같다.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비선대로 가는 길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지나치게 높은 곳에서 우왕좌왕하다 느닷없이 직상하여 능선에 올라 일박을 하더니, 다시 나무가지를 뚫고 힘든 길을 가기 시작한다. 마등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된 쇠난간을 용케도 찾아내더니, 이제는 제길을 버리고 갑자기 계곡으로 뚫고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마도 튀어 나온 바위를 넘어야 하는 것을 잘 몰랐거나, 아니면 제길 찾기에 지친 나머지 비상 탈출을 시도한 듯했다.


원래의 등산로를 한 번 넘겨다 보니 당연하지만 아무 흔적도 없이 그저 눈만 덮여 있었다. 더이상 그런 곳에서 헤매기는 싫었다. 우리도 발자국을 뒤쫓아 가파른 경사면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설악골로 향하는 것이었다.


나무도 별로 자라지 않은 넓은 골짜기에 저 아래까지 일렬로 길이 나 있었다. 마치 이대앞 전철역의 에스컬레이터를 수백개 붙여놓은 듯 길고 지루하고 단조로운 곳이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그저 땅만 보고 걸었다. 며칠간의 기계적인 작업에 지친 무릎이 아파왔고, 원래부터 무릎이 좋지 않은 문영이는 다리를 절고 있었지만 이렇게 길을 뚫어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 뿐이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힘없이 삐걱거리는 발목은 서너걸음에 한번씩 중심을 잃게 하고,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과 기운 없는 다리는 열댓 걸음에 한번씩 나를 넘어뜨렸다.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곳. 똑같은 걸음, 똑같은 길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점점 해가 기울어갔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아무도 쉬었다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허기로 잠시 발을 멈추면 곧 추위가 밀려들었다. 목이 말라도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추위 때문에 눈도 먹을 수 없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졸졸 물 흐르는 소리. 4시 30분 경 처음으로 물을 만났다. 이제는 됐다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그곳까지 눈을 헤치고 가서 물을 떠마시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산에 더이상 머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 날이 저물면 야영하고 가자는 유혹이 생길까봐 두려웠다. 긴장의 끈을 놓으면 몸의 근육마저도 풀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우리의 안내자들은 설악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물을 건너고 폭포 지대를 우회하고 하면서도 계속 등산로 주변을 놓치지 않았다. 하루밤 또 야영한 자리가 나타나고, 길은 계속되었다.


나는 마지막에 처져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앞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조금 걸음을 빨리하고, 누군가 시야에 나타나면 또 조금 천천히 걷고,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길가에 뭔가 노란 게 보였다. 앗! 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귤껍질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안내자들은 식량 걱정 없이 내려간 모양이었다.


나는 주저없이 귤껍질을 모두 주워 입으로 가져갔다. 앞서 간 세명은 이 유혹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누가 귤껍질을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 했던가!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긋한 내음. 갑자기 우르릉쾅쾅 요동치는 배 속. 아, 내 몸은 여전히 잘 기능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발걸음이 경쾌했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불동에 가까이 온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초조하지는 않았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능선이 시작되는 비탈을 돌고 돌고 또 돌고.... 드디어 합수지점인가 하면 또다시 설악골이 이어지고, ‘이번에는!’ 하면서 돌면 역시 끝없이 길은 이어지고......


오후 6시. “철다리다!”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드디어 천불동 계곡에 도착한 것이다. 어두워져 가는 산 속에 붉은색 다리가 저만치 보였다. 일어나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출발한 지 10시간 이상 된 때였다.


철다리를 건너자 갑자기 매끈매끈하게 얼어붙은 고속도로 같은 등산로가 나타났다. 이미 걸음을 다리에 맡겨놓고 있던 나는 이 갑작스런 변화에 이리저리 미끄러지고 넘어지기 바빴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한번 넘어지면 일어서는데 5분은 걸렸다. 나는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속에서는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1275봉 오르막길, 컴컴한 어둠 속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하이타이 같은 눈가루들의 쏴- 쏴-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따갑게 얼굴을 때리는 눈보라, 안테나 잘못된 TV 화면처럼 두껍게 흰색을 뒤집어쓴 나무들, 산신령의 흰 눈썹같은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눈을 잔뜩 부릅뜬 바위 절벽들, 어두운 밤하늘에 만화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 보름달, 뿌연 구름 속 이리저리 몸을 흔드는 밤의 나무숲, 마등령에서 보인 햇살 비추는 1275봉, 희운각에서 파닥거리던 새들의 분주함..........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었다.


비선대 산장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는 드디어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다.



       [ 14 ]


얼마만에 보는 밥인지, 허겁지겁 먹기는 했지만 잘 넘어가지도 않고 소화도 되지 않았다. 집에 전화를 해 봤더니 그동안 우리가 실종신고가 되어 있었고, 아래 설악동에는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분 등등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산이 조금 늦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소식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때의 미안한 기분은 차마 말로 다하지 못한다. 우리가 산에서 헤매고 다닐 동안 산 밑에서 있었던 일들은 긴 이야기이고 이 글에서 쓰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의 삶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토록 실감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토왕폭에서 눈사태 사고가 나 많은 산악인들이 생명을 잃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연일 TV 톱뉴스가 눈사태 매몰자 구조 현황이었고, 갑작스런 폭설에 미처 교통통제를 못해 대관령 고개길에 차들이 일렬로 멈추는 바람에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대관령 휴게소까지 걸어올라가 밤을 지새웠다고도 했다. 우리가 내려오기 이틀 전에 '마지막 하산자'들이 TV 뉴스에 인터뷰를 했고, 그 이후 "설악산 추가 실종자 4명 확인"이라는 제목과 함께 우리가 신문과 TV에 나왔다고도 했다. 나는 왜 예상이 어긋났는지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매몰사고 때문에 눈이 그친지 사나흘이 되도록 입산을 계속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상식으로는 최소한 마등령에서부터는 번듯하게 러셀이 되어 있어야 정상이었다.


오버복을 벗고 파카를 꺼내입었다. 설악동에서 만날 분들을 생각해 의관을 정제하고 이미 깜깜해져 버린 바깥으로 다시 나섰다. 조금 먹은 밥 덕분에 금방 펄펄 기운이 되살아났다. 인간은 참 단순하다.


이제는 지나치게 길이 잘 나 있었다.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누군가 하늘 좀 보라는 탄성에 고개를 들어보니 장난감 별처럼 초롱초롱한 별들이 하늘 가득 박혀 있었다. 저 산정에서 본 얼음조각같은 별은 아니었다. 만화의 한 장면같은, 지나치게 또롱또롱한 별 때문에 어색하고 유치하게 보이는 만화의 한 장면같은 별들이었다. 언제나 그렇다. 내가 설악에서 제대로 별을 보는 것은, 언제나 설악동으로 내려가는 하산길 뿐이다.


별들의 세계. 그곳에는 바람도 없고 눈도 없고 산도 보이지 않는다. 그 평화로움 만큼이나 밤하늘은 차가웠다.  나는 산을 뒤로하고 걷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제서야 서로 마주보고 악수를 할 수 있었다. 설악을 등 뒤로 한 채. 그리고 설악을 함께했던 모든 이들의 기억도 뒤로 한 채.



겨울산을 내려오면서

뒤를 돌아본다.

희끗희끗 눈 덮인 산,

계곡들은 차고 맑은데

거기 네 모습이 어른거려

자꾸 발을 멈춘다.

- 너는 아프냐

돌아보면 차가운 계곡

차가운 계곡뿐인데

네 모습이 거기 어른거려

내 뒤에서 자꾸 잡아당겨

돌아서서 한참 바라본다.

- 너는 아프구나

어느 날 네가

북한산 계곡에서 잃어버린 시계,

시간을 靑山에 묻었으니

마음은 문득 푸른 하늘이었는데,

우리의 몸은 또 무겁고

네 病床의 시간이 나를 따라다닌다.

- 너는 아프구나

      [여기까지 쓰고 未完으로 놔두기로 함]


 < 정현종, 겨울산 >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멈췄던 근심걱정들도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 차갑던 산에서만큼이나 뜨겁게 살아야 하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98. 1. 26.      


(월간 산 98년 4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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