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설악산 귀때기청봉 상투바위골
천국이 있다면 그곳은 하얗고 깨끗한 세상일 것이라 늘 생각해왔다.
알록달록 꽃들이 만발하고 푸른 시냇물과 초록 나무숲과 상쾌한 산들바람이 있는 천국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던데, 나는 왜 그런지 몰라도 <캐스퍼> 같은 하얗고 귀여운 영혼들이 돌아다니는 무채색의 희고 깨끗한 공간이 상상된다. 나의 그 상상 속에선, 하얗고 몽글몽글한 사람(?)들이 자기만의 색깔의 빛을 저마다 가슴에 품고 하얀 공간을 자유로이 다닌다. 그 빛은 그를 가장 특징적으로 표현하는 색이어서, 어떤 성격과 성향인지 서로 말 없이도 직감으로 알 수 있다.
내가 겨울산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쩌면 이런 머릿속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얀 겨울산은 어쩐지 천국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생명의 기운 가득한 여름산보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산이 오히려 덜 외로운 것도 같고, 겨울산에 다녀오면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는 기분도 든다. 잠시나마 천상의 세계를 노닐다가 속세의 사바세계로 돌아온 것 같다.
물론 추위는 빼고. 천국이 이렇게 추울 리는 없다.
설악산 귀때기청봉(1578m)에 올라갔다가 때아닌 겨울을 만났다. 단풍놀이를 생각하고 아무 준비도 안 했는데 산꼭대기엔 호된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장갑도 없는 손이 시리다 못해 막 아팠다.
한계령에서 출발한 직후부터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올해의 첫눈이란다. 처음엔 싸리눈이 살짝 흩날리더니 은근하고 꾸준히 내렸다.
3주 전, 오늘의 동행 미선이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내게도 참 고맙고 좋은 분이었는데 예상보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치유의 산행이라면 너무 기능적이고 거창하게 들리지만 올해 설악산 단풍이 예쁘니 보여주겠다고 함께 왔는데, 단풍은커녕 앙상한 나뭇가지에 상고대가 가득했다.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전혀 다른 산이 돼 있을 수가.....
예보 상으로는 금방 그친다고 한다. 한반도 위성사진을 보아도 쾌청하다. 산에 걸린 구름이 물러가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겠지. 귀때기청봉에 왔는데 조망은 보고 가야 할 것 같아 찬 바람을 맞으며 꼭대기에서 버텼다.
한 시간까지는 아니고 사오십분 정도? 짙은 운무가 아주 가끔씩 살짝 옅어졌다 진해졌다 반복하더니, 점점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운무가 사라지고 파랗고 쨍한 하늘이 열렸다.
하얀 눈 뒤집어쓴 산정의 앙상한 나무들은, 아직 단풍물 간직한 어여쁜 저 아래 나무들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유행가 가사처럼, 너는 눈 맞아 봤냐 나는 단풍 들어 봤다, 우월감과 열등감이 섞인 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예쁘니 부럽네 즐길 수 있을때 즐겨라, 격려와 질투가 공존하는 그런 덕담을 조용히 건네고 있었을까?
가을이 채 떠나가기 전에 겨울이 왔다. 사람은 떠난 후에야 소중함이 느껴진다던데 계절은 떠나기 전에 그 다음 것이 먼저 온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지금을 더 즐기고 사랑하라는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귀때기청 안부, 하얀 세상과 초록 세상의 경계에 잠시 앉아 쉬었다. 그리고 따스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햇살 아래, 우리는 바람 몰아치는 하얀 봉우리에서 단풍 알록달록한 계곡으로, 겨울에서 가을로, 천상에서 속세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산행 안내 및 주의 사항.
하양과 초록의 경계였던 귀청 안부(대승령 방향), 그곳에서 상투바위골 길이 시작한다. 그곳엔 따스한 햇살 비추는 널찍한 풀밭과 나무 벤치가 있고, 필요한 사람 누구나 쓸 수 있도록 구급약품함도 설치되어 있다.
살인적으로 길고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은 서북주능 거친 길을 걷다 갑자기 이렇게 넓고 평화로운 휴식공간을 만나면 누구나 벤치에 앉아 다리쉼을 하게 된다. 그 다리쉼을 하다 고개를 들면 남쪽 한계 계곡 방면으로 내려가는 갈림길, 즉 상투바위골 샛길 입구가 저기 딱 보인다.
이쪽으로 비상탈출하면 금방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굳이 대승령까지, 혹은 귀때기청봉 넘어 한계령 삼거리까지 먼 능선길을 갈 필요없이 손쉽게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들 수 있다. 나도 서북주능 종주를 하다 그런 유혹을 느껴본 적이 있다.
중간에 폭포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우회로가 있다지만 못 찾을 가능성이 있고, 다른 하나는 우회로가 없어서 절벽을 내려가야 한다. 사람들이 남겨놓은 슬링이 있으면 천만다행이지만, 국립공원 공단이 계속 끊어놓기 때문에 운 없으면 폭포 위에서 고립되는 수가 있다. 줄 없이 폭포 옆면 벽을 클라이밍 다운하다 떨어질 수도, 혹은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고 도로 되짚어 올라가게 될 수도 있는데 두 가지 모두 조난 상황이다. 실제로 그렇게 조난 당한 사례가 꽤 있다고 한다.
폭포는 계곡을 3분의 2 정도 내려간 지점에 있는데, 위 사진은 내려가다 첫번째 만나는 폭포, 사람들이 제2폭포라고 부르는 곳이다. 폭포 우측으로 오르내려야 하는데 암벽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올라가는 것은 그럭저럭 할 수 있겠으나 (그런데 마지막 턱 넘어가는 부분이 쉽지 않다), 로프 없이 클라이밍 다운으로 내려오기는, 글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폭포 상단에 하강용 쌍볼트가 박혀 있다. 하강 길이는 20미터 못 미친다. 중간에 선등자 확보용 볼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못 보았다.
위 사진은 내려오는 방향 만나는 두번째 폭포(제1폭포). 우회로가 있다는데 찾지를 못했고 어차피 자일을 준비했었기에 그냥 하강했다. 역시 상단에 쌍볼트가 설치되어 있고, 하강 길이는 30미터 살짝 못 미친다. 60미터 로프가 아주 조금 남았다. 중단에 확보용 볼트가 두 개 있다(더 있는데 못 보았을 수도).
제1폭포는 대부분 사람들이 우회로를 이용하는 것 같다. 폭포 아래 일이백 미터 이어지는 구간 바위가 미끄럽고 사람다닌 흔적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 구간 빼고는 상투바위골 전체에서 길을 잃고 헤맬 염려는 없어 보인다.
나중에 만난 산악인 출신 택시기사님의 말로는 국공이 폭포 상단의 하강용 볼트마저 제거하려다 말았다고 한다. 정규 탐방로 아닌 곳에 온 벌로 아예 죽으란 소리랑 비슷한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준비 없이 상투바위골로 하산하면 안 된다.
바람도 불지 않는, 햇볕 따스한 상투바위골은 평화로웠다. 잎이 거의 떨어져가는 나무들이 마지막 단풍잎을 놓치지 않으려 붙들고 있었다.
중간에 올라오는 사람들 두 팀을 만났다. 이런 인적 드문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반갑다.
계곡 전체 길이의 3분의 2 정도 내려가서 제2폭포를 만났다. 폭포 상단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데 모든 것이 따뜻하고 넉넉하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엄한 겨울산은 까마득하게만 생각된다. 늘 느끼지만, 눈 덮인 산은 내려오고 나면 현실 세계가 아니었던 것만 같다.
마른 낙엽이 굴러다니는 바위가 조심스러웠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허벅지까지 물에 한 번 빠졌다.
계절의 끝이면 늘 그렇다. 마지막 산행을 한 기분이 든다. 이제 올해는 가을 설악산에 다시 오지 못할 것이다. 일주일 정도 후면 단풍잎을 거의 다 떨군 숲이 찬 바람 속에 온 몸으로 눈을 기다리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찾아오는 새로운 계절, 나는 또 꿈을 꾸는 기분으로, 천상을 노니는 기분으로, 추위에 덜덜 떨며, 눈 덮인 산을 다니고 있겠지.
설악산의 가을이 떠나가고 있다.
올해 가을 설악산은, 참 예뻤다.
202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