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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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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Oct 17. 2023

그것은 산행이었을까

2023년 10월 설악산 마등봉





지난 주 울산바위에서 바라본, 뾰족한 세존봉과 구름에 싸인 마등봉


마등령 윗 봉우리, 요즘 마등봉이라고들 부르는 그곳에서의 야영은 나의 오랜 꿈이자 숙제 같은 것이었다.


(1) 최소 이틀, 최대 사흘 온전히 시간이 나는 때에

(2) 여유롭게 이른 오후에 마등봉에 도착하고

(3) 마등봉의 압도적인 360도 파노라마 조망 속 일몰과 일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적당히 맑은 하늘과

(4) 별 사진도 찍힐 만한 적당히 맑은 밤하늘 속에

(5) 그렇게 마등봉 꼭대기에서 자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북주능 산행을 한다.


이에 덧붙여 만약


(6) 단풍이 절정이고

(7) 그믐달이어서 밤하늘 별빛이 더 잘 보인다면


그러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드림 산행이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다.


스물 한 살 때 마등령에 처음 간 이후 그곳의 압도적인 경관은 늘 내 마음 속에 있었고, 마등봉 꼭대기 너머 누군가 쌓아놓은 바람막이 돌벽 아래서 울산바위와 동해 바다를 바라볼 때면 늘 마음이 편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등봉 꼭대기에서 잘 기회는 없었다. 아주 오래 전 봉우리 꼭대기에 텐트를 친 적이 딱 한 번 있긴 하다. 그런데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친구 성태와 둘이었는데, 깜깜한 텐트 벽 너머 번쩍번쩍 비치는  번개에 모골이 송연해진 우리는 비를 맞으며 우왕좌왕 허겁지겁 물건들을 배낭에 되는대로 쑤셔 넣고 아래로 내려갔었다. 이를테면 산신령에게 쫓겨난 셈인데, 이후 그 꼭대기에 텐트를 쳐 본 적은 없다.


최근엔 설악산에 무박으로 갈 때가 많았고, 다른 산도 다녀야 했고, 동행자와 함께인 주말은 서로 상황이 맞지 않기도 했고, 부당한 규제라 생각은 하지만 가지 말라는 곳에 찾아간다는 부담감도 솔직히 없지는 않고, 주말 온전히 이틀 내내 시간을 내기 어려운 경우도 생기고, 기타 등등....  그러다보니 마등봉 백패킹 이야기만 하고 다닌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른다.  


어릴 때 읽은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해설서에 행성이 일렬로 늘어서면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구가 망한다고 했던가. 아니 그건 그 책 저자가 예언과 행성직렬을 엮은 것이었던가. 아무튼 마치 노스트라다무스 행성 직렬처럼 위의 7개 항목이 모두 충족되는 그 때가 마침내 찾아왔다!!


영광의 그날은 바로 2023년 10월 14일 토요일.


지난 주 황철봉에서 본 바로는 이번 주가 단풍 절정임이 확실했다. 게다가 이날은 음력으로 8월 30일, 정확히 딱 그믐날이다. 아무리 속초 불빛이 있다 해도 1275봉 위로 반짝이는 별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날씨 예보는 토요일 낮에 비가 조금 오긴 하지만 오후 너댓시부터 개기 시작, 밤부터 다음날까지 맑다고 했다. 하늘이 너무 맑은 것보다 살짝 구름이 있어야 일출 일몰이 예쁘니 낮에 잠시 비가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비가 지나간 산이 더 맑고 깨끗하기도 하다.


어떤 면으로 보아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2년 전 나뭇잎 다 떨어진 늦가을의 북주능을 걸으며, 단풍잎 알록달록한 바위 봉우리들을 상상하며 아쉬워한 적이 있다. 너무너무 예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그 때가 온 것이다. 단풍물을 흠뻑 머금고 비에 깨끗이 씻긴 북주능!


며칠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찾아온 기회, 여유있는 산행을 하고 싶어 아예 금요일 무박 버스를 잡았다. 토요일 아침 늦잠을 자거나 길이 막히는 불상사가 생기면 곤란하다. 까짓거 하루밤 못 자는 게 대수인가. 노스트라다무스 행성 직렬 같은 기회가 마침내 왔는데.






사실 좀 과하긴 했다. 굳이 무박 버스까지 탈 필요는 없었는데, 밤에 출발해서 설악동에 도착하니 새벽 세 시.  가벼운 배낭 메고 맘먹고 빨리 올라가면 해 뜰 무렵 마등령에 갈 수도 있을 만한 지나치게 이른 시간.


주차장 앞 가게에서 만두도 사먹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아직 깜깜한 네 시다. 일출은 여섯시 반. 무료해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헤드랜턴을 켜고 걷기 시작했다.


비선대로 향하는 길은 흔들리는 랜턴 불빛과 따각따각 땅을 짚는 등산스틱 소리로 가득했다. 듣자하니 지난주 새벽 오색에서 대청봉 가는 길이 정체되어 평소보다 한 시간 이상 더 걸렸다고 한다. 쉬는 날 잠도 안 자고 한밤중에 설악산 올라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부터가 깜짝 놀랄 일인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더 놀랍다.


"아니 왜 이렇게 빨리 걸어요."

"늦었어 늦었어. 빨리 가야돼."


나도 그렇게 느리게 걷는 건 아니었는데, 가벼운 배낭을 멘 남녀노소 등산객들이 내 옆을 휙휙 지나간다. 산행 시작한지 십 분 정도 됐을 텐데 벌써부터 시간에 쫓기면서 걸어야 한다니.


나는 등산이 이러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대피소 예약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 긴 코스를 무조건 하루에 주파하도록 하는 국립공원 시스템이 문제다. 설악동 C지구에서 대개 오후 4시나 5시에 지나치게 일찍 출발하는 산악회 버스들의 일정도 등산객들의 무릎을 망가뜨리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C지구까지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그보다 훨씬 일찍 하산을 마쳐야 하니까.


그 행렬에 섞여서 걷다보니 나까지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져 막 빨리 걷게 된다. 가뜩이나 너무 시간이 남아 문제인데 이러면 곤란하다. 일부러 느릿느릿 걸으려 노력했다.






장군봉 지나 능선에 올라서니 밝아오기 시작하고, 세존봉 가는 능선(죽부인 전람회 릿지) 께에 이르니 건너편 화채능선 위로 해가 떠오른다. 햇살에 드러나는 산빛이 벌써 예사롭지가 않다.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 설악산


깜깜할 때는 몰랐다. 산이 이렇게 불타오르고 있는 줄.


마등령 오르막길에 뒤돌아 보이는 세존봉


동해의 아침 햇살과 공룡능선


조금 더 올라가서



가운데 1275봉. 뒤는 대청과 중청.


단풍이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다. 지난 몇 년의 단풍보다 올해가 훨씬 곱다. 내 주위의 다른 등산객들도 다들 그렇게 동의한다. 올해 설악산 단풍은 정말 예쁘다.


산악회 단체 산행객들의 파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산이 조용해졌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관문, 물을 조달하는 임무가 남았다. 마등령 가는 길엔 물이 두 군데 있는데 첫번째는 마등령 1.1km  이정표 샘터이고(예전에 그 자리에서 야영들을 많이 했다), 또 한 군데는 마등령 약 400m 전 물 흐르는 계곡이다. 역시 두번째 지점에 많지는 않아도 물이 흐르고 있다. 수낭에 물을 가득 채웠다.


공룡능선이 이렇게 보이다가


마등령에 오르면 1275봉이 뾰족해진다


시간을 지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목적지 마등봉에 오전 10시에 올라버렸다. 빛이 순해지고 사진 빛깔이 예뻐지려면 적어도 6시간은 더 지나야 한다. 큰일났다. 때워야 할 시간이 너무 많다.

 


마등봉 표지석은 2년 전엔 못 본 것 같은데 이상하다... 그 사이에 새로 생겼는지?








핸드폰 게임을 조금 했다. 샌드위치도 먹고, 봉우리 아래 너덜지대도 내려가보고, 미선이가 준 사탕도 하나 먹고, 핸드폰 게임을 더 했다.


예보대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아침엔 맑았는데 돌연 바람이 막 불더니 차가운 비가 흩뿌렸다. 꽤 추웠다. 젖은 땅 어디 앉을 수도 없어 우산을 들고 멀뚱멀뚱 서 있다가, 아직 12시밖에 안 됐지만 텐트를 쳤다.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산정을 방문하는 등산객이 나타나던데 그 분들을 위해서라도 텐트를 아직 치면 안 되지만, 너무 춥고 비는 오고 갈 곳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다행히 일기예보는 바뀐 것이 없다. 오후 4시 경에 갠다고 한다.


자 이제 나의 드림 산행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셈이다. 마등봉 일출과 일몰, 공룡능선의 별 사진, 북주능 단풍 산행, 이 세 가지 목적을 위한 출발 장소에 성공적으로 왔고 하루밤 잘 곳도 마련했다. 지금은 비가 오지만 세 시간만 기다리자. 구름이 걷히면 그때부터 본 게임 시작이다.


그 때 부르르 진동하는 전화. 외국에 있는 동생이다.


"여보세요."

"어 형 어디야?"

"나? 여기 산이지. 왜?"


엄마가 숨이 가빠하고 상태가 안 좋으니 모시고 응급실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고~~


코로나에 걸린 엄마가 몸살로 누워 계시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동생은 폐렴이 의심된다고 한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겠지, 아니어야 해, 아아 안 돼.....


같이 계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더니 집에 한 번 와 보라고 하신다.


이럴 수가, 흑흑, ㅠㅠ...


다음 주에 설악산에 다시 올 수는 없다. 시간이 안 된다. 그 다음 주는 10월 마지막 주인데 이미 단풍은 다 떨어지고 없을 것이다. 그믐달과 날씨와 모든 조건이 완벽했는데.... 이런 기회가 내년 이맘때가 되면 또 올까? 설마 몇 년을 또 보내게 될까?


아냐 괜찮아. 엄마가 당장 응급실에 갈 정도는 아닐 거야. 이렇게 억지로 생각해 보지만, 마음 저 한 구석 희미하던 목소리가 시간이 지나며 자꾸만 점점 커진다.


'아직 늦지 않았어. 한 시 반인데. 지금 얼른 짐 걷어서 내려가면 오늘 저녁에 서울 갈 수 있어.'


원래 계획대로 하면 내일 밤중에나 부모님 댁에 갈 수 있다. 문제는, 내가 산에 백패킹을 다니는 게 부모님에게 절대 비밀이라는 거다. 설악산이라면 더더욱. 과거에 내가 산에서 사고친 적이 있어서 큰 트라우마가 있으시다. 그러니 산 핑계를 댈 수는 없다.


엄마가 병으로 힘들어하는데 산행 아쉽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내가 문제일까? 아마 그렇겠지? 가족이 아픈데 산행 아깝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설사 별로 심각한 거 아니라고 해도 가서 얼굴은 비쳐야지. 혹시 진짜로 응급실에 가야할 수도 있잖아. 아아 근데 이제 언제 이런 산행을 또 오나.....


온갖 교차되는 생각 속에 과감하게 텐트 팩을 뽑았다. 그리고 묘한 죄책감과 아쉬움 속에 텐트를 걷기 시작했다.


마등봉에 텐트를 쳤다가 우중에 걷어서 가방에 우겨넣는 일이 벌써 두 번째다. 별 이상한 곳에서 역사는 반복된다.






대충 배낭에 막 넣고 안 닫히는 지퍼를 힘으로 끙끙대며 당기고 있는데 다른 백패킹 팀이 올라왔다. 그 분들에게 생색을 내며 정상 박지를 양보(?) 했다. 생색을 내서인지, 나의 후퇴가 누군가의 기쁨이 되었다는 보람 때문인지, 아주 조금 기분이 좋았다.


다시 비선대로 되짚어 내려가는 길. 비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비구름이 걷혀가는 공룡능선


이 예쁜 것을 남겨두고 가야한다 생각하니 발걸음이....


절반쯤 내려오자 해가 나기 시작하더니



장군봉 정도 오니 쨍쨍해졌다. 해발 600미터 정도 되는데 여기는 단풍이 아직이다.



천불동 계곡에 오니 새파란 하늘이 ㅠㅠ



속초 시외버스 터미널의 아름다운 석양 ㅠㅠ



이왕 내려가기로 결심한 것, 열심히 걸었더니 소공원까지 세 시간 쯤 걸렸다. 배낭을 대충 싸서 그런지 어깨가 빠질 것 같다.


어제 무박 버스를 타고 오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저녁에 먹을 맛있는 볶음밥을 생각하며 샌드위치 하나만 먹었다. 끼니를 먹은 것이 없으니 배낭 무게가 하나도 줄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박 3일짜리 풀 배낭을 메고 잠을 못 잔 상태에서 빈 속으로 획득 고도 1,300미터, 8시간짜리 당일 산행을 했다.


그런데 왜 산에 다녀온 기분이 하나도 안 나는 것인지? 거대한 허탕을 친 이 기분의 정체는 무엇인지?


내려와서 전화를 했더니 엄마는 그 사이 괜찮아져서 병원은 안 가기로 했다 하신다.


정말 다행이다. ㅠㅠ




2023.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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