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설악산 울산바위 황철봉
많은 밤을 설악에서 보냈다.
산장(당시엔 대피소가 아니라 산장이었다) 앞에 야영이 허용되던 시절, 눈 쌓인 희운각 산장 앞에 텐트를 쳐 놓고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남는 식량을 얻어 먹으며 산 구경 사람 구경으로 10박 11일을 보낸 적이 있다. 반대로 악명 높은 98년 1월 폭설 땐 공룡능선에 고립되어 4박 5일 걸려 필사적으로 설악산으로부터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지금은 국립공원 관리공단 사무실이 되어 있는 백담산장은 벽난로가 유명해서 산장 안은 겨울이면 늘 희미한 연기 냄새가 떠돌았고 밤이 되면 낯모르는 이들이 벽난로 장작불 앞에 모여 앉아 밤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공권력을 피해 도망다니는 재야운동가, 영혼의 위안을 찾아 쌀 한 말을 지고 정처없이 산으로 들어온 사람, 누가 보아도 베테랑으로 보이는 전문 산꾼, 나같은 초보 등산객들이 함께 모여 앉아 산 이야기를 나누며 타닥타닥 나무 타는 설악산의 밤에 젖어들었다. 그런가하면 역시 지금은 폐쇄된 대청산장의 겨울 저녁, 저체온증에 탈진한 등산객이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면 그날 우연히 만난 산객들이 함께 구조를 나가 사람을 데려오기도 했었다.
대청봉 능선을 유유히 걸어 넘어가는 호랑이를 겨울밤에 보았다는 대청산장 관리인의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목격담에 경외의 눈길로 다시 한 번 산을 바라보았고, 날아가 버릴것 같은 살인적인 겨울 바람에 혼쭐이 난 사람들이 산장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서로 말없는 응원과 안도의 눈길을 교환했다.
원인 모를 공포가 밀려와 혼자 잔뜩 긴장해 있던 저항령의 밤, 쥐 한 마리가 텐트 안으로 들어와 출구를 못 찾고 돌아다니는 통에 좁은 텐트에서 혼자 난리 법석을 떨기도 했고, 단풍물 예쁜 백담계곡의 새벽 물가에 넋놓고 앉아 평화로운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다.
마등봉 꼭대기에 텐트를 쳤다가 밤중에 천둥번개가 번쩍이는 바람에 빗속에 황망히 짐을 걷어 내려가며 공포에 떨던 저녁도 있었고, 공룡능선 신선대 위에서 속초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심심한 저녁도 있었다.
비선대 산장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 옆자리 여자 두명에게 마등령까지 안내해 준답시고 어정쩡한 간격을 유지한 채 몇 시간을 걷다가 말도 몇 마디 못 붙이고 뻘쭘하게 마등령 삼거리에 남겨두고 내려온 적도 있고, 그런가하면 1275봉 아래의 어느 저녁 옆 텐트 아저씨들과 말문이 트이는 바람에 허풍 섞인 등산 무용담을 경쟁하듯 늘어놓으며 못 먹는 술을 억지로 들이켜기도 했다.
비오고 쌀쌀한 가을날 길골에서 가슴까지 계곡물에 빠지는 바람에 저항령에 텐트를 쳐놓고 틀어박혀 덜덜 떨어보기도 했고, 단풍이 한창이던 또다른 비오는 가을날 가야동 계곡의 텐트 안에 누군가와 나란히 누워 조용히 설레는 밤을 보내 보기도 했다.
하산이 늦어져 곤란해하길래 내 텐트에서 하루밤 재워주었던 지나가는 등산객 아저씨와, 마등령에서 자리만 깔고 노숙하던 밤 능선 위로 거대하게 떠올랐던 수퍼 보름달과, 그 많은 밤을 함께했던 나의 친구들, 힘들어하고 행복해하고 더워하고 추워하고 때로는 취해있던 그들의 얼굴, 모든 것들이 내게만 보이는 타임캡슐이 되어 설악산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 밤들을 다 합치면 몇날이 될까? 세 자리 숫자 어딘가가 될 것이다. 야영이 금지되고 규제가 강화되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 들었지만 이 '불법' 행위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관료제 시스템의 통제 권력이, 조상이 물려주고 한국인으로서 타고 태어나는 천부의 권리를 부당하게 빼앗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밤은 울산바위다.
울산바위에서 하룻밤 자는 게 산행의 목적은 아니다. 황철봉과 저항령 가는 길에 울산바위를 경유하는 코스다. 이렇게 가면 황철봉에 접근한다는 것을 (즉 야음을 틈타 미시령 철조망을 월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2년 전 뒤늦게 알았고 이제야 스케줄을 잡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은 물론 설악산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멋있는 지점은 마등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장 마음에 남는 봉우리가 어디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황철봉이라고 답할 것이다.
삭막하기만 한 황철봉의 끝없는 너덜이 왜 그렇게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끝이 없을 듯한 너덜에서 씨름하다 어느 순간 찾아오는 무기력감이랄까, 압도되는 느낌 때문일 수도 있다. 너덜 위에서 한없이 늘어지는 산행 시간에 조급해 하다가 어느 순간 탁 포기하며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어떤 것이 너무나 압도적이면 그냥 포기하고 순응하게 되는 마음의 작용일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황철봉을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울산바위 서봉에 올랐다.
사람은 없다. 하루종일 부부 한 쌍을 유일하게 만났다. 구름이 잔뜩 끼었고, 바람도 없다. 올해는 단풍이 늦어 10월 초인데도 단풍철의 알록달록함도 없다. 딱히 사진으로 찍을 일몰도 없다.
그냥 조용할 뿐이다. 우리 둘이 그냥 대화를 하는데 목소리가 에코로 되돌아온다.
밤이 되자 울산바위는 마치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신비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설악산은 늘 신비하다. 불친절하고 차갑고 아름답고 신비하다.
밤에 구름이 걷히며 별빛이 반짝이기 시작하자 오늘의 동행 문식이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경치를 자랑하느라 바쁘다. 은은하게 빛나는 바위와 그 너머 반짝이는 별들, 아무리 설명한들 이 분위기가 말로 얼마나 전달될지 의문인 나는 사진을 열심히 찍어본다.
하지만 반짝이는 별빛에 몸과 마음이 녹아드는 청명하고 쌀쌀한 이 밤을, 말이건 글이건 사진이건, 우리같은 평범한 인간들이 대체 어떻게 표현해 내겠는가.
황철봉 아래여서일까. 고요한 밤이어서일까. 밤새 산은 조용하고 경건했다.
그렇게 또 한번 설악산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2023. 10. 16.
(다음날 울산바위 출발, 황철봉, 저항령, 길골 거쳐 백담사 하산까지 9시간 걸린 산행의 GPX는 아래)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910118/6157896/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