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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Nov 16. 2022

사과의 굴레와 운동권 내 가스라이팅

탈꿘연대기 (1)

길고 긴 고민과 망설임 끝에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이제까지 다음과 같은 고민에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내가 쓰는 글이 운동권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한 개인의 문제를 내가 집단 전체의 잘못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의 잘못을 포장하고 변명하고자 이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탈꿘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면 어떡하지? 내 글이 기존의 정치혐오를 더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아마 내 고민을 늘어놓자면 이 페이지로는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기나긴 고민의 끝에 결국 키보드 앞에 섰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들만의 리그가 된 운동권 안에서, 갈려나가고 튕겨져나간 누군가를 기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떠나는 이들은 항상 모종의 죄책감에 발목이 잡혀 침묵해야만 했기 때문에. 좁디 좁은 지방이라는 곳에서, 그 중에서도 운동권이라는 작은 공동체 속에서 부조리함을 느끼더라도 조직적인 가스라이팅에 말이 막혀 아무도 제대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때 못한 말들을 지금이라도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운동권을 떠나면서 죄책감에 휩싸였고, 그 후에도 오랜 시간동안 후회와 혼란 속에서 방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당시의 나는 절박하고 처절했던 나날 속에서 위태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경험을 언어화할 여유도, 자원도 없이 무작정 행동으로 돌진해야만 했다. 한 발 한 발 내딛기 급급해서 내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고, 구조적이고 객관적으로 어떤 일련의 사건들을 파악하지 못한 채 모든 것들을 내 잘못으로 달아두기에만 급급했다. 이제 내 발목에 얽매인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주고 싶다.


어쩌면 개인적인 이야기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제 제가 이야기해도 되나요?


나는 내가 스무살이었던 2014년부터 학생운동에 몸을 담그게 되었고, 2019년 여름에 내가 있던 운동권 조직에서 큰 사건이 있어 그 운동 조직을 나오게 되었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그 시절 속에서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고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보고 싶다.


 나보다 먼저 운동권 조직을 나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처음엔 끝까지 같이 세상을 바꾸기로 약속해놓고, 먼저 가버린 친구가 야속하고 밉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힘들어하는 얼굴을 보이는 친구에게 차마 내 서운함을 토로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여전히 그 곳에 멈춰 서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디론가 나아가며 운동(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들 또한 여전히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일종의 의례처럼 그 미안함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항상 그래왔듯이, 괜찮다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며 친구들을 위로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늦은 시간에 갑자기 내 집 근처 술집으로 나를 불렀다. 늦은 시간에 온 연락에 발음이 꼬이고 오타가 많은 친구의 상태가 걱정되어 나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친구는 술에 만취한 상태로 나를 웃으며 반겼고 늦은 시간에 갑자기 불렀는데 와 줘서 너무 고맙다며 나를 안아주기까지 했다. 여기까진 좋았다. 우리는 신나게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흡연 구역에서 같이 사이좋게 담배를 나눠 피웠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놀라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라고 물었다. 친구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너 혼자만 남겨두고 떠나서 미안해, 근데 나는 너무 힘들어, 더 이상은 못하겠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지. 친구는 고개를 떨구고 내 손을 잡았다. 내 손에 닿은 친구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말 놀란 나는 친구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몰라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그러지 마, 라며 허겁지겁 친구를 안고 토닥이고 눈물을 닦으며 달래주었다. 한 바탕 진땀을 빼며 친구를 어르고 달랜 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친구를 겨우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가는 길에 복잡한 심경을 느끼며 주구장창 담배를 물었다. 아니, 살다보면 몇 번이나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데, 왜 유독 운동 조직에서는 이렇게까지 미안함을, 아니 미안함을 넘어서는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면서 나가는 친구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그 때부터 이 의문은 내 마음 한 켠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그 후 시간이 꽤나 지난 다음에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이러한 일을 겪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운동 조직에서 선배들이랑 한창 설전을 벌이고 있었고, 매일 울거나 화를 내다 지쳐 자기 일쑤였다. 그런 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나보다 먼저 그 운동 조직에서 활동을 하며 조직의 사람들과 한창 싸우다가 먼저 나간 선배였다. 선배는 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며 전화를 주신 것이다. 나는 나를 걱정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동받았고, 아무에게나 할 수 없었던 내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너무 갑갑하고 화가 난다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사실 나는 어떤 해결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애교어린 하소연을 하듯이 속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선배는 한참동안 내 하소연을 듣다가 문득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다. 자신 또한 그러한 문제로 설전을 많이 벌였으나 결국은 조직의 문제를 바꾸지 못하였다고. 그렇게 바꾸지 못한 채 자신만 먼저 나가버려서 내가 지금 자신과 비슷한 문제를 안고 힘들어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는 너무 놀랐다. 나보다 오래 전에 활동을 하다가 나가신 선배마저도 나에게 사과를 하자 숨이 막혔다. 선배는 활동을 그만둔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러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오신 걸까? 나는 이 선배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운동 조직의 누군가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막상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묵묵부답인데 선배만 나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나에게 사과를 건네는 선배의 목소리는 약간 목이 메인, 울음을 삼키는 특유의 쇳소리가 났다. 선배가 짊어져 온 죄책감의 무게와 그 무거운 죄책감을 끌고 온 시간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단호하게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그땐 선배도 혼자였잖아요. 혼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 바꾸겠어요. 선배는 그 때 최선을 다하셨어요. 저한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뭔가 잘못되었는데’ ,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 혼란스러웠다. 아마 나 또한 선배처럼 무언가를 바꾸지 않고 이대로 화만 내다가 혼자 이 조직을 나가버리면 시간이 지난 뒤 나 또한 누군가에게 사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왜 활동이나 운동 조직으로부터 떠나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죄책감을 안고 사라질까. 이러한 의문을 오랫동안 품고 지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활동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 운동 조직을 나가지 않을 때도, 그러니까 활동을 할 때도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그 죄책감은 어디에서부터 기원한 것일까?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운동권 내 가스라이팅’으로 정의하고 싶다.


  보통 운동이나 활동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운동을 하는 개인의 ‘주체성’을 언급한다. 주체성이 강하다고 평가되는 기준은 책임감과 능동성이며, 이러한 주체성이 운동의 성공을 좌우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성이 가스라이팅의 결과라면 어떨까? 아마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면 다들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생각해 개인의 ‘주체성’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겪은 가스라이팅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가스라이팅 가해자는 나를 극단적으로 고양시킨다. 나의 좋은 점과 나에게 거는 기대, 내가 짊어질 수 있고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역할 등 나에 대한 긍정적인 모든 감정을 과잉 투사하여 내가 그것을 이뤄주길 바라며, 마땅히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네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 아니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피해자에게 일종의 사명감을 안겨준다.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본인 또한 가해자가 원하는 대로 믿게 된다. 역량의 올려치기라고 생각하면 좀 더 편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 가족 내의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양상과 비슷할 것이다.


내가 들었던 말들로 이 가스라이팅을 설명해보자면, 먼저 "네가 00운동의 희망이다.", "네가 아니면 이 운동은 망할 것이다.", "너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이라는 말들로 개인을 운동의 주체로 현혹시킨다. 이러한 말을 들은 사람은 ‘정말 중요한 역할임에도 나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막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며, 일종의 고양감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라고 선택받은 느낌은 사람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의 무서움은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정말로 할 사람이 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가 하지 않게 된다면, 나는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음으로써 운동 사회에 큰 악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해야 할 사람이 정말 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내가 무언가를 하게 된다면, 이 운동의 성패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달려있다는 막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어찌 되었든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운동의 주체가 된 개인은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운동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평가를 받게 된다. 이 때 운동권 조직에서는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치켜세우며 조직에 대한 개인의 의견을 묵살시킨다. 만약 운동이나 활동을 하며 개인이 어떤 조직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조직이 너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불평하지 말고 네가 스스로 얼마나 주체적으로 행동했는지 점검해라.", "너의 말은 하소연이고 불평, 불만일 뿐이다. 네가 조직에게 너의 요구를 정확히 전달하였느냐"라고 되묻는다. 이러한 말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여기에서 '주체성'은 결국 조직과의 관계에서 활동이나 운동에 대한 개인의 노력과 책임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이 ‘주체성’의 함정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먼저 조직과 개인의 관계는 절대 평등할 수 없다. 하지만 '주체성'이라는 말은 그 조직과 개인의 명백한 권력 구도를 가리고, 개인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긴다. 오히려 그런 권력 구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주체성'을 가진 개인의 의무라고 여긴다. 이는 명백히 비논리적인 사고이다. 사회와 구조에게 어떤 문제의 책임을 묻고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운동이나 활동을 하는 것인데, 그런 운동의 성패에 대하여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치켜세우며 오로지 개인에게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앞 뒤 순서가 맞지 않는 일이다.


운동권 내 가스라이팅의 유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가해자는 먼저 자신의 타겟을 극도로 고양시킨다. 2. 가해자는 타겟에게 일종의 사명감과 의무감을 고취시킨다. 3. 가해자의 제안에 따라 타겟은 어떤 활동을 하게 되고, 어떤 일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하는 것)을 맡게 된다. 4. 어느 날부터인가 가해자는 타겟이 된 이를 비난하고 그의 죄책감을 자극시킨다. (이유는 가해자가 원하는 대로 피해자가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피해자의 항변을 '주체적이지 못하다'며 압살한다. 5. 운동이나 활동이 끝난 뒤, 그들은 그 활동을 성공 혹은 실패라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인 시각으로 나눈다. 만약 가해자가 그 활동을 실패라고 규정할 때,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음을 은근히 주장한다. 이 때 피해자의 의견은 '불평', '불만'으로 치부된다. 6. 기가 죽은 피해자는 어느 순간부터 가해자에게 순종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스라이팅의 후유증은 어떤 것이 있는지 나의 경우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첫 번째로는 나에 대한 불신이 생기게 된다는 점이다. 올려치기를 당한, 미화된 나의 모습은 진짜 내 모습이 아니며 나는 항상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타인에게 받은 긍정적 피드백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타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경험은 꽤 달콤한 유혹이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기꺼이 해보고 싶을 만큼. 하지만 이러한 올려치기가 계속될수록 당연히 실패의 경험 또한 누적된다. 그 결과 스스로에 대한 기대나 스스로에게 갖는 일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너지게 되면서 결국 자신을 불신하게 된다. 나의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영역과 해야 하는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고, 내 역량의 한계로 해야 하는 영역의 일을 실패하자 이를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타인에게는 '정신력이 나약하다'고 평가받았으며 나는 그 평가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경험이 누적될수록 나는 점점 타인의 부정적인 판단에 얼룩지게 되고, 이전의 내 모습은 어땠는지 잃어버리게 된다.


두 번째로는 모든 것의 원인을 자신으로 돌리게 된다는 점이다. 사실 모든 일의 인과관계를 사람이 다 파악할 수 없고, 그 인과관계에 영향을 주는 모든 변수를 모두 통제하고나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연루된 어떤 활동의 흥망성쇠(특히 망과 쇠에 대하여)에 대하여 타인들의 피드백은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네가 주체적이지 않았던 건데 왜 다른 사람을 탓해?" 앞서 나는 누적된 실패의 경험을 언급하며 자신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에 대한 불신이 생긴 사람은 타인의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신이 저지른 실패를 만회할 결과를 이뤄내야 한다는 강박감과 더 이상 선배/조직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생기게 된다. 선배들이 어떤 일의 실패 이후 나에게 다른 제안을 건네기만 해도,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 생각해 함부로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예스맨처럼 모든 제안을 넙죽넙죽 받아들였으나, 장렬히 실패했고, 선배들로부터 "차라리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말하지 왜 할 수 있다고 말해놓고 안 하느냐", "네가 한 말도 스스로 못 지키는데 누가 너를 믿겠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꼭 이야기하고 싶다. 모든 일이 잘 될 수는 없는 것이고, 사실 못 해도 괜찮다고. 그것이 꼭 자신의 치명적인 실패라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우리는 더 긴 시간을 살아가고 여러 경험을 쌓으며 자신을 만들어가야 살아가는데, 그 경험들을 오직 실패와 성공으로 구분지을 순 없는 거라고. 타인이 '실패'라고 규정한 어떤 활동에 대하여 주눅들 필요가 전혀 없다고. 그리고 그게 잘못의 영역은 절대로 아니라고. 그건 그 사람의 시각에서 평가한 것 뿐이라고. 그리고 그건 죄책감을 자극해 당신을 멋대로 휘두르려는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최근 가스라이팅의 정의를 살펴보다가 이런 문장을 보게 되었다. 자신을 자꾸 믿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가스라이팅일지도 모른다고, 한 번쯤은 의심해보라고. 이 문장에 힘입어 나는 감히 물어보고자 한다. 물론 타인의 긍정적 평가가 진심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 평가로 인해 무엇을 추동하고자 하였는지를 되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정말 그 평가가 그 사람을 위한 것이 맞느냐고. 그러면 당신 밑에 있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왜 다 울면서 떠나갔느냐고. 왜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느냐고.


운동 조직에 있는 누구나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이 가스라이팅이라는, 일종의 폭력으로 정의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감히 이 부분을 폭력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가 논의의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없으며 아직 폭력으로 정의되지 않았기에 이것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정제된 언어로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은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도 없고, 자신 또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기나긴 시간동안 오직 그 한 사람만이 깊은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된다. 더군다나 스스로의 역량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면서 자신만의 바운더리를 스스로 설정할 수 없게 되어 자신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되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이 고통에 시달리다가 이제야 겨우 입을 열 용기가 생겨 정제된 언어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 글의 대부분은 나의 일기장에서 발췌하였으며, 괴로워하면서도 연필을 놓지 않은 결과가 없지는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고통은 해석될 때 의미를 가진다는 말을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고통은 아직 논의되지 않은 고통이다. 많은 사람들의 힘이 모아져 이 고통이 해석될 수 있기를 바란다.





왜 그들은 가스라이팅을 하는가? 에 대한 고찰


제 글이 여러분의 발화의 시발점이 되길 바랍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운동이나 조직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것을 한 개인이 돌파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아무나에게 이런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직접적으로 이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할 때도 있지만. 조직에는 이러한 개인을 검증하는 절차가 있다: 개인의 헌신과 충성을 검증한 후 과도한 역할과 막대한 책임감을 갖게하여 개인이 그것을 버텨내면 “진짜 활동가”로 여기지만, 그것을 버티지 못하면 ‘이기적인 개인주의자’로 여긴다. 이건 사람을 굉장히 납작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자신들(운동권) 이외의 관계는 다 끊어놓으려고 한다. 그게 연애든 친구든 가족이든 자신들보다 더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굉장히 불안해한다. 그렇기에 걱정하는 척 하며 그 사이의 갈등에 집요하게 캐묻는다. 그리고 사상적 견해가 맞지 않으면 진정한 친구/애인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가족들과의 갈등은 그 자체로 당연하다고 여긴다. 자신들의 사고와 가치관에 맞지 않는 인간들이 타겟(피해자)의 근처에 있는 것을 가만 두지 못한다. 그러면서 ‘네가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해해줄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고 하며 고립된 사람들이 더욱 처절하게 운동권에 얽매이게 한다.


-운동이나 조직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 가스라이팅은 빛을 발한다. 문제를 같이 해결해보자며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 모든 개인이 각자 자신의 뇌수에서 즙을 짜내듯 이 상황을 돌파할 아이디어를 짜내도록 만든다. 그리고 한 개인을 불러 ‘너는 뭐든 다 할 수 있다’, ‘아무나 이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너는 할 수 있다’ 고양된 상태를 넘어 개인을 각성시킨다. 그리고 그 상황을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를 언급하며 일종의 공포감을 주며 개인이 그 역할을 받아들이길 노골적으로 바란다. 그런 가스라이팅에 당한 사람은 울며 겨자먹기로 선봉대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개인에게 ‘너는 뭐든 다 할 수 있어!!’ 따위의 말을 하는 순간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몫이 같이 감당하는 것보다 커진다는 걸 이젠 좀 알아야 한다.


2. 조직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운동권에는 ‘조직관’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개인이 조직을 바라보는 시각을 말하지만 운동권 내에서는 ‘조직에 충성하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조직관이 높은 사람일수록 가스라이팅이 잘 된 경우이며, 조직의 결정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조직의 구성원인 개인은 반드시 따라야 하며, 조직이 어떤 결정을 함에 있어서 실수를 할 리가 없다고 여긴다. 설사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조직의 결정을 함께하지 않는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의 책임감을 운운하며 비난한다.


-가스라이팅의 중간중간 조직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곳인지, 만약 조직이 없어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이야기하며 개인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데, 이 가스라이팅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게 되면 조직의 와해를 자아의 상실보다 더 큰 문제로 느끼게 된다.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3. 조직이나 운동의 도구로 개인을 손쉽게 이용하기 위해서


-가스라이팅 초반의 작업들은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도록 만드는 작업이 있다. 예를 들어 활동과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며, 개인의 삶에서 활동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아야 한다고 설득시킨다. 이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거나 반감을 표시하면, 개인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이기적인지를 이야기한다. 이에 설득을 당하게 된 개인은 풀이 꺾인 채 다음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너의 생각을 믿지 말고 조직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활동과 운동이 지속되면서 ‘네가 해야만 한다. 너만 할 수 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건 네가 놓친 것이다. 그건 네가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는 논리로 점점 진화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이 어떤 인성/인품의 문제가 있어 그 문제를 놓치게 되었는지 하나하나 해설하기 시작한다. 결국 모든 문제를 개인의 인성/인품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운동권 조직의 내부적 논리에 따르면, 그들의 활동은 정당하고 정의롭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차별이나 위계, 폭력에 대하여도 정당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하면 조직은 개인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개인이 조직 내에서 설 자리를 점점 흔들거나 없애버린다. 나는 이것을 ‘팽당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토사구팽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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