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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eal Jun 30. 2024

선택

2022.04.25

"이제 제가 쓰는 돈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떳떳하게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고 부모님께 큰소리를 쳤었다. 그 말을 후회한 적은 당연히 많았지만,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더 가지게 되었고 그 뿌듯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물론 자취를 하기 위한 방을 새로 구하는 것도 내 능력이 닿는 선에서 해야 했다. 보증금과 월세를 편의와 자유를 위해서 투자하자니 조금은 아깝기도 했고, 더 유익하게 쓸 수 있을 것만 같아 통학을 선택하고 여행을 떠났다(물론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도 내 결정에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렇게 새 학기가 시작되고 매일 아침 일찍 통학 길에 나서게 된 나는 소중한 내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는 것이 싫었고, 군대에서 책을 읽던 습관을 다시 꺼내 그 습관을 나의 아침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 보니 생각보다 출퇴근 지하철의 지옥 같은 시간도 잘 흘렀고, 그 몰입감이 상당해 심지어는 내용에 빠져들어 역을 지나치는 경우도 두어 번 있었다. 예전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프랑스 작가를 좋아했는데, 그의 <파피용>, <아버지들의 아버지>와 같은 장편소설은 늘 경이로웠고 나의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했다. 그런데 요즘은 소설보다는 산문이 좋다. 물론 작가의 글에 따라 다르겠지만, 산문의 흐름은 내 기억의 파편을 끝없이 나열하고, 읽다가도 눈을 감고 그 내용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 나의 선택은 어땠었나? 하는 생각. 요즘은 입에 맞지 않는 내용의 수업을 학점을 받아내기 위해 정신력으로 버티며 삼키고, 견뎌낸 하루의 끝에 집으로 돌아오며 나만의 사색을 통해 입맛을 다시금 돋운다. 아무래도 나에게 근래의 가장 큰 사건은 '유럽여행'이었기에,  사색은 나를 그 시간 속에 다시 뛰어들어 걸었던 길을 다시 걷게 한다. 그렇게 그 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기억의 끝에 도달하고, 결국 내가 왜 집을 떠나 그렇게 먼 길을 나섰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게 된다.


데이비드 실즈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다.'


돌이켜 보면, 나는 군 복무를 마친 후 길지 않은 고민 끝에 몰타로 떠나는 비행기 표를 왕복도 아닌 편도로 사서 짐을 꾸렸다. 부끄럽지만 사실인 것은, 1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기계처럼 시키는 일을 하고 개미처럼 열심히 일했지만 그 시간의 끝에 새로 시작될 내 삶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나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원래의 삶'으로부터 멀리 도망친 것이다. 물론 도망쳐 도착한 곳에서 만든 추억과 얻은 깨달음은 무척이나 값지지만 그 시작은 분명히 '회피'라는 것이다. 좋게 포장해서 얘기하자면, <삼십육계>라는 중국의 고대 병법서의 마지막 부분은 [패전계]로 적의 힘이 강하고 내가 약할 때의 방책이 나와있다. 나는 그 서른여섯 번째 계책인 '주위상'을 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주위상'은 불리할 땐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계책이다. 나는 여행이라는 명분으로 '도망' 혹은 '회피'라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아무런 후회도 없다. 우리는 선택이라는 갈림길에서 어떤 색의 길을 따라 걸어갈 것인지 늘 고민한다. 아침에 일어나 어떤 옷을 입고 하루를 시작할지, 학교에 지하철을 타고 갈 것인지 아니면 자가용을 타고 갈 것인지, 등. 우리는 편의라는 나침반을 꺼내들어 그 갈림길에서 방향을 찾아 길을 택하고, 설령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길이 잘못된 길임을 알게 되어도, 그 순간 후회라는 가능성이 존재함은 개의치 않고 '또 다른 선택(새로운 선택)'을 하곤 한다.


예컨대, 나는 복학이라는 길과 자퇴라는 길 앞에서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대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실질적으로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방향성을 확실하게 잡아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기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던 친구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학문을 택하고 미국으로 떠나기도 했었다. 마침 나는 몇 천만 원 정도를 모아둔 상황이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회로 걸어나가 무작정 장사를 시작해 볼까 했다. 무모하다고 얘기하는 주위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넘어지고 또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면 된다는 마음가짐이었고, 용기가 있었던 나는 덮밥집을 차려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왜 하필 덮밥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필이 아니다. 나는 꼭 덮밥이어야만 했고, 덮밥은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덮밥이라는 음식이 나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이유는 아마도 칭다오에 살던 시절 때문도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하루 20위안(당시 한화로 3700원)을 용돈으로 받았고, 그 돈으로 하루를 생활해야 했다. 아침은 엄마가 차려주는 집 밥을 먹고, 점심은 학교 급식을 먹었기에, 용돈으로 간식이나 저녁을 해결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아침에 8위안으로 담배를 한 갑 사고 나면 남은 12위안으로 늘 황먼지(黄焖鸡)를 저녁으로 사 먹었다. 황먼지는 중국식 찜닭으로, 간장을 기본 소스로 하고, 닭고기를 뼈째로 썰어 넣고 각종 야채와 함께 살짝 매콤하게 졸여낸 음식이다. 학교 뒤편 황먼지집의 인심이 후한 사장님은 쌀밥을 아낌없이 퍼줬고, 친구들과 나는 닭고기와 야채를 다 먹더라도 자글자글하게 졸여진 그 국물에 밥을 몇 공기 씩이나 비벼 먹었다.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 나서는 친구들과 같이 담배를 태우며 포만감을 느꼈고, 나른한 기분과 함께 마음까지도 든든했다. 맛도 맛이지만, 그 황먼지집은 쉼터였다. 그곳은 나에게 집보다도 편한 곳이었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곳이었다.


일본에서 먹었던 덮밥도 빼놓을 수는 없다. 성인이 된 후 떠난 첫 여행의 도착지는 일본의 오사카였고, 가장 친한 친구와 경제적 부족함 없이 누빈 곳이기에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여행을 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았고, 인터넷에 소개된 소문난 맛집을 가기보다는, 골목에 있는 선술집과 그 지역의 서민들이 찾는 식당을 따라 들어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들어간 프랜차이즈 덮밥집은 그 여행에 한 획을 그었다. 우리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터라 무턱대고 영어로 얘기했지만, 영어를 하지 못하는 종업원은 어떻게든 우리와 의사소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냈다. 그렇게 힘겹게 주문한 덮밥은 프랜차이즈인 만큼 빠르게 준비됐고 기대에 가득 찬 마음으로 우리는 덮밥을 허겁지겁 먹었지만, 생각과는 다른 덮밥의 맛에 조금은 실망했었다. 자극적이고 짠맛이 강할 것이라고 생각한 일본의 부타동은 결코 강한 향을 뿜어내지 않았고, 싱겁고, 부드러웠다. 삼삼한 그 맛은 은은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고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부드럽고, 포근한 덮밥이었다.


나는 내가 느낀 따뜻함을 모두에게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자극적이진 않지만, 그 덮밥 같은 은은함을 오래오래 풍기고 싶었다. 그래서 덮밥을 택하고 싶었고 과거에 그 선택을 한 나의 현재에 대한 상상을 수업이 했었다. 문이 열리고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는 인기척과, 나무판자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힌 덮밥 메뉴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자신이 느낄 따뜻함을 선택하는 손님, 늘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손님의 손짓과 그 삼삼함 위에 생노른자를 하나 더 올리는 나의 미소.


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고, 지금 내 주위에 맴도는 아름다움도 다를 것이다. 물론 그 선택을 한 나의 곁에는 지금의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아름다움도 있을 수도 있다. 그저 그런 선택은 어떤 나를 만들었을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뿐이고, 그 색깔의 길을 걷지 않은 나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에 방향성을 정해주는 마음속의 나침반의 솔직함이다. 자신에게 정직해야 하며, 선택의 순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해 후회라는 상처를 낳는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그 상처를 자꾸만 건드려 흉터로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하며, 상처가 나더라도 털어내며 경험으로 생각하며 지혜로 승화시켜야 한다.


살아가다 마주쳤던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을 한 나'를 대한 상상하는 행위란 얼마나 전지전능한가. 그 상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가엽게만 느껴진다. 상상을 통해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색다른 에피소드를 만들어 삶을 여러 번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나는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이자, 나는 글을 좋아하는 대학생이기도 하며, 덮밥집을 차려 따뜻한 덮밥을 만들어 손님에게 대접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과감하게 선택을 하자. 그 선택이 또 다른 선택을 불러올 때, 잠시 마음속의 나침반을 내려놓고 이전의 다른 선택에 대한 상상을 하며 새로운 지혜를 얻고, 풍요로운 삶을 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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